한희정, 크라잉넛, 임헌일, 씨스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희정, 크라잉넛, 임헌일, 씨스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희정, 크라잉넛, 임헌일, 씨스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나는 여기에 없는 너를 여기에서 본다, 나는 저기 있을 너를 여기에서 본다.
한희정 ‘나는 너를 본다’ 中

한희정 〈날마다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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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들이 강림하고 있다. 타루에 이어 한희정, 요조까지 이른바 ‘홍대 여신’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차례로 컴백하고 있기 때문. 솔직히 홍대여신이라는 용어는 땅에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겹다. 한희정 본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날마다 타인〉에 담긴 음악은 홍대여신이라는 용어를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다. 사실 한희정은 더더, 푸른새벽 시절부터 비교적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들려줬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예쁘기보다 고혹적이었지 않았나? 새 앨범에서 한희정은 의욕적으로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스타일들을 들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인 ‘흙’, 복합적인 리듬의 ‘직장인’도 흥미롭지만 ‘더 이상 슬픔을 노래하지 않으리’ 같은 어쿠스틱 곡에서도 성숙함이 느껴진다.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노래 ‘이 노래를 부탁해’는 한희정 식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한희정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서 그녀가 ‘4차원’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새 앨범을 들어보니 그것은 칭찬이었던 모양이다.

크라잉넛 〈Flaming N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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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넛의 7집.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크라잉넛도 이제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향해 가고 있다. 조선펑크의 발화점, 왕, 대부, 큰형님 등 수식어도 많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크라잉넛이 어디선가 공연하고 있을 거라는 것. 1년에 평균 150회 공연을 한다고 하니 통산 3,000회 공연 돌파가 멀지 않은 셈이다. ‘불타는 땅콩’이라는 제목의 새 앨범에서 크라잉넛은 여전히 ‘진격의 펑크록’을 들려준다. 크라잉넛은 특별한 콘셉트를 잡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데로 곡을 만들어갔다고 한다. 크라잉넛의 과거 앨범을 보면 간혹 심각한 곡들도 있는데 신보에서는 대체로 유쾌하다. 타이틀곡 ‘Give Me The Money’를 비롯해 ‘땅콩’ ‘레고’ 등에 크라잉넛 특유의 해학, 유머가 잘 담겨 있다. 마치 아일랜드 선술집에서 춤을 추며 밤새 맥주를 퍼붓는 경쾌한 상상을 하게 되는 ‘해적의 항로’, 낭만을 품은 ‘새신발’ 심오한 멜로디의 ‘미지의 세계’ 등 매력적인 곡들이 그득하다.

임헌일 〈사랑이 되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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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조 밴드 메이트 출신의 임헌일의 첫 솔로앨범. 임헌일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2006년경 브레멘의 공연이었을 것이다. 좋은 보컬과 탁월한 기타 연주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브레멘은 완성도 높은 연주, 편곡으로 가요풍의 멜로디를 들려줬다. 돌이켜보면 브레멘은 몇 년 후에 인디 신에서 대세를 점하는 데이브레이크, 노리플라이와 같은 팀들의 전초전 격이 아니었을까? 이미 메이트로 한 때 인디 신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임헌일은 〈사랑이 되어가길〉을 통해 자신의 첫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동료들 사이에서 실력파로 꼽히는 명성에 걸맞게 앨범의 완성도는 탄탄하다. 싱어송라이터, 연주자,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세계를 마음껏 펼친 듯. 첫 곡 ‘다시 시작’의 가사, 멜로디부터 비로소 자신의 음악을 시작하는 대한 뚜렷한 의지가 느껴진다. 김덕수 사물놀이, 피아니스트 김광민, 기타리스트 신윤철의 참여도 어울린다.

씨스타 〈Give It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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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스타는 작년에 히트한 ‘나 혼자’를 기점으로 가장 바쁜 걸그룹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후 서머 스페셜 앨범 ‘Loving U’, 효린과 보라의 유닛 ‘씨스타 19’까지 승승장구했다. 씨스타가 잘 되는 이유가 뭘까? 섹시함도 큰 무기이겠지만, ‘나 혼자’ 등 기존 히트곡에서 잘 나타나듯이 과거 1990년대 풍의 가요 멜로디를 잘 살렸다는 점이 꽤 작용했다. ‘Loving U’만 해도 3인조 그룹 쿨이 떠올랐으니까. 씨스타 측으로서는 새 정규앨범인 〈Give It To Me〉를 통해 ‘굳히기’에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김도훈과 이단옆차기가 손을 잡고 만든 타이틀곡 ‘Give It To Me’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R&B, 힙합 성향이 상당히 강해졌다. 지금껏 씨스타의 음악은 대중에게 친숙한 가요 멜로디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세련되지 않게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신보에서는 어반(urban)한 감성이 돋보인다. 효린과 소유의 보컬도 곡 스타일과 잘 어울린다.

라 벤타나 〈Orquesta Ventana〉
라 벤타나(La Ventana) - 앨범자켓 640
라 벤타나(La Ventana) - 앨범자켓 640
‘오르케스타 벤타나’라는 제목. 오케스트라 라 벤타나란 뜻일까? 국내의 대표적인 재즈 탱고 밴드 라 벤타나는 3집에서 재즈, 클래식, 라틴 등 다양한 계열의 연주자들과 협연을 통해 다양한 커버 곡들을 선보이고 있다. 시인 김경주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Tango Apasionado’에서 시를 낭독하고 십센치가 김창완의 ‘빨간 풍선’을 탱고 버전으로 노래하는 등 흥미로운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큰 감동을 전하는 것은 ‘한국 재즈의 대모’ 박성연이 부른 ‘사의 찬미’. 이외에 두 기타리스트 박윤우와 박주원이 나름대로 해석한 피아졸라의 곡을 비교해 들어보는 것도 즐겁다. 가장 이색적인 트랙은 성기문의 해먼드오르간이 함께 한 카를로스 가르델(아르헨티나 탱고 작곡가)의 ‘El Dia Que Me Quieras’로 탱고의 맛에 오르간의 소울풀한 맛이 은은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곱창전골 〈그 날은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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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로 구성된 곱창전골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록을 하는 밴드다.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을 좋아해 한국에 건너왔건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왔다. 작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추천을 받아 아티스트 비자를 획득해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일까? 새 앨범 〈그날은 올 거야〉에서 곱창전골의 리더 사토 유키에의 목소리는 한층 밝아졌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사토 유키에는 한국에서 즉흥음악가로 활동하는 한편 〈홍대앞으로 와〉, 〈나는 한국 노래가 좋다〉 등 서적을 출간하는 등 한국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해왔다. 신보에서도 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노래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싸이키 만세 - In Memory of Love Camp’라는 부제를 단 보너스 CD에는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과 잼세션을 한 ‘2+1=2’를 포함해 10분대의 사이키델릭한 연주곡들이 담겼다.

블랙사바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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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오스본이 참여한 블랙사바스의 새 앨범이라니! 록 팬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 게다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초기 블랙사바스가 가진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더 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이다. 〈13〉이 그렇다. 원년멤버인 오지 오스본과 토니 아이오미, 기저 버틀러가 건재하며 계약 문제로 팀을 이탈한 드러머 빌 워드의 빈자리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드러머 브래드 윌크가 대신했다. 블랙사바스 특유의 파워풀한 사운드와 중후함, 어두운 이미지가 잘 살아있으며 무엇보다도 건재한 오지 오스본의 목소리가 반갑다. 최근 블랙사바스의 일본공연을 보고 온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오지 오스본의 목소리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하던데, 실제로 본다면 여한이 없겠다. 블랙사바스의 노래 ‘Paranoid’의 이름을 딴 국내 음악잡지의 ‘파라노이드’의 특집기사도 궁금해진다.

크리셋 미쉘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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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생인 소울 보컬리스트 크리셋 미쉘은 가스펠부터 최근 유행하는 PB R&B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소울 음악을 소화할만한 목소리를 지닌 뮤지션이다. 이는 칭찬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개성이 모호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아레사 프랭클린부터 휘트니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 미쉘 역시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레사 프랭클린, 패티 라벨 등 소울의 고전을 집중적으로 듣게 된 것은 음반사 계약 후라고 한다. 옛날 음악 안 듣는 것은 우리나 그네들이나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본래 데프 잼 소속이던 미쉘은 소울 명가 모타운으로 이적 후 4집 〈Better〉를 발표했다. 물론 지금의 모타운이 과거의 모타운은 아니겠지만, 〈Better〉는 2013년에 나온 앨범 치고 소울의 전통적인 면이 잘 살아있다.

사그 〈Best 201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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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5인조 비주얼 록 밴드 사그(SuG)의 베스트앨범. ‘헤비 포지티브 록(HEAVY POSITIVE ROCK)’을 모토로 하는 사그는 멤버 전원이 작사, 작곡, 연주를 담당함과 동시에 잡지 모델로도 활동하며 현지에서 스타일 아이콘으로 사랑받아싸. 작년 5월 첫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 팬들과 만난 사그는 같은 해 12월 소속사 이전과 함께 활동 중지를 선언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결성된 사그는 2010년 1월에 싱글 ‘Gr8 Story’로 메이저 시장에 데뷔해 같은 해 3월 메이저 정규 1집 을 발표하며 인기를 끌었다. 네 번째 싱글 ‘Crazy Bunny Coaster’는 오리콘 주간차트 3위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Best 2010~2012〉에서는 메이저 데뷔 이후에 발표한 음악을 골고루 들어볼 수 있다.

토미 엠마누엘, 마틴 테일러 〈The Colonel & The Gover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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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기타리스트 토미 엠마누엘과 마틴 테일러의 듀오 기타 앨범. 앨범재킷을 보면 토미 엠마누엘 옆에는 cgp(Certified Guitar Player, 공인기타 연주자), 마틴 테일러 옆에는 MBE(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 재즈 기타리스트 최초로 영국여왕에게서 대영제국훈장을 받음)라고 쓰여 있다. 둘은 내한공연을 다녀가기도 했다. 핑거스타일 기타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스타인 토미 엠마누엘의 공연은 재미있기로 정평이 나 있다. 마틴 테일러는 재작년 울프 바케니우스, 잭 리와 함께 ‘쓰리 기타’라는 타이틀로 한국에서 공연을 가졌다.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팝, 재즈 스탠더드, 그리고 마틴 테일러의 자작곡을 연주하고 있다. 기타 고수답게 악기로 심연의 대화를 나누는 한편 매 순간 자신만의 프레이즈, 톤을 선보이며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청자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악기 간의 대화.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제공. 파스텔뮤직, 젬컬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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