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걸음들을 지지하고픈 마음
"여성 예술가와 창작자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전달되면 좋겠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감독 유지영은 날카로운 시선과 동시에 침착하게 동시대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2018년 '수성못'을 통해 청춘들의 지난한 현실을 담아냈다면, 이번에는 경계선상에 놓인 여성을 통해 '우리'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영화는 주목받는 젊은 여성작가 '재이'가 신작 출간을 앞두고 연인이자 동거인 '건우'와의 사이에서 예정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균열이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장편경쟁 섹션 '발견'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프록시마 경쟁(Proxima Competition)' 부문 대상인 '프록시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당시 소감은 어땠나.
해외 영화제 초청이 처음이었다. 체코라는 먼 나라에서 한해인 배우랑 여성 촬영감독이 함께 갔었는데, 영화제 기간 너무 즐거웠다. 관객들이 상영관도 다 메워주셨다. 수상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랑프리 상의 존재 여부도 몰랐다. 프록시마 부문도 이미 발표된 상황이라서 상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얼떨떨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배우랑 몇 초 정도 정지했던 것 같다. 너무 놀란 기억이었다.
현장에서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다들 서서 보는 인원들이 있었다. 뒤풀이 파티를 하러 갔을 때, 수상 소감에 대해서 인상 깊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수상 소감 분위기도 좋았다. 한국 영화가 유일했던 것 같다. 너무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 이 순간들을 못 잊을 것 같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발견 섹션'에 선정되셨다. 26일에 GV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난 소감은?
GV 당시, 마지막 상영이라서 관객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질문을 많이 주셨다. 여성 영화제 관객들이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느낀다. 다른 영화제들은 관객분들이 질문을 많이 안 주셔서 모더레이터가 질문을 많이 해주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많이 주셔서 시간이 짧다고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한해인 배우에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묻더라. 내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나올법한 질문이었는데 처음 받아서 기억에 남는 것 같다. 2018년 '수성못'에서는 치열한 인생을 살아가는 짠내나는 청춘을 그렸다면, 이번 '피투성이 연인'에서는 엄마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재이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의 경력 단절과 관련된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가.
창작자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영화감독으로 하는 것은 객관화가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근접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 있는 한 두 달 말고는 카페에서 글을 쓴다. 평소에도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경력단절에 대한 여성의 이야기는 사실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창작자의 경력단절을 기사에서 본 적이 많던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재이 역의 한해인 배우 캐스팅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한해인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너와 극장에서'라는 단편을 찍었을 때였다. 다른 감독님이 찍으신 또 다른 에피소드에 나오셨을 때, 처음 봤다. '어떻게 저런 배우가 있지'라는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 처음 강렬했던 인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리하고 예민한 느낌이 있더라. 어떤 신체적인 것이나 목소리도 있지만 풍기는 아우라 자체가 강한 느낌이었다. 대화하면서도 많이 느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그렸던 부분이 한해인 배우한테서 충족되더라. 날이 서고 따듯한 부분과 쉽게 선택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캐릭터 재이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사는 직장인 건우와 소설을 쓰는 작가 재이의 직업이 정반대로 설정되면서, 두 사람이 미래를 보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 같다.
'꿈과 현실, 나와 우리가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두 개의 상징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찢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파국을 달리면서 민낯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재이가 아이를 갖게 되면서 각자 추구하는 것을 더욱더 강하게 욕망하는 거다. 건우는 건우대로 책임감이 늘어난다. 재이가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라면, 건우는 현실을 쫓는 사람이다. 물론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는 것을 서로 몰랐을 수도 있다. 임신이라는 계기로 욕망의 밑부분을 서로 알게 되고 자신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재이는 처음부터 건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글을 쓰지 않나. 두 사람의 관계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설정한 까닭이 무엇인지.
건우는 재이가 잘나가는 소설가이고 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열등감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양쪽 모두에서 그러면 좋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그런 것 같다. 재이를 서포트해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가로등 같은 경우도 그렇다. 재이는 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해줘도 몰랐을 것을 묵묵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받기만 하는 것보다는 각자 너무 다른 사람이다. 아마 건우는 '우리'라는 생각으로 재이를 챙기는 것이 희생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건우는 영어학원 강사로 학원의 원장이 제안한 분점을 오가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손보면서 인테리어까지 한다. 마치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면서 아기방을 꾸미는 모습처럼 느껴지더라.
이런 질문 처음 받아본다. (웃음) 스태프들도 안 물어봤던 거다. 놀랐다. 건우가 학원 원장에게 제안받아 초등학교 전담으로 분점을 가지 않나. 건우는 그 안에서 인테리어를 도맡는다. 자신의 아이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란 방은 실제로 영화 속에서 건우와 재이의 집에는 보이지 않는 아기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건우가 직접 고른다. 관객들이 모르더라도 '건우는 진심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건우 역의 이한주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대구 단편영화제에서 만났다. 이한주 배우와 함께 영화제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게 됐다. '파테르'라는 작품을 너무 좋게 봤었다.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이 있지만, 배우로서 이한주라는 사람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끌리는 것 같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에 관해 두 시간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작업에 들어갔던 것 같다.
차기작 'Bitrh'를 쓰는 재이는 임신하기 싫은 여자의 이야기를 책 안에 담아낸다. 편집장으로부터 주인공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라는 재이의 말은 마치 절규처럼 느껴졌다. 현장에서 한해인 배우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재이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이기적이라면, 여성들이 조금 더 이기적이기도 좋을 것 같다. 겁을 내지 않아도 좋다. 한해인 배우가 고민을 많이 하더라. 어느 순간 판단하지 말지 말고, 글에 적혀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검은색 큐브가 소품으로 자주 사용된다. 재이가 이 소품을 자주 갖고 있는 이유가 있는가.
재이가 글을 쓸 때, 해소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떠나서는 재이가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대상이 필요했다. 내가 많이 하던 방식 중의 하나인데 성인들을 위한 불안감 해소 장난감이 있다. 근데 검은색이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꺼내진 불안 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건우의 공간은 밝고 화사하지만, 재이가 만지는 것은 검은색 큐브로 내면을 시각화하는 소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우는 고장 난 가로등을 위해 민원을 접수하지만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빛과 어둠을 매개로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
가로등 이미지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로등은 건우가 걸어오면서 갑자기 뚝 꺼진다. 시나리오에도 '어느 날 가로등이 꺼진 날, 나는 임신을 했다'라고 적혀있다. 마치 가로등이 팍 꺼진 것처럼 재이는 임신하는 우연하고 뜻밖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사 면에서는 4번 정도 가로등 골목이 나온다. 인물들이 나름대로 시간이 가면서 파국을 맞이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재이가 걸어갈 때, 가로등이 켜지는데 앞길이 밝아진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돌아보면 힘들고 어두웠지만, 혼자 걸어가는 길에는 불빛이 켜지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디에 있든 재이를 응원하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일관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중의적인 것 같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건우와 재이가 서로에게 '타이타닉'처럼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고 정미경 작가님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내용은 아예 다르지만,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위로와 영감을 준 것 같다. 이 제목이 나한테는 약간 하늘에서 준 선물 같은 제목이다. 관객들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보고 어떤 것을 느끼면 좋겠나.
아마 20대 후반에서 40대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와닿지 않을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마무리해야 했던 것 같다. 여성 예술가와 창작자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전달되면 좋겠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면서 걸어가는 것을 지지하고픈 마음이 크다. 또 하나는 '우리'라는 가치와 '나로서 사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로 살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혹시 개봉 시기가 정해졌는지.
11월 안에 개봉이 확정됐다. 그때 관객들을 만날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이 있는가. 혹은 최근에는 어떤 소재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지.
차기작 계획은 일단 멈췄다. 관심 갖는 소재라고 하면,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인간 유지영은 왜 취약한가를 그동안 창작으로 풀어온 것 같다. 어쩌면 변태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 이제는 어떤 소재가 됐든 나와는 연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정짓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같이 공감하면서 관객과 함께 극장을 나서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 '수성못'도 극사실주의로 제작을 했던 것 같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감독 유지영은 날카로운 시선과 동시에 침착하게 동시대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2018년 '수성못'을 통해 청춘들의 지난한 현실을 담아냈다면, 이번에는 경계선상에 놓인 여성을 통해 '우리'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영화는 주목받는 젊은 여성작가 '재이'가 신작 출간을 앞두고 연인이자 동거인 '건우'와의 사이에서 예정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균열이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장편경쟁 섹션 '발견'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프록시마 경쟁(Proxima Competition)' 부문 대상인 '프록시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당시 소감은 어땠나.
해외 영화제 초청이 처음이었다. 체코라는 먼 나라에서 한해인 배우랑 여성 촬영감독이 함께 갔었는데, 영화제 기간 너무 즐거웠다. 관객들이 상영관도 다 메워주셨다. 수상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랑프리 상의 존재 여부도 몰랐다. 프록시마 부문도 이미 발표된 상황이라서 상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얼떨떨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배우랑 몇 초 정도 정지했던 것 같다. 너무 놀란 기억이었다.
현장에서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다들 서서 보는 인원들이 있었다. 뒤풀이 파티를 하러 갔을 때, 수상 소감에 대해서 인상 깊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수상 소감 분위기도 좋았다. 한국 영화가 유일했던 것 같다. 너무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 이 순간들을 못 잊을 것 같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발견 섹션'에 선정되셨다. 26일에 GV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난 소감은?
GV 당시, 마지막 상영이라서 관객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질문을 많이 주셨다. 여성 영화제 관객들이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느낀다. 다른 영화제들은 관객분들이 질문을 많이 안 주셔서 모더레이터가 질문을 많이 해주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많이 주셔서 시간이 짧다고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한해인 배우에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묻더라. 내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나올법한 질문이었는데 처음 받아서 기억에 남는 것 같다. 2018년 '수성못'에서는 치열한 인생을 살아가는 짠내나는 청춘을 그렸다면, 이번 '피투성이 연인'에서는 엄마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재이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의 경력 단절과 관련된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가.
창작자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영화감독으로 하는 것은 객관화가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근접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 있는 한 두 달 말고는 카페에서 글을 쓴다. 평소에도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경력단절에 대한 여성의 이야기는 사실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창작자의 경력단절을 기사에서 본 적이 많던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재이 역의 한해인 배우 캐스팅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한해인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너와 극장에서'라는 단편을 찍었을 때였다. 다른 감독님이 찍으신 또 다른 에피소드에 나오셨을 때, 처음 봤다. '어떻게 저런 배우가 있지'라는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 처음 강렬했던 인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리하고 예민한 느낌이 있더라. 어떤 신체적인 것이나 목소리도 있지만 풍기는 아우라 자체가 강한 느낌이었다. 대화하면서도 많이 느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그렸던 부분이 한해인 배우한테서 충족되더라. 날이 서고 따듯한 부분과 쉽게 선택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캐릭터 재이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사는 직장인 건우와 소설을 쓰는 작가 재이의 직업이 정반대로 설정되면서, 두 사람이 미래를 보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 같다.
'꿈과 현실, 나와 우리가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두 개의 상징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찢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파국을 달리면서 민낯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재이가 아이를 갖게 되면서 각자 추구하는 것을 더욱더 강하게 욕망하는 거다. 건우는 건우대로 책임감이 늘어난다. 재이가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라면, 건우는 현실을 쫓는 사람이다. 물론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는 것을 서로 몰랐을 수도 있다. 임신이라는 계기로 욕망의 밑부분을 서로 알게 되고 자신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재이는 처음부터 건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글을 쓰지 않나. 두 사람의 관계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설정한 까닭이 무엇인지.
건우는 재이가 잘나가는 소설가이고 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열등감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양쪽 모두에서 그러면 좋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그런 것 같다. 재이를 서포트해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가로등 같은 경우도 그렇다. 재이는 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해줘도 몰랐을 것을 묵묵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받기만 하는 것보다는 각자 너무 다른 사람이다. 아마 건우는 '우리'라는 생각으로 재이를 챙기는 것이 희생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건우는 영어학원 강사로 학원의 원장이 제안한 분점을 오가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손보면서 인테리어까지 한다. 마치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면서 아기방을 꾸미는 모습처럼 느껴지더라.
이런 질문 처음 받아본다. (웃음) 스태프들도 안 물어봤던 거다. 놀랐다. 건우가 학원 원장에게 제안받아 초등학교 전담으로 분점을 가지 않나. 건우는 그 안에서 인테리어를 도맡는다. 자신의 아이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란 방은 실제로 영화 속에서 건우와 재이의 집에는 보이지 않는 아기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건우가 직접 고른다. 관객들이 모르더라도 '건우는 진심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건우 역의 이한주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대구 단편영화제에서 만났다. 이한주 배우와 함께 영화제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게 됐다. '파테르'라는 작품을 너무 좋게 봤었다.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이 있지만, 배우로서 이한주라는 사람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끌리는 것 같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에 관해 두 시간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작업에 들어갔던 것 같다.
차기작 'Bitrh'를 쓰는 재이는 임신하기 싫은 여자의 이야기를 책 안에 담아낸다. 편집장으로부터 주인공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라는 재이의 말은 마치 절규처럼 느껴졌다. 현장에서 한해인 배우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재이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이기적이라면, 여성들이 조금 더 이기적이기도 좋을 것 같다. 겁을 내지 않아도 좋다. 한해인 배우가 고민을 많이 하더라. 어느 순간 판단하지 말지 말고, 글에 적혀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검은색 큐브가 소품으로 자주 사용된다. 재이가 이 소품을 자주 갖고 있는 이유가 있는가.
재이가 글을 쓸 때, 해소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떠나서는 재이가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대상이 필요했다. 내가 많이 하던 방식 중의 하나인데 성인들을 위한 불안감 해소 장난감이 있다. 근데 검은색이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꺼내진 불안 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건우의 공간은 밝고 화사하지만, 재이가 만지는 것은 검은색 큐브로 내면을 시각화하는 소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우는 고장 난 가로등을 위해 민원을 접수하지만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빛과 어둠을 매개로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
가로등 이미지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로등은 건우가 걸어오면서 갑자기 뚝 꺼진다. 시나리오에도 '어느 날 가로등이 꺼진 날, 나는 임신을 했다'라고 적혀있다. 마치 가로등이 팍 꺼진 것처럼 재이는 임신하는 우연하고 뜻밖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사 면에서는 4번 정도 가로등 골목이 나온다. 인물들이 나름대로 시간이 가면서 파국을 맞이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재이가 걸어갈 때, 가로등이 켜지는데 앞길이 밝아진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돌아보면 힘들고 어두웠지만, 혼자 걸어가는 길에는 불빛이 켜지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디에 있든 재이를 응원하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일관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중의적인 것 같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건우와 재이가 서로에게 '타이타닉'처럼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고 정미경 작가님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내용은 아예 다르지만,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위로와 영감을 준 것 같다. 이 제목이 나한테는 약간 하늘에서 준 선물 같은 제목이다. 관객들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보고 어떤 것을 느끼면 좋겠나.
아마 20대 후반에서 40대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와닿지 않을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마무리해야 했던 것 같다. 여성 예술가와 창작자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전달되면 좋겠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면서 걸어가는 것을 지지하고픈 마음이 크다. 또 하나는 '우리'라는 가치와 '나로서 사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로 살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혹시 개봉 시기가 정해졌는지.
11월 안에 개봉이 확정됐다. 그때 관객들을 만날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이 있는가. 혹은 최근에는 어떤 소재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지.
차기작 계획은 일단 멈췄다. 관심 갖는 소재라고 하면,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인간 유지영은 왜 취약한가를 그동안 창작으로 풀어온 것 같다. 어쩌면 변태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 이제는 어떤 소재가 됐든 나와는 연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정짓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같이 공감하면서 관객과 함께 극장을 나서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 '수성못'도 극사실주의로 제작을 했던 것 같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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