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그날이 온다'입니다.
'그날이 온다'는 비폭력주의 혁명가 모세가 농장에서 쫓겨날 위기로 월세를 구하려다, 실적 꽝 FBI 요원 켄드라와 엮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 블랙 코미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유머스럽게 던지는 묵직하고 시의적절한 메시지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영화 '그날이 온다' 포스터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그날이 온다' 포스터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에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는 방법은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웃음을 끌어내는 코미디 영화는 그 종류만큼이나 정의도 다양한데 고대 그리스 희극의 정의를 수용하면 이른바 블랙코미디가 전형적인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다. '삶에서 빚어지는 모순을 그린다'는 고대의 뜻에 맞게 말이다. 사실 이는 어느 장르의 코미디든 잘 들어맞는 정의일 텐데 채플린 식의 슬랩스틱이나 고급스런 풍자를 담은 하이코미디나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소동극도 곧잘 삶의 비애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 '그날이 온다'(감독 크리스토퍼 모리스)는 겉보기엔 현란한 소동극 같지만 세상의 모순을 충분히 담고 있어 강력한 풍자 코미디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영화에 그려진 사정의 좀 들어보자. 마이애미에 사는 모세(마샨트 데이비스)는 곤경에 빠졌다. 스스로 농사꾼이라 부르지만 사실 농사가 그의 직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백인신사들(gentrificators)'로부터 흑인의 해방을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미국사회에 궁극적인 평화를 불러오기 위한 모세의 정책은 '비폭력'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당도해 나팔을 불면 어디선가 공룡들이 등장해 세상을 평정하리라! 하지만 대책 없는 그의 행보에 집세가 밀릴 대로 밀려 결국 사랑하는 가족이 거리에 나앉을 판이 되고 만다.

한편에서 모세와 그의 동료들, 곧 그의 가족을 포함해 뜻을 같이 하는 철없는 사람들의 조직인 '여섯 꼭지 별(Star of Six)'을 예의 주시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FBI의 켄드라 요원(안나 켄드릭)이다. 테러 진압 담당인 켄드라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까닭에 늘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심지어 거의 성공할 뻔했던 작전마저도 약삭빠른 남자 동료에게 간발의 차이로 공을 빼앗기고 만다. 그렇게 조직에서 문책만 받던 그녀에게 모세와 그 일행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테러집단으로 엮어 넣어 보란 듯 공을 세워야 한다. 켄드라는 우선 모세 일행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면서 테러를 부추길 위장 인물들을 접근시킨다. 영화가 웃기게 돌아가는 첫 단초는 그렇게 제공된다.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의 기본이 좌충우돌 소동극이라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예측불허의 상황이 연이어 터지고, 거기에 모세 일당과 켄드릭 요원과 모세의 아내 비너스(다니엘 브룩스)와 켄드릭의 상사인 앤디(데니스 오하라)의 엉뚱한 대사들이 덧붙여져 총체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혹시 B급 코미디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풍자'라는 측면에서 최근에 나왔던 어떤 영화보다 뛰어난 감각을 보여줬다.

영화에 그려진 미국사회는 보여주기 문화에 익숙해있다. 그래서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사건들에서도 무엇인가 극적인 면을 찾아내 부각시킨다. 일종의 속임수라 하겠다. FBI가 연출하는 자작극이나, 앞뒤 안 재고 벌어지는 모세 일행의 과장 섞인 행동도 모두 보여주기 식 문화에 속한다. 사회에서 주목 받고 윗사람에 잘 보이려면 없는 일이라도 꾸며내야 할 판이다. 그래야 미국에서는 먹힌다.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모든 사태 뒤에 정치적 맥락이 숨어 있다는 암시도 훌륭하다. '그날이 온다'를 보면 이 세상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야기 전개의 시작점으로 작용하는 모세의 SNS 영상이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여섯 꼭지 별'의 대처방식이나, 이를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는 켄드릭과 FBI 지도부와 경찰 고위층과 담당검사의 욕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치색 농후한 거래에 불과하다. 그렇게라도 성공을 거두면 그만이지 윤리적 기준 따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저들은 테러까지 상품화 시키지 않는가. 모세의 아내 비너스(다니엘 브룩스)의 올곧은 결정이 유난히 눈에 띄는 대목이다.

영화 시작에 '이 영화는 100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사실 설명이 아니라 은유다. 그만큼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일 게다. 그리고 감독은 할리우드의 특기인 행복한 결말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기조는 코미디이지만 결코 가볍게 넘겨선 안 될 진실이 숨어있다는 메시지다. 만일 이런 조작극이 미국에서 비일비재하다면 유색인종인 경우 살얼음판 같은 삶에 부대낄 것이다. 크리스토퍼 모리스 감독은 본디 영국에서 풍자 코미디로 명성을 쌓은 인물인데 미국 진출 첫 작품이 '그날이 온다'고 사태를 비트는 날카로운 감각이 돋보인다.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그날이 온다' 스틸 / 사진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9.11 사건 이후 전 세계는 테러의 공포를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국가끼리 전면전보다 테러전이 세계의 위기상황을 선도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날이 온다'는 코로나로 잠시 잊고 있었던 슬픈 현실을 일깨워준 영화다. 안나 케드릭은 브로드웨이의 아역 뮤지컬 배우였는데 영화계에서 승승장구해 이제는 누가 뭐래도 손색없는 중견배우의 반열에 올라섰다. 요즘에는 특히 코미디 연기에 집중하는 모습인데 언제나 위트 넘치는 인물을 잘 소화해낸다. 켄드릭에게는 좋은 징조다.

세계는 불안정하고 우리 모두 평화를 바라지만 그 날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즐겁게 감상하고 평화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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