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극장가는 어느 때 보다 알찬 라인업을 갖추었다. 대장정을 시작하거나, 스타들의 내한으로 홍보에 열을 올리거나, 화려한 규모와 눈부신 기술로 무장한 영화들이 줄줄이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목청 높이지 않는 작은 영화들 사이에도 보석은 숨어 있고, 감동의 크기는 규모와 상관없이 기억되는 법이다. 올 겨울,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10편의 작지만 빛나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걷다가 지칠 때, 언 몸이 녹는 동안 마음을 뜨겁게 달궈 줄 10개의 쉼터가 될 것이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12월 13일 개봉)
다른 생명체의 온기가 그리운 독거인(人) 당신

얘기는 이렇다: 취미는 고양이를 상대로 말하기, 직업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외로운 사람들에게 고양이 빌려주기. 늘 결혼을 꿈꾸지만, 남자는커녕 친구도 없는 사요코(이치카와 미카코) 주위엔 온통 고양이뿐이다. 이 와중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옆집 아줌마는 괴상한 이야기로 사요코를 약 올리고, 아이들은 “고양이녀다!”라 외치며 달아나기 일쑤. 그래도 씩씩한 사요코와 무심하게 그 곁을 지키는 고양이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늦여름의 햇볕처럼 나른하고 따뜻해 한파도 잊게 한다.
예습 포인트: <요시노 이발관>부터 <카모메 식당>, <토일렛>에 이르기까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작품에는 클라이맥스가 없다.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을 지켜보다 보면 졸음이 밀려올 수도 있겠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참자. 고양이들의 치명적인 귀여움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아무르> (12월 19일 개봉)
사랑의 내공이 궁금한 당신

얘기는 이렇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노부부 조르주(장-루이 트린티냥)와 안느(엠마누엘 리바)의 삶은 갑자기 찾아온 안느의 병으로 순식간에 달라진다. 병원엔 보내지 말라는 안느의 부탁 때문에 조르주는 집에서 그녀를 간호하지만 점점 악화되는 안느를 지켜주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예습 포인트: 노부부를 끊임없이 응시하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관객도 조르주와 안느를 그저 지켜보길 바란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잃어가는 말을 붙잡기 위해 노래 연습을 하는 두 사람과 이들을 연기한 장-루이 트린티냥, 엠마누엘 리바까지 사랑은 철저히 이들의 것이며 아무도 이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사랑을 어렴풋이 느낄 뿐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순 없다. 하지만 그 느낌이야말로 어디서도 찾기 힘든 사랑의 답안이기에 <아무르>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프레셔스> (2013년 1월 10일 개봉)
험한 세상 속에서 희망을 붙들고 “마이 프레셔스”하는 당신

얘기는 이렇다: 할렘에서도 불행하기로는 따라올 자 없는 프레셔스(가보리 시디베)는 급기야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가정 안팎에서 학대와 폭력에 시달려 온 그녀의 유일한 낙, 잘생긴 수학선생님을 바라보는 것마저도 이제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안학교에서 프레셔스는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희망을 읽고 미래를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때, 영화는 실화가 주는 안일하지 않은 감동을 피워낸다.
예습 포인트: 평소 학대받는 여성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 온 오프라 윈프리가 제작에 참여했다. 그 덕분인지 수수한 차림으로 좀처럼 웃지 않는 머라이어 캐리, 다정한 모습이 귀엽기까지 한 레니 크라비츠를 만날 수 있다. 낯익은 사람이 보인다면, 정답이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더 헌트> (2013년 1월 중 개봉)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믿는 당신

얘기는 이렇다: 유치원의 청일점 교사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이혼한 아내와의 양육권 싸움을 빼면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들은 자신의 편이며, 오래된 친구들은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하지만 불행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그의 삶에 침범하고, 원인을 모른 채 파렴치한 범죄자의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사냥 당하는 짐승처럼 반격할 기회도 없이 벼랑으로 끝없이 내몰린다.
예습 포인트: <더 헌트>로 2012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매즈 미켈슨은 뛰어난 연기력 뿐 아니라 비탄에 빠진 중년남의 섹시함으로도 주목할 배우다. 오드아이 악당 르 치프레로 출연한 <007 카지노 로얄>부터 개봉을 앞둔 <로얄 어페어>까지, 매력의 광맥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브로큰> (미정)
아침마다 사건사고 뉴스를 대하기가 두려운 당신

얘기는 이렇다: 런던이라고 다를 것 없다. 제 자식만 소중해서 온 동네에 분란을 일으키는 포악한 남자, 늙고 지친 나머지 제 자식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부부, 그런 엉망진창인 골목에서도 천부적인 명랑함을 잃지 않고 자라는 소녀의 기묘한 조화는 마치 서울의 어느 모퉁이에서도 벌어지는 일 같다. 그래서 남의 고민 들어주느라 정작 자신의 가정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변호사 아치의 고민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라주는 아이들에 고마운 것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예습 포인트: 팀 로스, 킬리언 머피 등 매력적인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브로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영화로 데뷔를 맞은 소녀, 엘로이즈 로렌스다. 대체 어디서 나타났나 궁금하다면 이웃 버클리 부인을 놓치지 말자. 이 역을 연기한 클레어 버트와 영국배우 래리 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니까 말이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미정)
사랑도 배우고 익히면 못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

얘기는 이렇다: 지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진취적인 남자건만, 마크에게는 평생 여자 친구가 하나 없다. 인공 폐를 움직여줄 보조기가 없으면 겨우 두어시간 버틸 수 있는 전신 마비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장애인의 성과 관련한 르포를 작성할 기회가 생기고, 마크는 전문 치료사 셰릴과 6번의 세션을 가지며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미국의 시인 마크 오브라이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사랑할 기회의 공평함과 자유를 박탈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용기를 전한다.
예습 포인트: 셰릴을 연기한 헬렌 헌트는 출연분의 상당부분을 누드로 소화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누구도 감히 볼이 붉어질 수 없다. 마크 역의 존 혹스 역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 모두 2013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앤젤스 셰어> (미정)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진 청춘들 혹은 그들을 선도의 대상으로만 보는 어른들

얘기는 이렇다: 좀도둑, 폭행, 풍기문란, 알코올 중독, 우울증. <앤젤스 셰어>의 주인공들이 앓고 있거나 저지른 악행들이다. 로비(폴 프래니건)와 함께 사회봉사 활동을 선고받은 악동들은 우연한 기회에 위스키에 눈을 뜨게 되고, 처음으로 힘을 모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예습 포인트: 켄 로치 감독의 영화도 유쾌하게 볼 수 있다. <앤젤스 셰어>에는 그의 인장 같았던 영국의 우울한 밑바닥과 끝내 눈 돌리고 싶어지는 절망 대신 따뜻한 해피엔딩이 있다. 영화 <베니&준>의 엔딩곡으로 크게 히트했던 The Proclaimers의 ‘I`m Gonna Be’가 여기서도 엔딩곡으로 쓰여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참고로 위스키는 증류 중에 2% 정도가 사라지는데 이것을 ‘천사의 몫, 앤젤스 셰어’라고 일컫는다.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테이크 쉘터> (미정)
올해도 어김없이 홀로 맞는 연말, 세상 따위 망해버려라 싶은 당신

얘기는 이렇다: 하늘에선 갑자기 심상치 않은 색깔의 비가 내리고, 계속되는 악몽 속에서는 기르던 개에게 물리고 이웃과 친구에게 공격을 당한다. 환각과 환청이 안긴 공포는 평범하지만 그래서 행복했던 가정을 서서히 좀먹어 간다. 이 꿈은 예지몽인가, 아니면 오랜 트라우마로 남은 어머니의 정신병력이 결국 나에게 유전된 것인가. 커티스(마이클 섀넌)는 아내(제시카 차스테인)와 딸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의 발밑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평범한 가장이 일상을 침범한 막연한 불안과 벌이는 처절한 사투를 그린 이 영화는 온 몸의 피가 서서히 싸늘하게 식는 아찔한 경험을 선사한다.
예습 포인트: 중산층 가장의 신경증적 불안이 종말에의 예지몽과 공포로 은유되는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가 연출한 <멜랑콜리아>에서 판타지를 냉정하게 거세한 버전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2011년 < LA위클리 >가 뽑은 최고의 영화 10편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두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해피 이벤트> (미정)
모성애는 거저 생기는 줄 아는 한국남자들



얘기는 이렇다: 어느 날, 니콜라(피오 마르마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 아이를 낳아줘.” 사랑에 빠져있던 바바라(루이즈 보르고앙)는 기쁘게 청을 들어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은 어깨가 축 처진 가장으로, 촉망받던 철학도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바바라는 임신 기간 내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축복과 “내 안에 외계인이 사는 것 같은 불안” 사이에서 우울해하는데, 그 우울은 아이를 낳고 나서도 가시지 않는다. 결국 바바라는 “우리는 엄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친 뒤에야 비로소 아이와 ‘엄마되기’에서 자유로워진다.



예습 포인트: 바바라를 연기한 배우 루이즈 보르고앙은 프랑스 내에서 환상적인 몸매를 가진 미녀 배우로 통하는데 <해피 이벤트>에서는 실제로 임신한 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살을 찌웠다. 거기다 촬영 기간 동안 만삭의 복부 분장을 입은 상태로 연기를 해야 했으니 제대로 산전체험을 한 셈.

한파를 이기는 열 편의 작은 영화들


<홀리 모터스> (미정)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당신

얘기는 이렇다: 리무진을 타고 출근하는 남자는 예쁜 가정과 성공한 직업을 가진 듯 보인다. 하지만 결재 서류를 받아든 그는 자동차 안에서 분장을 시작하고, 하루 종일 남자는 미션을 수행하듯 9개의 다른 인생을 직접 살아낸다. 이야기를 따라가자면 혼란스럽지만 9개의 강렬한 단편을 보는 기분이라면 흥겹고, 리무진을 타고 레오 까락스의 꿈속을 관광하는 기분이라면 경이롭다. 무엇보다도 마술처럼 펼쳐지는 드니 라방의 연기 엑스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은 절로 나온다.



예습 포인트: 남자가 수행하는 인생 중 하나는 하수구에서 불쑥 튀어나와 도심을 어지럽히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광인이다. 봉준호와 미셸 공드리, 그리고 레오 까락스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도쿄!>를 본 관객이라면 반갑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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