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연인의 집안과 원수지간이거나 불치병이 끼어든 시한부 사랑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의 연애는 충분히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도, 그 사람 곁에 누군가 없어서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시기가 늘 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만나기 좋은 때에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일 지도 모른다. 때론 그것이 너무 흔해 기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를 알고 내리는 비’처럼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이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법칙을 허진호 감독이라면 어떻게 보여줄까? 10월 8일 개봉하는 영화 <호우시절>이 9월 22일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시인이 꿈이었지만 월급이라는 마취제에 취해 어느새 건설회사 팀장이 되어버린 동하(정우성). 그리고 그의 중국 출장길에서 다시 만난 유학시절의 여자친구 메이(고원원). 둘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도 있고, 얼굴에 꿈 대신 생활인의 고단함을 새긴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혹은 그때보다 더한 설렘을 나눈다. 과거 얘기로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술 한 잔에 진심을 내비치기도 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진다.

사랑이 이렇게 오네요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정우성과 고원원 외에도 <호우시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배경이 되는 청두다. <호우시절>은 사천의 4대 명물이라는 팬더, 미녀, 술, 음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대지진의 비극으로만 알려졌던 청두라는 도시를 꿈꾸게 만드는 성공적인 관광영화이기도 하다. 또 정우성, 고원원과 ‘귀여운 사랑의 훼방꾼’ 김상호 등 영화에 임한 배우들 모두 그 이상의 캐스팅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청두에 녹아들었다. 극 초반에는 생활인의 일상성을 연기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느껴졌던 정우성도 시간이 흐를수록 30대 직장인 동하의 모습 그대로다. 구부정하게 앉아 출장 영수증을 계산하거나 홀로 호텔방에서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에선 더 이상 청춘의 아이콘을 떠올리기 힘들다.

허진호 감독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 말했듯이 <호우시절>은 그의 전작들과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적인 마무리 때문만은 아니다. 연애의 아름다운 순간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듯, 떠올리기 싫어 생략하고 싶은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다 보여주던 허진호의 씁쓸함이 <호우시절>에선 조금 달짝지근해졌다. 두 사람의 지난한 전사나 상처가 몇 마디 말로 정리되는 대신 두 남녀의 빛나는 순간들이 들어섰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는 쉽게 단언하긴 어렵다. 분명 <호우시절>을 다 보고 난 뒤에는 그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더 강하게 연애 혹은 사랑을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함없이 사랑이라는 실체 없음에 현미경을 들이대온 허진호의 영화는 <호우시절>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미세한 변화는 그의 다음 이야기를 더 기다리게 만든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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