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매주 1회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명으로 영화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최근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주]
영화 ‘지랄발광 17세’ 포스터
영화 ‘지랄발광 17세’ 포스터
제목이 살짝 민망하지만 ‘지랄발광 17세’는 사랑스러운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면 ‘끝 혹은 모서리(edge)’라는 원제를 ‘지랄발광’으로 번역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때론 바닥을 쳐야 민낯이 보이고 그때 비로소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지랄발광 17세’는 청소년 성장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진폭을 가진 영화다. 한 소녀의 성장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삶의 굴곡을 통찰하게 만드는 파급력을 갖추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주인공이 딱 알맞게 지랄발광 했기 때문이다. 지랄발광이 그저 귀여운 수준에 머물렀거나, 반대로 정말 큰 일탈과 범죄로 이어졌다면 지금의 색깔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7세 소녀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은 ‘쪽 팔려서’ 죽어 버려야겠다고 결심한다. 평소 짝사랑하던 남학생에게 충동적으로 문자를 보내자마자 후회막급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유혹을 힘들게 참았는데 엉뚱하게도 몹시 외설적인 문자를 얼결에 전송해 버린 것이다. 문자를 보낸 네이딘은 몹시 흥분된 상태로 역사 선생님(우디 해럴슨)을 찾아가서 자살하겠다는 고백을 한다. 하지만 괴팍한 역사 선생님은 놀라기는커녕 마침 자신도 유서를 쓰던 중이라며 네이딘을 김빠지게 만든다. ‘지랄발광 17세’는 이날 하루 네이딘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다. 바로 이날, 지난 몇 주간 아니 17년 인생을 통틀어 네이딘에게 가장 극적인 일들이 발생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는 네이딘이 자살을 언급한 순간에서 시간을 되돌려 그녀의 17년 인생을 되짚어 나간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던 네이딘은 주변 인물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삐딱한 태도로 살아가는 소녀다. 사랑하는 아빠를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잃은 네이딘은 답답한 엄마와 멍청한 오빠를 견디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은 모두 유치하고 한심해 보인다. 네이딘이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절친 크리스타뿐이다. 네이딘을 광풍 속으로 몰아간 발단은 크리스타와 자신이 경멸하는 오빠 대리언이 사랑에 빠지게 된 일대사건이다. ‘지랄발광 17세’는 주인공 네이딘의 일상을 따라가는 사이 자연스럽게 그녀 주변 인물들의 삶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게 된다. 쉴 새 없이 남자를 찾아다니지만 매번 환멸만 느끼는 엄마, 몸매만 신경 쓰는 우둔한 운동중독 오빠, 착하지만 애어른 같아 지루한 동양계 남자 동급생. 하지만 이것이 진실일까?

‘지랄발광 17세’가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분노와 편견이다. 자기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네이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부족해 보이고 세상사는 불만투성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 역사 선생님이 일찌감치 지적해 준 바와 같이 네이든의 문제는 왕따라는 점이다. 네이든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본인이 친구들을 상대해주지 않는 것으로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실상 네이딘은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남에게 독설을 퍼붓게 된다. 네이든이 웅크리고 있는 껍질은 그리 딱딱하지 않다. 네이든의 지랄발광은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싶은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17세는 조금만 상황이 좋아지면 빨리 변화할 수 있다. 네이든의 지랄발광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런 희망 때문이다.

가족도 취미도 없는 대머리 노총각, 현명하고 점잖지만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 이 말들은 네이든이 역사 선생님과 동양계 남학생에게 던진 독설이다. 영화 후반, 이 독설은 분노와 편견에 사로잡힌 네이든의 왜곡된 시선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질풍노도의 하루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간 네이든은 깊은 밤 땅에 발을 딛고 현실을 직면한다. 에피소드나 대사의 수위가 센 편이지만 근본적으로 ‘지랄발광 17세’는 청소년의 방황을 이해하고 변호하고 응원하는 영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아이들은 지랄발광하면서 자란다.

이현경(영화평론가)

영화 ‘지랄발광 17세’ 스틸컷
영화 ‘지랄발광 17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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