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acters in front of Sleeping Beauty Castle
Characters in front of Sleeping Beauty Castle


디즈니는 디즈니뿐 아니라 픽사·마블·루카스필름 등을 소유하고 있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왕국이다. 이들의 활동은 영화 제작과 배급에만 머물지 않는다. 리조트, 테마파크, 크루즈, TV 채널에 이르기까지 캐릭터를 활용해 다양한 사업이 치밀한 계획아래 이루어진다. 다음은 LA에서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상상을 살짝 얹어) 재구성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화자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를 연기하는 배우다.

드레스를 벗고, 화장을 지운다. 화장 아래로 드러나는 맨얼굴이 오히려 어색하다. 디즈니랜드에서 메리다 공주로 산 지도 벌써 1년. 이제는 내가 메리다인지, 메리다가 나인지 혼동이 될 지경이다. 나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다. 할리우드가 내 꿈의 무대였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내가 쉽게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도전했다, 떨어져서, 좌절하고. 또 도전했는데, 떨어져서, 눈물 흘리고. 방황의 날들이었다. 그때 함께 연기학원을 다니던 배우 A가 말했다. 디즈니랜드에서 메리다의 실사 배우를 찾는 오디션을 여는데 함께 도전해 보자고. 디즈니랜드의 코스튬플레이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캐릭터를 단순히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진짜 그 캐릭터가 돼야 함을 의미했다. 탈 인형을 쓴 아르바이트생이 돌아가면서 캐릭터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디즈니랜드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전문 직업인들이다. 오디션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하데, 그것이 나를 자극했다. 마침, 땅바닥으로 떨어진 자존심 회복이 필요할 시점이었다.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날 나는 오디션을 보기로 결심했고,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디즈니랜드의 메리다 공주가 됐다.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을 재현한 ‘메인 스트리트 USA’.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을 재현한 ‘메인 스트리트 USA’.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을 재현한 ‘메인 스트리트 USA’.

하지만 현장에 투입되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요구됐다. 디즈니랜드의 트레이닝은 예상보다 엄격했다. 메리다가 영화 속에서 했던 행동, 말투, 걸음걸이, 작은 손짓 하나 까지도 모조리 숙지해야 했다. 트레이닝에만 무려 1년이 소요됐다. 활 쏘는 폼이 대한민국 양궁선수 뺨칠 정도쯤 되자 드디어 디즈니랜드가 내게 문을 열었다. 지난 5월 나의, 아닌 정확하게 말하면 메리다 공주의 디즈니랜드 입성 즉위식이 열렸다. 말에 올라 탄 나는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뒤로 메리다의 엄마인 ‘엘리노어 왕비’, 아빠 ‘페르구스 왕’ 등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뒤따랐다. 여기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 비록 꿈꿨던 할리우드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의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사는 곳은 ‘메리다 성’이 있는 마을이다. 디즈니랜드에는 캐릭터들이 사는 동네가 따로 있다. 모두가 입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마치 좁은 서울 땅에서 아파트를 분양받는 거나 다름없다. 가령 백설공주가 입성한다는 건, 백설공주 뿐 아니라 공주가 사는 성, 난쟁이 마을, 일곱 난쟁이 등 동화 속 거대 세계가 디즈니랜드 안에 실제로 구현됨을 의미한다. 수용 가능한 장소는 제한적인데 반해, 수요는 넘치기 때문에 입주 조건이 꽤나 까다롭다. 나의 즉위식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이제 눈치 챘나?

디즈니 캐릭터들이 파견 출장을 다니는 이유

디즈니는 여러 프랜차이즈를 보유 중이다. 미키 프랜차이즈, 푸우 프랜차이즈,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 프린센스 프랜차이즈 등이 그것인데, 내가 들어간 곳은 당연히 프린세스 라인이다. 나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오로라, <미녀와 야수>의 벨, <알라딘>의 자스민, <인어공주> 아리엘, 뮬란, 포카혼타스, 라푼젤 등에 이어 디즈니랜드에 입성한 열한 번째 공주다. 픽사가 내놓은 공주로는 첫 번째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다. 다행히 선배 공주님(?)들의 텃세는 없었다. 간혹 자신이 진짜 공주인 줄 착각하는 ‘공주병’에 걸린 공주가 있기는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1년 365일을 공주로 사는데, 안 걸리고 배길 수 있나. 그나저나, ‘공주병 최강’이라는 뮬란 선배는 해외 출장 중인 관계로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무슨 출장이냐고? 디즈니에는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해당 랜드별로 딱 한명만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디즈니랜드 파리나 디즈니랜드 도쿄의 뮬랸이 휴가를 가거나 아프면, 다른 랜드의 뮬랸이 긴급 투입되기도 한다. 또한 입점해 있는 캐릭터가 랜드 별로 다른 관계로, 디즈니랜드 파리에 있는 캐릭터가 디즈니랜드 도쿄엔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도 캐릭터들은 종종 파견 출장을 간다. 잠깐! 그렇다면, 내게도 전 세계 투어의 기회가? 아직 메리다가 입성하지 않은 랜드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출장 다니는 공주라니, 재미있지 아니한가!

월트 디즈니의 캐릭터는 영화 밖에서도 살아 숨쉰다. 작품 속 캐릭터를 사업으로 연결시켜 수익 다변화를 꾀하는 디즈니.
월트 디즈니의 캐릭터는 영화 밖에서도 살아 숨쉰다. 작품 속 캐릭터를 사업으로 연결시켜 수익 다변화를 꾀하는 디즈니.
월트 디즈니의 캐릭터는 영화 밖에서도 살아 숨쉰다. 작품 속 캐릭터를 사업으로 연결시켜 수익 다변화를 꾀하는 디즈니.

이곳에 있으면서 디즈니의 사업수완에 놀랄 때가 많다. 디즈니 사업의 핵심은 어떤 새로운 콘텐츠가 나왔을 때, 그 콘텐츠를 맥시멈으로 활용한다는데 있다. 일명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 디즈니가 내놓는 작품들은 캐릭터 상품이나 놀이시설, 쇼 등으로 재탄생해 2차 수익을 위한 모델이 된다. 가령 <캐리비안의 해적>이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키자 디즈니는 디즈니랜드에 ‘캐리비안의 해적’을 본 딴 라이더를 만들었다. 오픈한지 한 달이 돼 가는 ‘미키와 마법지도(Mickey and Magical Map, 포카혼타스·뮬란·라푼젤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등장해 해당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뮤지컬)’ 뮤지컬도 그러한 산업의 일환이다. 반대로 디즈니랜드 내에 있는 놀이기구를 이용해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디즈니랜드의 인기 놀이기구 ‘헌티드 맨션’의 경우, 동명의 실사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의 지갑을 노린 바 있다.

영화의 인기와 캐릭터의 인기가 비례하는 건 아니다.

재미있는 건, 영화의 인기와 캐릭터의 인기가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디즈니가 <카>의 비행기 버전인 <플레인>(Planes)을 올해 12월 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심 놀랐다.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카>는 디즈니/픽사의 작품 중 평가나 흥행 면에서 최하점을 받은 작품 아닌가. 그런데 존 래스터(디즈니/픽사 크리에이티브 총괄 담당이자, 감독)는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플레인>까지 만드는 걸까. 이유는 캐릭터 산업에 있었다. ‘영화 매출 VS 캐릭터 매출’의 비중에서 영화가 벌어들인 수익보다 캐릭터 매출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 <카>란다. <카>를 모티브로 만든 테마공간 ‘카 랜드’가 문을 열자 테마파크의 매출이 껑충 뛰어오른 일화는, 디즈니 내부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영화에서 출발해 캐릭터가 나오는 일반적인 관례를 뒤집어, 캐릭터를 위해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게 디즈니의 노하우다. 5년 전 디즈니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블을 인수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단순히 영화만을 위해 거액을 투자한 게 아니었던 거다. 지금 어벤져스 티셔츠나, 아이언맨 가면에 환장하는 아이들을 보라. 이 모든 걸 굴리는 디즈니의 노하우는 보면 볼수록 놀랍다.

[LA를 가다](2) 디즈니랜드, 예쁜 나는 공주라 행복해! 
을 본 따 마든 테마파크 3. <토이스토리> 체험관(위에서부터)" />1.포카혼타스·뮬란·라푼젤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등장해 해당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뮤지컬 미키쇼. 2. <캐리비안의 해적>을 본 따 마든 테마파크 3. <토이스토리> 체험관(위에서부터)

꿀맛 같은 휴식이 끝나간다. 2시간 후에 있을 퍼레이드를 위해 다시 분장실로 발길을 옮긴다. 주말이라 그런지, 랜드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다. 메인스트리트 USA를 지나는데, 우는 여자 아이와 그런 아이를 달래는 엄마가 보인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엄마의 한마디는 놀랍게도 ‘메리다 공주’였다. “조금 있다가 메리다 공주 퍼레이드 보여줄게!” 메리다 공주 얘기에 아이는 눈물 뚝.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인다. 아이의 품엔 메리가 캐릭터 인형이 안겨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마음이 뭉클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나는 LA 디즈니랜드에서 사는, 메리다 공주다. 단 하나 뿐인.

글,사진,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제공. 디즈니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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