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고 위대했던’ 영화 속 간첩 리스트
, <이중간첩>, <은밀하게 위대하게>, <간첩> 포스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간첩 리철진>, <이중간첩>, <은밀하게 위대하게>, <간첩> 포스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간첩은 무엇으로 사는가

비밀리에 적대국의 내정·동정 등을 탐지하여 보고하는 자, 또는 자국의 비밀을 수집하여 적대국에 제공하는 자. 영어로는 스파이(spy). 높은 철책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대치중인 한반도에서 ‘간첩’은 실제로 존재하기도 했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 탓인지 간첩은 한국 영화에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간첩이라는 소재는 대개 스토리 전개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장치다.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간첩의 특성상 정체를 감추거나 파헤치는 과정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간첩이라도 영화마다 부각되는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간첩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영화 속 간첩도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은밀하고 위대했던’ 영화 속 간첩 리스트
김윤진,(왼쪽) <이중간첩> 한석규" /><쉬리> 김윤진,(왼쪽) <이중간첩> 한석규

사랑만 있으면 되지 않갔어?

한때, 간첩들의 임무 수행을 막은 건 남한에서 지내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생겨버린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개봉 당시 600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불러 모으며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쉬리>. 당시로서는 완성도 높았던 액션과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등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흥행을 이끌었다. 또 하나,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하게 한 건 남파 간첩 이방희 역을 맡은 김윤진의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북한 최고의 저격수 이방희는 신분을 감춘 채 남한의 비밀요원 유중원(한석규)에게 접근해 국가 기밀을 빼내지만, 그 과정에서 유중원을 사랑하게 된다. 영화 말미에 유중원과 이방희가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은 그 유명한 ‘수족관 키스신’과 대비되며 더 깊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영화 <이중간첩>의 임병호(한석규) 역시 사랑에 흔들렸고, 결국 비극을 맞았다. 이중간첩 임병호가 남파된 고정간첩 윤수미(고소영)와 사랑에 빠졌으니, 일종의 ‘사내 커플’이다. 임병호와 윤수미는 이념이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한반도를 떠나 브라질에 정착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역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간첩은 조국 외엔 누구도 사랑해선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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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오성(왼쪽), <간첩> 변희봉 김명민" /><간첩 리철진> 유오성(왼쪽), <간첩> 변희봉 김명민

돈 나고 간첩 났지 간첩 나고 돈 났습네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라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만연하는 ‘황금만능주의’에 팍팍해지는 인생, 간첩도 예외는 아니다. IMF 금융위기라는 큰 파도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간 1999년, 영화 <간첩 리철진>의 대남 공작부 요원 리철진(유오성)은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남한에 침투한다. 30년차 베테랑 간첩 ‘오 선생(박인환)’과 접선하기 위해 택시를 탄 리철진은 4인조 택시 강도단에게 가방을 털려 빈털터리가 된다. 돈 없는 간첩 리철진은 임무 수행은커녕 접선 상대도 만나지 못해 서울 거리를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베테랑 간첩 ‘오 선생’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청소년 상담소를 운영하는 그는 간첩 활동에 대한 구상보다 빚 갚을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의 간첩들은 어떨까. 영화 <간첩>에는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간첩들이 그려진다. 불법 비아그라를 판매하는 ‘김과장(김명민)’은 전세금이 오를까봐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가장이고 부동산 중개업자 ‘김대리(염정아)’는 애 키우랴 일하랴 바쁜 ‘워킹맘’이다. 소를 키우며 FTA에 반대하는 ‘우대리’도 간첩이고, 매일 탑골 공원에서 시간을 때우는 독거노인 ‘윤고문’도 간첩이다. 하긴, 십년 넘게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일자리를 구하고 승진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당에서 지원금이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오겠나. 또한 직업이 없으면 정체를 들킬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그래서 간첩들에게도 대출상담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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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왼쪽),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수현" /><의형제> 강동원(왼쪽),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수현

동무는 얼굴 뜯어먹고 사시라요

청년실업 백만, 면접을 잘 보기 위해서라면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시대다. 인재를 뽑을 때 외모가 실력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기업 간부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일까. 간첩들의 외모가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영화 <의형제>에서 송강호는 국정원 요원 이한규를 연기했고, 강동원은 남파 간첩 송지원 역할을 맡았다. 핸섬한 이미지의 한석규와 거친 느낌의 최민식이 각각 국정원 요원과 북한 특수요원으로 캐스팅됐던 <쉬리>와 비교하면 역할이 뒤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간첩을 그리는 방식이 바뀌었다. <의형제>가 그리는 간첩은 거칠거나 조국의 이념에 매몰되기보다는 배신의 상처를 품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개인이다. 강동원의 미모는 송지원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더욱 빛나게 했다.

5일 개봉을 앞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도 ‘꽃미남 간첩’이 등장한다. 그것도 세 명이나.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 등 ‘만화 같은’ 배우들은 원작 웹툰과의 높은 싱크로율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이들은 각각 동네 바보, 기타리스트,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위장해 조국의 지시를 기다린다. 영화에서 간첩 역할을 맡은 세 명의 배우는 우월한 비주얼과 탄탄한 연기력으로 각자 맡은 역할을 나름대로 잘 소화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토리 전개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후반부 액션신은 늘어진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꽃미남 간첩’만으로는 부족했다. 간첩의 특수성을 살릴 수 있는 시나리오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연출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영화 속 간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설득력이다. 얼굴이 잘생겼든, 사랑에 목숨 걸든, 돈 하나만 쫓든 그 캐릭터의 행동이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간첩은 무엇으로 사는가.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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