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낭독의 발견, 10cm ‘아메리카노’
19금 낭독의 발견, 10cm ‘아메리카노’
청년들이 ‘싸구려 커피’(장기하)를 마시는 눅눅한 생활을 고백했을 때, 어른들은 충격과 걱정에 빠져드는 한편 그들의 삶을 뽀얀 국물로 바꿔 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청년은 예의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들은 ‘별 일없이 산다’는 선언으로 그들의 뒤통수를 쳤다. 담배꽁초가 떠다니는 시커멓고 누런 커피. 청년에게 그것은 등을 대고 누워 올려다 본 하늘, 흐르고 지나면 추억이 될 풍경일 뿐이었다. 그것이 청년들이 발 딛고 선 땅이라고 호들갑을 떤 것은 오히려 그 풍경을 만들어 낸 어른들이었다. ‘아메리카노’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 어두운 격랑이 이제는 풍경과 생활의 경계를 붕괴하며 휘몰아치는 시절, 바닥에 숨죽이고 납작 엎드려 살아남기만 해도 그것이 별 일인 시절에 ‘아메리카노’는 슬픈 태연함에 대한 상징이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더했을 뿐인 아메리카노는 사실 풍미와 취향의 고급스러움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인 음료다. “메뉴판이 복잡해서 못 고를 때” 선택할 수 있는 이것은 에스프레소의 맛을 희석시킨 대체물이자 다른 옵션을 더할 여유가 없을 때의 차선책이다. 하지만 화자는 아메리카노에 대해 “좋아 좋아 좋아”라고 말한다. 위악인 셈이다. “사글세 내고”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은 일상 속의 여유로 이해되지만, 거기에는 “돈 없을 때 밥 대신에” 마셔야 하는 기회비용이 뒤따른다. 먹는 음식이라고 해도 “짜장면”이나 “순대국”과 같은 음식일 뿐이다. 상황을 열거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아메리카노를 굳이 마셔야 할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없다. 끼니로 대변되는 일상은 아슬아슬하고, 아메리카노는 그 위태로움을 희석시키며 화자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아메리카노로 그린 청춘의 크로키
19금 낭독의 발견, 10cm ‘아메리카노’
19금 낭독의 발견, 10cm ‘아메리카노’
그래서 아메리카노는 화자에게 사치인 동시에 끝내 지켜야 할 의례다. 궁핍하고 구질구질한 인생은 “마라톤 하고 감질나게” 뜨거운 커피로나마 목을 축이는 형국이지만 그 얼룩덜룩함에 잠식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쁜 여자와” 만나서 차를 한잔 마시기도 하고, 그녀와 “싸우고서 바람”을 피기도 하고, “다른 여자와 입 맞추”는 일은 일련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누구나에게 벌어지는 청춘의 크로키다. 순정과 위선과 쾌락. 가난과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그 감정들이 역시 자신에게도 존재함을 화자는 과시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 그래서 취하지 않은 채로 이 삶이 “좋아 좋아 좋아”라고 능청을 떨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그 삶은 쓰다. 여자를 만날 때마다 “담배”를 피는 것은 달리 그가 할 말도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짜장면과 순대국을 먹고 사글세를 간신히 내고 나면 복잡한 메뉴판에서 가장 싼 음료를 찾아야 하는 인생에서 여자에게 들려 줄 꿈이나 희망은 서로에게 서글프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는 “시럽”과 “설탕”을 “빼고 주세요”라고 미리 주문한다. 맛본 적 없는 그 달콤함을 먼저 거절하고서 쓴 커피 한 모금에 대해 진하고 깊은 맛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나. 아주 오랫동안 맛볼 수 있는 것은 이 쓴 맛뿐이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디더라도 조금 묽게 그것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나마의 허세와 최면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도무지 청춘을 청춘답게 살아 낼 수 없는 시절인데.

10cm ‘아메리카노’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아메리카노 진해 진해 진해
어떻게 하노 시럽 시럽 시럽
빼고 주세요 빼고 주세요

이쁜 여자와 담배피고 차 마실 때
메뉴판이 복잡해서 못 고를 때
사글세 내고 돈 없을 때 밥 대신에
짜장면 먹고 후식으로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아메리카노 깊어 깊어 깊어
어떻게 하노 설탕 설탕 설탕
빼고 주세요 빼고 주세요

여자 친구와 싸우고서 바람 필 때
다른 여자와 입 맞추고 담배 필 때
마라톤하고 감질나게 목 축일 때
순대국 먹고 후식으로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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