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방바닥을 긁던 찌질한 청춘은 어느 순간 ‘별 일 없이 산다’고 말할 정도로 안정을 누렸고, 이제는 웬 여자에게 너랑 나랑은 ‘그렇고 그런 사이’임을 공표할 만큼 인기도 누린다. 자신의 노래 속 화자의 변화만큼이나 얼마 전 2집 앨범 을 낸 장기하의 위상 역시 EP 를 갓 발매했던 시절과는 전혀 달라졌다. 인디계의 핫한 신인은 이제 김동률, 이효리, 엄정화 등 메인스트림의 거물들이 팬임을 자처하는 또 하나의 거물이 됐다. 하지만 이번 2집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음악이다. 밴드의 풀네임을 전면에 내세운 이 셀프타이틀 앨범은 이름 그대로 다분히 밴드 지향적인 음악들로 채워졌다. 과연 어떤 계기가, 어떤 과정이 이러한 변화로 이어졌던 것일까. 와 지산밸리록 페스티벌이 함께 하는 릴레이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는 이제 멤버 전체의 존재감이 드러난 장기하와 얼굴들이다. 학교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이민기(기타)를 제외한 멤버들이 함께 했다.안경을 벗었다. 혹 라식 수술이라도 받은 건가.
장기하 : 아니, 렌즈를 꼈다.
“전작과 비슷한 걸 하고 싶지 않다” 혹 비주얼적인 변화를 꾀한 건가. 아니면 안경이 귀찮았나.
장기하 : 귀찮은 걸로 따지면 지금이 훨씬 귀찮지. 렌즈가 훨씬 귀찮으니까. 그냥 이게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멤버들과 회사에서는 동의를 안 하고 있다. 이렇게 바꾼 게,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 내 얼굴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사석에서 만난 사람 중 100에 98은 ‘생각보다 어리시네요’라고 한다. 내가 얼마나 늙어 보였으면. 동안으로는 보일 필요는 없지만 제 나이로는 보여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수염 깎고 안경을 벗으면 그래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까. (웃음)
2집 활동과 맞물려 계획한 변화인가.
장기하 : 이왕 할 바에는, 뭐. (웃음) 2집 내기 전에는 내가 안경을 벗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런 걸 물어보는 게, 2집이 1집과 확연히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훨씬 록킹한 느낌?
김현호 : 밴드의 합이 맞는 음악, 록킹한 음악, 그런 걸 1집 때보다 2집 준비하며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장기하 : 멤버끼리 취향이 겹치는 부분들이 많고. 평균적으로 70년대 정도? 영미권 록을 다들 좋아해서. 다들 좋아하지? (웃음)
이종민 : 다들 영미권 70년대 록을 좋아하지. 백제록을 좋아하진 않을 거 아니야. (웃음)
그래도 최근 유독 많이 들은 장르나 밴드가 있지 않겠나.
정중엽 : (장)기하 같은 경우에는 하세가와 요헤이 형이 들려주는 정말 대중적이지 않은 옛날 사이키델릭이나 정말 마니악한 것들을 들었다.
장기하 : 하세가와 요헤이 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형이랑 꼭 프로듀싱을 같이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게 ‘이런 거 들으면 좋아할 거야’라며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옛날 영국, 일본 밴드를 들려줬다. 영국의 스팍스, 아무도 모른다. 또 누구냐, 맨프레드맨, 일본의 히카슈, 이러면 뭐 우주에서 온… (웃음) 그런데 소개해주는 족족 들을 때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정중엽 : 반대로 말하면 정상적인 취향은 아닌 거지. 이게 뭐랄까, 하는 입장에서는 재밌을 수 있는데 그 중 들었을 때… (웃음) 설명하긴 되게 어렵다.
장기하 : 이래도 되나, 하는. (웃음) 이런 게 환기를 시켜준 것 같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음악이 있구나, 나도 이 사람들처럼 개성적인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1집과 달라진 지점이 그런 취향적 변화인지, 1집과는 다르게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나고 싶다거나.
장기하 :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나고 싶다는 거 이전에 송라이터로서 전작과 비슷한 걸 하고 싶지 않다. 1집 곡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싸구려 커피’ 만들고서는 이런 거 말고 ‘달이 차오른다, 가자’ 같은 거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고. 음반 단위로 생각을 할 때도, 이번에는 1집이랑 비슷한 걸 하기 싫다는 생각이었다. 남의 반응보다도 창작자 입장에서 재미가 없으니까.
“매일 만나 합주를 하는 게 되게 재미있었다” 1집과 2집 사이에 일본 도쿄 공연도 있었는데.
장기하 : 그 때 굉장히 많이 들은 얘기가, 너희는 가사가 중요한 밴드인데 다른 나라에서 공연하는 게 괜찮겠느냐는 거였다. 그런데 공연을 해보니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충분히 흥미로워하더라. 그걸 보고 우리가 그저 담론적으로 이슈가 된 밴드가 아니라 록 사운드로 개성 있게 갈 수 있는 밴드라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럼 이번 작업은 재미있었나.
장기하 : 굉장히 재미있었다. 1집에선 편곡까지 나 혼자 다 했던 반면에 2집에서는 공동 작업으로 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만든 곡을 재료로 삼아 합주실에 들어가 매일 만나 합주를 하면서. 그 과정이 되게 재미있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고. 이게 제일 좋은 거 같다면서 고르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다들 재밌게 했다.
김현호 : 그 때를 생각해보면 3~4개월 정도,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계속 한나절, 반나절씩 써가며 그렇게 했다. 그러다보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게 되게 재밌었다.
이번 곡들은 진짜 장기하와 얼굴들의 합집합이라고 보면 될까.
장기하 : 그렇지. 그냥 얼개만 있는 상태에서, 어떨 땐 아예 악기 하나가 빠진 상태로 데모를 가져와서 여기에 살을 입히는 경험을 한 거지.
김현호 : (장)기하 형이 가져온 것에서 조금 바꾼 것도 있고, 아예 없던 부분이 생긴 것도 있다. 합주를 하다가.
다른 멤버들의 입김이 가장 많이 들어간 곡은 뭔가. 데모와 완성본 사이의 간극이 가장 큰.
장기하 : ‘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가 아무래도… 단적으로 데모는 4분 남짓했는데 결과는 8분이 넘는 곡이 나왔으니까. 중간의 솔로나 이런 거는 데모에 없었지.
정중엽 : 곡이 굉장히 호방해졌지. 데모의 경우 직접 연주한 게 아니라 들어보면 박력 같은 게 없지 않나. 그런데 합주를 하다보니까. 이 리프가 굉장히 헤비한 톤에 어울린다는 걸 깨달으면서 점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웃음)
다른 멤버들에게 프로듀서로서의 장기하는 어떤가. 많이 열어두는 타입인가.
정중엽 : 그 때 그 때 다 다를 텐데, 기하는 특히 곡의 완성도나 결과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편이다. 만약 어떤 것을 바꾸자고 했을 때 그게 곡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장기하 : 멤버들에게 얼마나 큰 자유가 주어지느냐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결과물이 얼마나 듣기 좋게 나오느냐, 그게 중요하지. 가령 어떤 곡의 데모에서 내가 베이스를 다 짜왔는데 베이스 주자가 새롭게 라인을 짠 게 더 나으면 그걸로 가면 된다. 그게 아니면 내가 만든 걸로 가면 되고.
정중엽 :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의 경우 너무 베이스라인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 줄이고 다르게 치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예 안 치고 그랬다. 그런데 이 노래는 진짜 베이스가…
장기하 : 베이스를 많이 치는 게 이 노래의 핵심이다, 이렇게 말을 해서. (웃음) 그와 달리 ‘그 때 그 노래’의 아르페지오는 (이)민기가 백퍼센트 만든 거다. 내가 계속 만들어라, 만들어라, 하는데 안 만들어오기에 내가 만들어서 ‘귀찮으면 이걸로 쳐’라고 했더니 그 다음 주에 바로 만들어오더라. 그런데 그게 더 좋으니까 그걸로 간 거지.
정중엽 : 기하가 만들어온 걸 듣고, 내가 대반대를 했다. (웃음) (이)민기에게 이렇게는 안 되니 제발 만들라고.
장기하가 만들어 온 걸 연주하기는 어떤가.
정중엽 : 연주자가 아니기 때문에 연주자가 생각할 수 없는 라인을 짜올 때가 있다. 1집의 ‘별 일 없이 산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칠 수 없는 라인이다 싶었다. 습관적인 프레이즈가 없다. 심지어 ‘싸구려 커피’를 할 땐 지판의 범위를 넘은 음이라 벤딩(지판을 잡은 손가락으로 줄을 올려 음을 높이는 주법)을 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게 재밌다.
이종민 : 그래서 밴드가 멋있는 거 같다. (장)기하 형에게 있는 게 (정)중엽이 형에게는 없고, 기하 형에게는 없는 게 중엽이 형에게는 있고. 그래서 그들은 너무 사랑하고.
“보컬리스트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다” 작업도 밴드 지향적이지만 사운드 역시 그렇다. 악기나 녹음에 있어 전작보다 훨씬 풍성하다.
장기하 : 단적으로 1집이 5만 장 정도 팔렸는데 사실 들인 돈은 몇 백만 원이니까. 그 돈을 들여 이 정도 팔았는데, 이 정도를 다시 써서 만들지 않으면 상도덕에 어긋난다 싶을 정도의 액수를 이번 앨범에 들였다. 사람들이 우리 음반을 사준 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투자를 받은 건 음악에 써야지. 장비도 구입하고, 좋은 스튜디오 대여하고, 실력 있는 기사님도 모셔서 녹음을 하고.
해먼드오르간 사운드는 어땠나. 70년대 아트록에서나 듣던 톤이었는데.
장기하 : 70년대 아트록을 너무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해먼드오르간 소리가 들어간 신시사이저가 있고, 진짜 해먼드오르간이 있는데 후자를 빌려서 다 그걸로 녹음을 했다. 사실 빌리기 전에는 긴가민가해서 뭐 큰 차이 있겠나, 괜히 번거로운 거 아닌가 싶었는데 보니까 비주얼부터 뭔가… 판이 돌아가고 이러니까. 환풍기 같은 게 돌아가는 거에 의해 소리가 나는 되게 아날로그적인 악기다.
정중엽 : 그걸 눈으로 봐버리니까. (웃음)
장기하 : 멋있을 수밖에 없는 악기다, 이건. 소리도 훨씬 좋고. 딴 걸로 갈 수가 없었다.
이종민 : 녹음 들어가기 전에는 해먼드오르간을 빌리더라도 정해진 몇 곡에서만 어느 정도 치려고 했는데 하다보니까 이거는 안 되겠더라. 대여섯 곡에 쓴 것 같다.
전체적 연주와 사운드가 좋아진 것만큼 보컬리스트 장기하의 역량 역시 더 드러났다.
장기하 : 1집 때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자각이 별로 없었다. 밴드 리더라는 정체성이 더 컸었는데, 공연을 많이 하다보니까 내가 보컬리스트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만든 곡, 다른 사람이 불렀던 곡을 부를 기회도 여러 번 있다 보니 노래를 어떻게 하는 게 듣기 좋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좀 더 섬세해졌지만 노랫말도 디테일해졌다. 전에는 본인 가사에 대한 과잉 해석을 경계했는데 그 때문인지 말하고자 하는 게 더 명확해졌다.
장기하 : 글쎄, 딱히 그런 생각을 하고 음악을 만든 건 아니다. 태도는 똑같았는데 그런 차이가…
김현호 : 좀 더 구체적인 어휘를 사용한 건 있다. 예전에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들으면서 ‘이게 뭔 말이여, 뭐 어쩌라고’ 이랬는데 (웃음) 이제는 ‘전화번호부에 삼백 명이 있다’ 딱 오잖아.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장기하 : 항상 사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상적일뿐이면 안 된다. 그런 건 일기장에 쓰면 되는 거고. 오늘 미니홈피에 어떤 사람이 ‘이게 음악입니까?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분은 우리 음악을 안 좋아하는 게 맞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음악은 안 좋아한다.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는데 일기장에 써야할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어떻게 다른가.
장기하 : 나 자신에게 일상적일 뿐만 아니라 되게 중요한 문제여야 하고, 그게 남들에게 얘기했을 때도 흥미를 가질만한 무언가여야 된다. 또 과거에 남들이 많이 했던 얘기가 아니어야 하고. 이렇게 나름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게 얼마나 잘 관철됐을지는 들으신 분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
여전히 음악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나.
장기하 : 그렇지. 재밌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럼 본인 음악을 듣는 건 재밌나.
장기하 : 우리 음악 듣는 거 재밌지. 좋지 않나, 음악이. (웃음)
인터뷰, 글. 위근우 기자 eight@
인터뷰.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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