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꽃 필 무렵
“공부를 못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고등학교 때는 심화반도 들어가고 공부를 꽤 열심히 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건 뮤지컬이었지만 취미로만 하길 바라셔서 매일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덕분에 수리영역 등급은 낮아졌지만요. (웃음)” 동생을 오페라의 유령 삼아 고음을 연마하고, 아빠를 연인 삼아 설레던 지난 여름밤을 그리던 소녀. 동생은 그런 이지수를 ‘뮤지컬에 미친 누나’로 소개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몰래 마음에 뿌린 씨앗은 쑥쑥 자라 어느새 봉오리를 맺어버렸다. 27년 만에 한국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코제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든 소녀의 호기심
에 ‘뮤지컬에 미친 누나’로 소개된 이지수는 결국 <레미제라블>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다."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EkNAIiHKohjQ3.jpg" width="555" height="185" align="top" border="0" />

바이올린, 가야금, 스케이트, 하다못해 대구의 웬만한 영어학원은 다 다닐 정도로 싫증이 잦은 성격이 뮤지컬에서만큼은 기를 못 폈다. 대구시립소년소녀합창단원으로 활동하던 열두 살, <사운드 오브 뮤직>을 듣던 날 이후 그는 밤새 동영상을 찾아 헤매고, 3개월씩 용돈을 모아 뮤지컬을 봤다. “70GB 중 69.7GB를 뮤지컬 넘버”로 채우고, 악보가 없으면 채보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었다.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고민해온 세월은 결국, 경험 삼아 던진 이력서가 세계적인 프로듀서 카메론 메킨토시에게 전달되고, 선배들이 먼저 차기작을 걱정할 정도의 거대한 태풍으로 이어졌다.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빨라서 처음엔 겁이 났어요. 노래나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10차까지 오디션을 보면서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열심히 하면 되지 뭐!”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꿈꾸고, 운명처럼 만난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코제트는 그런 이지수를 많이 닮았다.

기다려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뜯어보며 흥분하는 아이처럼 지금 그의 눈에는 온통 신기한 일 투성이다. 20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 자신의 한계를 찾아내고, 스스로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일까지 말이다. “학교와 달리 여기는 돈을 버는 직장이다 보니까 조금이라도 못하면 작품에 피해가 될까 걱정이 많이 됐어요. 얼마 전에 대학동기들을 만났는데 왜 이렇게 삭았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아요.” 걸음마를 배우듯 선배들의 조언을 하나씩 제 몸으로 흡수하며 제법 자신의 역할과 관계를 보는 눈도 생겼다. “처음 1주일은 웨딩신이 너무 힘들었어요. 아빠랑 마리우스가 얘기 나눈 다음에 결혼을 하는데, 코제트는 그 상황을 모르지만 전 그걸 볼 수 있잖아요. 힘없이 걷는 아빠의 발걸음을 보면 웃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어 5개월 뒤 서울 관객들에게는 “코제트가 저기 있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야무진 대답까지 이어진다.

“다음 작품을 위해 연애를 해야겠어요”

이지수│꽃 필 무렵
이지수│꽃 필 무렵
주어진 일을 똑부러지게 해내는 씩씩한 성격에 감탄할 즈음 이지수가 순간 머뭇거렸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마리우스와의 키스가 첫 키스였음을 고백하며 어느새 붉게 물든 뺨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포털사이트에서 ‘제일 로맨틱한 영화’로 검색해서 다 찾아보고, 연애경험 있는 언니들 얘기도 들어봤는데 너무 어려워요.” 함께 걷던 두 남녀가 스치듯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모습을 꿈꿔온 스무 살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은 많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쿵쾅대는 가슴을 위해 연신 백스테이지를 달리고 있음을 고백하지만, 어느새 “다음 작품을 위해 연애를 해야겠다”며 수줍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쥔다. 뭐든지 제 몸으로 겪고야 말겠다는 단단한 마음을 보았던 그 때, 이 고집쟁이 아가씨가 기어코 다다를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8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작은 봉오리가 커다랗고 화려한 꽃으로 피어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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