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 스웨터를 입는다. 다리에는 가터벨트를 착용한다. 혀 끝으로 입술을 핥는다. 가슴을 내민다.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뒤로 젖힌다. 손이 온 몸을 훑는다. 가인의 신곡 ‘피어나’의 무대는 남성들에게 온갖 야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무대 위의 남성 댄서들은 무표정하다. 그들은 로봇처럼 동작을 소화할 뿐 가인의 춤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인은 그들과 한 번도 정면으로 눈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가인의 시선은 무대 정면을 향한다. 정면을 바라본 채, 가인은 다양한 포즈들을 취한다. ‘피어나’의 안무는 동작과 동작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대신 섹시한 느낌을 주는 각각의 포즈들을 취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댄서들이 사라지고, 가인 혼자 정면을 바라보며 여러 포즈를 취하는 무대 후반의 구성은 가인의 시선이 누굴 향한 것인지 짐작케 한다. 남자들이 사라져도, 가인은 자신의 섹시함을 표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는 것처럼.
가인,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섹시
가인은 남자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방식의 ‘피어나’를 통해 오히려 가장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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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은 남자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방식의 ‘피어나’를 통해 오히려 가장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
거의 모든 여성 가수에게 섹시한 댄스는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장치다. 걸그룹이 곡에서 악센트를 줘야할 부분마다 다리를 벌리는 춤을 추곤 하는 것이 그 예다. 섹시함이 콘셉트 그 자체라 해도 좋을 ‘피어나’도 당연히 시선을 끈다. 그러나, ‘피어나’는 특정 동작을 강조하며 시선을 끄는 포인트 춤이 없다. 대신 모델이 계속 포즈를 취하는 듯한 동작들이 이어진다. 가인의 소속사 로엔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 따르면 ‘피어나’의 안무에도 원래 포인트 춤이 포함돼 있었지만, 그 포인트를 빼고 지금처럼 다양한 포즈 중심의 안무를 요구한 사람이 바로 가인이었다. 그 결과 ‘피어나’의 안무는 타인에게 어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여성이 섹시한 표정과 포즈를 마음껏 해보는 구성이 됐다. 또한 ‘피어나’의 뮤직비디오는 황수아 감독이, 가사는 작사가 김이나가 맡았다. 두 여성은 그들의 시선에서 섹시함을 표현한다. 뮤직비디오에 가인의 베드신이 등장하지만, 가인과 관계를 갖는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온다. 대신 카메라는 희열을 느끼는 가인의 표정을 잡는다. 김이나의 가사로 표현한다면, 남자는 ‘내가 선택한’ 존재고, 그가 사랑스러운 것은 나를 ‘high’하고 ‘fly’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는 묘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든 섹시함이든 여성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결과라는 점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지만, 그 디테일은 섹시함이 ‘(타인의)시선 따윈 알게 뭐니’라고 노래하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 절묘한 공존은 이 곡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조합 때문일 것이다. 안무, 가사, 뮤직비디오는 여성이 주축이지만, 프로듀싱과 작곡은 각각 남성인 프로듀서 조영철과 작곡가 이민수가 맡았다. 이들 중 가인을 제외한 네 명의 남녀는 아이유와 브라운 아이드 걸스를 제작한 바 있다. 아이유는 귀여운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극단이었고,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섹시함에 터프함을 가미한 강한 여자들이었다. 가인은 이 네 남녀의 정확한 한가운데다. 남성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섹시한 콘셉트는 남성 스태프가 짠 틀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 스태프는 그들의 시선으로 섹시함을 표현했다. 여성도 성관계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 쾌감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드러내자 가인은 가련한 소녀도, 남성의 시각적 만족만을 위한 쇼걸도 아닌 무대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된다. ‘피어나’는 주체적인 여성에 대한 시각을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느냐로, 바깥의 시선에서 내면의 욕망의 문제로 옮긴다.
미스에이, 타인이 만들어놓은 좋은 여자의 기준
반면 ‘남자 없이 잘 살아’를 발표한 미스에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여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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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남자 없이 잘 살아’를 발표한 미스에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여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미스에이의 ‘남자 없이 잘 살아’가 ‘피어나’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흥미롭다. 박진영이 작사한 ‘남자 없이 잘 살아’의 여성은 ‘내 돈으로 방세 다 내’고, ‘내 차 내 옷 내가 벌어서 산’다. ‘남자 믿고 놀다 남자 떠나면 어떡할’거냐는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가사만 보면 ‘남자 없이 잘 살아’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인생은 남자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경제생활이 당당한 여성의 기준은 타인의 시선이다. ‘남자없이 잘 살아’의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이 콧수염을 붙여보거나, 이두박근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스에이가 노래하는 독립적인 여성은 사실상 남성들이 요즘 ‘개념녀’라고 말하는 이상적인 여성이다. ‘피어나’가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코드로 여성의 욕망을 말한다면, ‘남자 없이 잘 살아’는 당당한 여성을 어필하면서 ‘된장녀’와는 정반대인 ‘개념녀’라는 남성의 욕망을 말한다.
‘피어나’는 타인의 시선 대신 내면의 욕망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남자 없이 잘 살아’는 남자, 또는 사회가 원하는 좋은 여성의 기준을 더욱 더 강화한다. 출산과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인터넷에서는 남녀가 수많은 문제들로 논쟁을 하는 이 시점에서 두 곡의 등장은 어떤 징후처럼 보인다. 많은 남자들은 명품 백을 사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개념녀’와 그렇지 않은 여성을 가른다. 반면 많은 여성들은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는 한 돈을 쓰고 싶은 곳에 욕먹지 않고 쓸 권리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한다. 주체적인 욕망과 타인의 시선이 정한 기준 안에 들어오는 것 사이의 대립. 남녀 모두 주체적인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층위는 전혀 다르다. ‘피어나’가 예상치 못했던 카운터펀치인 이유다. 인터넷에서 끝없이 반복되던 남녀의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도 모두가 답 없는 논쟁을 할 때, 여성의 욕망을 놀라울 만큼 잘 드러내면서 남성도 즐길 수 있는 판타지의 접점을 만들면서 말이다. 강하거나, 세거나, 독특한 여성 걸그룹들의 노래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지금, ‘피어나’가 대중음악 시장에서 얻는 반응은 지금 이런 목소리에 대한 수요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남자없이 잘 살아’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류 대중음악, 또는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시장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주 조금은 달라진 순간을 보고 있다. 그게 결과적으로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맴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10 아시아>
가인,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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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은 남자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방식의 ‘피어나’를 통해 오히려 가장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
거의 모든 여성 가수에게 섹시한 댄스는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장치다. 걸그룹이 곡에서 악센트를 줘야할 부분마다 다리를 벌리는 춤을 추곤 하는 것이 그 예다. 섹시함이 콘셉트 그 자체라 해도 좋을 ‘피어나’도 당연히 시선을 끈다. 그러나, ‘피어나’는 특정 동작을 강조하며 시선을 끄는 포인트 춤이 없다. 대신 모델이 계속 포즈를 취하는 듯한 동작들이 이어진다. 가인의 소속사 로엔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 따르면 ‘피어나’의 안무에도 원래 포인트 춤이 포함돼 있었지만, 그 포인트를 빼고 지금처럼 다양한 포즈 중심의 안무를 요구한 사람이 바로 가인이었다. 그 결과 ‘피어나’의 안무는 타인에게 어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여성이 섹시한 표정과 포즈를 마음껏 해보는 구성이 됐다. 또한 ‘피어나’의 뮤직비디오는 황수아 감독이, 가사는 작사가 김이나가 맡았다. 두 여성은 그들의 시선에서 섹시함을 표현한다. 뮤직비디오에 가인의 베드신이 등장하지만, 가인과 관계를 갖는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온다. 대신 카메라는 희열을 느끼는 가인의 표정을 잡는다. 김이나의 가사로 표현한다면, 남자는 ‘내가 선택한’ 존재고, 그가 사랑스러운 것은 나를 ‘high’하고 ‘fly’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는 묘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든 섹시함이든 여성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결과라는 점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지만, 그 디테일은 섹시함이 ‘(타인의)시선 따윈 알게 뭐니’라고 노래하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 절묘한 공존은 이 곡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조합 때문일 것이다. 안무, 가사, 뮤직비디오는 여성이 주축이지만, 프로듀싱과 작곡은 각각 남성인 프로듀서 조영철과 작곡가 이민수가 맡았다. 이들 중 가인을 제외한 네 명의 남녀는 아이유와 브라운 아이드 걸스를 제작한 바 있다. 아이유는 귀여운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극단이었고,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섹시함에 터프함을 가미한 강한 여자들이었다. 가인은 이 네 남녀의 정확한 한가운데다. 남성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섹시한 콘셉트는 남성 스태프가 짠 틀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 스태프는 그들의 시선으로 섹시함을 표현했다. 여성도 성관계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 쾌감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드러내자 가인은 가련한 소녀도, 남성의 시각적 만족만을 위한 쇼걸도 아닌 무대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된다. ‘피어나’는 주체적인 여성에 대한 시각을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느냐로, 바깥의 시선에서 내면의 욕망의 문제로 옮긴다.
미스에이, 타인이 만들어놓은 좋은 여자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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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남자 없이 잘 살아’를 발표한 미스에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여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미스에이의 ‘남자 없이 잘 살아’가 ‘피어나’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흥미롭다. 박진영이 작사한 ‘남자 없이 잘 살아’의 여성은 ‘내 돈으로 방세 다 내’고, ‘내 차 내 옷 내가 벌어서 산’다. ‘남자 믿고 놀다 남자 떠나면 어떡할’거냐는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가사만 보면 ‘남자 없이 잘 살아’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인생은 남자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경제생활이 당당한 여성의 기준은 타인의 시선이다. ‘남자없이 잘 살아’의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이 콧수염을 붙여보거나, 이두박근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스에이가 노래하는 독립적인 여성은 사실상 남성들이 요즘 ‘개념녀’라고 말하는 이상적인 여성이다. ‘피어나’가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코드로 여성의 욕망을 말한다면, ‘남자 없이 잘 살아’는 당당한 여성을 어필하면서 ‘된장녀’와는 정반대인 ‘개념녀’라는 남성의 욕망을 말한다.
‘피어나’는 타인의 시선 대신 내면의 욕망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남자 없이 잘 살아’는 남자, 또는 사회가 원하는 좋은 여성의 기준을 더욱 더 강화한다. 출산과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인터넷에서는 남녀가 수많은 문제들로 논쟁을 하는 이 시점에서 두 곡의 등장은 어떤 징후처럼 보인다. 많은 남자들은 명품 백을 사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개념녀’와 그렇지 않은 여성을 가른다. 반면 많은 여성들은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는 한 돈을 쓰고 싶은 곳에 욕먹지 않고 쓸 권리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한다. 주체적인 욕망과 타인의 시선이 정한 기준 안에 들어오는 것 사이의 대립. 남녀 모두 주체적인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층위는 전혀 다르다. ‘피어나’가 예상치 못했던 카운터펀치인 이유다. 인터넷에서 끝없이 반복되던 남녀의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도 모두가 답 없는 논쟁을 할 때, 여성의 욕망을 놀라울 만큼 잘 드러내면서 남성도 즐길 수 있는 판타지의 접점을 만들면서 말이다. 강하거나, 세거나, 독특한 여성 걸그룹들의 노래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지금, ‘피어나’가 대중음악 시장에서 얻는 반응은 지금 이런 목소리에 대한 수요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남자없이 잘 살아’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류 대중음악, 또는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시장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주 조금은 달라진 순간을 보고 있다. 그게 결과적으로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맴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10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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