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KBS 에서 한 코너가 5년 동안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방영되고, 심지어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다시 최고 인기 코너로 등극하는 그런 수준의 위업. 과거 만화에선 쉽게 쓰지 않을 ‘..찍고’란 대사와 함께 강렬하게 등장해 최근 연재 5주년과 600회를 돌파한 개그 만화 의 위엄은 이렇게 숫자에서부터 압도적이다. 이것을 단순히 오래, 혹은 꾸준히, 라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남을 웃기거나 재밌게 해주는 일은 정작 재미와는 거리가 먼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아무리 빵빵 터뜨렸어도 다음 주엔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막막함은 웃음을 만드는 이들이 겪어야 할 천형과도 같다. 요컨대 600회까지의 연재는 단순히 100회 연재의 6배만큼 힘든 일이 아니다. 준비된 아이디어가 고갈된 어느 순간부터 매회 매회는 초반 100회 만큼 스스로를 쥐어짜야 가능해진다.
그래서다. 안에서 애봉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온갖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는 가상의 조석과 실제 조석 작가의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만화에 묘사된 것과는 달리 훈훈해 당혹스러운 외모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모르는 여성에게 고백하는 벌칙을 수행하며 과거의 탈선을 고백하는 어설픈 만화 속 주인공은 그 바깥에선 “다른 장르 만화는 언젠가 꼭 그려봐야 해요. 여태 한 번도 ‘이 정도면 됐지’ 하고 끝낸 적은 없는데 앞으로도 그러려면 다른 장르도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써봐야 하거든요”라고 조리 있게 계획을 밝히는 프로페셔널이 된다. 하지만 의외는 아니다. “인기 만화가라는 말을 하지만 인기는 남이 주는 거잖아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만화밖에 없으니까 그걸 열심히 해야죠”라 말하는 성실한 작가 조석만이 매회 엉뚱하고 웃긴 행동을 하는 가상의 조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음의 추천 영화들에 대한 코믹한 멘트에 방심하지 말자. 짧은 답변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여기에 있다. 1. (Iron Man)
2008년 | 존 파브로
“아이언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히어로예요. 보통(이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히어로들은 인간을 숨 막히게 하는 간극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잖아요. 슈퍼맨처럼 태생이 우주인이라던지, 스파이더맨처럼 유전자가 변형된 슈퍼 거미에 물려야 하던지. 그런데 토니 스타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요. 그저 돈과 똑똑함이 더해졌을 뿐이죠. 물론 개인용 우주 정거장을 만들 정도의 돈(코믹스에서)과 새로운 물질을 집에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똑똑함()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남자가 무언가를 구매하고 싶다는 건, 그 나이에 맞는 새로운 장난감을 원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동차, 아이패드로 넘어가는 이 욕구의 정점을 자극한 최후의 장난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은 천재적 작품이었다. 히어로의 고뇌보다는 하이엔드 장난감을 얻어 신난, 아직 철이 덜든 부자 겸 천재 토니의 삶만큼 부러운 것이 또 있을까. 2. (Die Hard)
1988년 | 존 맥티어난
“시리즈 전체를 좋아하는 영화예요. 시리즈 전체를 설명하자면, 찢어지고 총 맞고 팔 빠지고 구르고 피나는 주인공이 결국 악당을 죽이는 영화죠. 점점 살이 올라 나중엔 상체로만 싸우게 되는 시걸보단, 숟가락을 들 때도 발차기로 뜰 것 같은 쟝-끌로드 반담보단 코피가 터져도 지는 게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브루스 윌리스가 더 좋았어요.”
이후에도 액션이라는 장르에서 수많은 걸작들이 등장했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만큼 밀도 높은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의 활약이라는 일종의 한계가 오히려 절제 없는 활극보다 훨씬 긴장감 넘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면에서 ‘고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3. (Saw)
2004년 | 제임스 완
“이것도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저와 같은 개그 만화 작가에겐 매우 소중한 형태의 영화예요. 우선 진지하고 무섭고 다양한 장치들과 함정, 대상을 골라 괴롭힐 때의 일정한 패턴은 개그적인 상상력을 아주 많이 자극하죠. 예를 들어 말을 하면 머리가 날아가는 장치를 몸에 두르고서 협박을 당하는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다 죽는 것보단, 그 장치를 달고선 수화를 배워 평생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을 상상해본다던지.”
시리즈의 첫 번째가 반전에 좀 더 방점이 찍힌 영화였다면, 두 번째 시리즈부터는 기상천외하면서도 극도로 잔인한 부비트랩으로 영화의 중심이 바뀐 면이 있는 작품. 하지만 결코 시각적 잔인함만으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직쏘가 만든 딜레마에 부딪히는 각 캐릭터들의 절실함은, 잔인함을 넘어선 숨 막히는 공포로 다가온다. 4.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2003년 | 피터 잭슨
“사실 판타지의 모습을 따르되 판타지스러운 기대치는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 영화였어요. 하지만 주인공 프로도의 여정은 인상 깊었어요. 숨겨진 힘이 나중에 발견되거나, 나약했던 주인공이 모험을 통해 점점 강해져 ‘빠밤’ 하고 나타나는 스토리에 대한 기대는 철저하게 짓밟혔죠. 하지만 프로도만의 초인적인 ‘찌질력’으로 찌질찌질하게 나아가며 끝끝내 반지를 파괴해 세상을 구하는 모습을 본 사우론은 마법전사에게 당하는 것보다 더 환장하지 않았을까요.”
시각 효과의 발달이 영화의 장르적 영역 자체를 확장해준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 그랬고 가 그러했으며 시리즈, 그 중에서도 3편이 특히 그러하다. 2편의 스케일 큰 공성전조차 동네 싸움으로 전락시킨 대규모 전쟁 신과 인간 배우 이상의 표현력을 보여준 골룸의 이중 자아 놀이까지, 시각 효과 발달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5. (The Usual Suspects)
1996년 | 브라이언 싱어
“청소년기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반전 스릴러를 쓰고 싶게 자극했던 영화죠. 임기응변으로 말을 지어내는 장면도, 컵이 떨어지는 장면도, 카이저소제라는 캐릭터도 모두 상상력을 자극했죠. 가장 유명한 최후의 반전 장면에서 카이저소제가 발을 절며 걷다가 물구나무서서 가는 걸로 바꿨어도 재밌었을 거 같아요.”
정확히 말해 절묘한 트릭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만약 ‘라스트 10분, 패배자는 바로 관객’이라는 영화 카피에 주목한 이라면 빌빌거리는 절름발이 버벌(케빈 스페이시)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술을 통해 이야기를 조각조각 모아가는 진행, 진실이 수사관 데이브(채즈 팰민테리)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는 걸 몽타주로 드러내는 과정, 그 유명한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장면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연출은 탁월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브라이언 싱어라는 또 하나의 천재를 만날 수 있었다. “전제는 결국, 만화를 재밌게 그려야 한다는 거예요. 저에게 만화를 이용한 사업수단이 있고 미래를 보는 천리안이 있다고 해도 만화가 재미없으면 아무 기회도 얻지 못하잖아요.” 여전히 너무 합리적이라 적응하기 어렵지만, 일에 있어 타협하지 않겠다는 조석 작가의 말에는 정말 그렇게만 일 해온 사람만의 확신과 진정성이 드러난다. 비록 말끝마다 ‘제 경우엔’이라고 한정을 지으려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림 선이나 연출 같은 건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건 몇 등 안에 들 거”라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으면 싶은 건 그래서다. 수많은 천재적 창작자들이 피고 지는 이 필드에서, 웹툰 초창기부터 지금가지 몇 번의 부침을 극복하고 놀랍게도 여전히 재밌는 만화를 그리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기적은, 이렇게 기적적으로 성실한 이들이 만드는 것이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사진. 이진혁 eleven@
그래서다. 안에서 애봉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온갖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는 가상의 조석과 실제 조석 작가의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만화에 묘사된 것과는 달리 훈훈해 당혹스러운 외모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모르는 여성에게 고백하는 벌칙을 수행하며 과거의 탈선을 고백하는 어설픈 만화 속 주인공은 그 바깥에선 “다른 장르 만화는 언젠가 꼭 그려봐야 해요. 여태 한 번도 ‘이 정도면 됐지’ 하고 끝낸 적은 없는데 앞으로도 그러려면 다른 장르도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써봐야 하거든요”라고 조리 있게 계획을 밝히는 프로페셔널이 된다. 하지만 의외는 아니다. “인기 만화가라는 말을 하지만 인기는 남이 주는 거잖아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만화밖에 없으니까 그걸 열심히 해야죠”라 말하는 성실한 작가 조석만이 매회 엉뚱하고 웃긴 행동을 하는 가상의 조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음의 추천 영화들에 대한 코믹한 멘트에 방심하지 말자. 짧은 답변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여기에 있다. 1. (Iron Man)
2008년 | 존 파브로
“아이언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히어로예요. 보통(이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히어로들은 인간을 숨 막히게 하는 간극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잖아요. 슈퍼맨처럼 태생이 우주인이라던지, 스파이더맨처럼 유전자가 변형된 슈퍼 거미에 물려야 하던지. 그런데 토니 스타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요. 그저 돈과 똑똑함이 더해졌을 뿐이죠. 물론 개인용 우주 정거장을 만들 정도의 돈(코믹스에서)과 새로운 물질을 집에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똑똑함()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남자가 무언가를 구매하고 싶다는 건, 그 나이에 맞는 새로운 장난감을 원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동차, 아이패드로 넘어가는 이 욕구의 정점을 자극한 최후의 장난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은 천재적 작품이었다. 히어로의 고뇌보다는 하이엔드 장난감을 얻어 신난, 아직 철이 덜든 부자 겸 천재 토니의 삶만큼 부러운 것이 또 있을까. 2. (Die Hard)
1988년 | 존 맥티어난
“시리즈 전체를 좋아하는 영화예요. 시리즈 전체를 설명하자면, 찢어지고 총 맞고 팔 빠지고 구르고 피나는 주인공이 결국 악당을 죽이는 영화죠. 점점 살이 올라 나중엔 상체로만 싸우게 되는 시걸보단, 숟가락을 들 때도 발차기로 뜰 것 같은 쟝-끌로드 반담보단 코피가 터져도 지는 게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브루스 윌리스가 더 좋았어요.”
이후에도 액션이라는 장르에서 수많은 걸작들이 등장했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만큼 밀도 높은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의 활약이라는 일종의 한계가 오히려 절제 없는 활극보다 훨씬 긴장감 넘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면에서 ‘고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3. (Saw)
2004년 | 제임스 완
“이것도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저와 같은 개그 만화 작가에겐 매우 소중한 형태의 영화예요. 우선 진지하고 무섭고 다양한 장치들과 함정, 대상을 골라 괴롭힐 때의 일정한 패턴은 개그적인 상상력을 아주 많이 자극하죠. 예를 들어 말을 하면 머리가 날아가는 장치를 몸에 두르고서 협박을 당하는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다 죽는 것보단, 그 장치를 달고선 수화를 배워 평생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을 상상해본다던지.”
시리즈의 첫 번째가 반전에 좀 더 방점이 찍힌 영화였다면, 두 번째 시리즈부터는 기상천외하면서도 극도로 잔인한 부비트랩으로 영화의 중심이 바뀐 면이 있는 작품. 하지만 결코 시각적 잔인함만으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직쏘가 만든 딜레마에 부딪히는 각 캐릭터들의 절실함은, 잔인함을 넘어선 숨 막히는 공포로 다가온다. 4.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2003년 | 피터 잭슨
“사실 판타지의 모습을 따르되 판타지스러운 기대치는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 영화였어요. 하지만 주인공 프로도의 여정은 인상 깊었어요. 숨겨진 힘이 나중에 발견되거나, 나약했던 주인공이 모험을 통해 점점 강해져 ‘빠밤’ 하고 나타나는 스토리에 대한 기대는 철저하게 짓밟혔죠. 하지만 프로도만의 초인적인 ‘찌질력’으로 찌질찌질하게 나아가며 끝끝내 반지를 파괴해 세상을 구하는 모습을 본 사우론은 마법전사에게 당하는 것보다 더 환장하지 않았을까요.”
시각 효과의 발달이 영화의 장르적 영역 자체를 확장해준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 그랬고 가 그러했으며 시리즈, 그 중에서도 3편이 특히 그러하다. 2편의 스케일 큰 공성전조차 동네 싸움으로 전락시킨 대규모 전쟁 신과 인간 배우 이상의 표현력을 보여준 골룸의 이중 자아 놀이까지, 시각 효과 발달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5. (The Usual Suspects)
1996년 | 브라이언 싱어
“청소년기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반전 스릴러를 쓰고 싶게 자극했던 영화죠. 임기응변으로 말을 지어내는 장면도, 컵이 떨어지는 장면도, 카이저소제라는 캐릭터도 모두 상상력을 자극했죠. 가장 유명한 최후의 반전 장면에서 카이저소제가 발을 절며 걷다가 물구나무서서 가는 걸로 바꿨어도 재밌었을 거 같아요.”
정확히 말해 절묘한 트릭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만약 ‘라스트 10분, 패배자는 바로 관객’이라는 영화 카피에 주목한 이라면 빌빌거리는 절름발이 버벌(케빈 스페이시)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술을 통해 이야기를 조각조각 모아가는 진행, 진실이 수사관 데이브(채즈 팰민테리)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는 걸 몽타주로 드러내는 과정, 그 유명한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장면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연출은 탁월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브라이언 싱어라는 또 하나의 천재를 만날 수 있었다. “전제는 결국, 만화를 재밌게 그려야 한다는 거예요. 저에게 만화를 이용한 사업수단이 있고 미래를 보는 천리안이 있다고 해도 만화가 재미없으면 아무 기회도 얻지 못하잖아요.” 여전히 너무 합리적이라 적응하기 어렵지만, 일에 있어 타협하지 않겠다는 조석 작가의 말에는 정말 그렇게만 일 해온 사람만의 확신과 진정성이 드러난다. 비록 말끝마다 ‘제 경우엔’이라고 한정을 지으려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림 선이나 연출 같은 건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건 몇 등 안에 들 거”라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으면 싶은 건 그래서다. 수많은 천재적 창작자들이 피고 지는 이 필드에서, 웹툰 초창기부터 지금가지 몇 번의 부침을 극복하고 놀랍게도 여전히 재밌는 만화를 그리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기적은, 이렇게 기적적으로 성실한 이들이 만드는 것이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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