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고달프게 산 그늘에서 우리가 많은 덕을 봤어. 너 다음 생에 내 각시하라. 한 평생 내가 잘 보살피며 살아주마.” 지난번 바닷가 산책길에 시어머님(김용림)이 건네신 이 말씀 한 마디에 그간 남모르게 민재(김해숙) 여사를 침잠해왔던 우울증이 어느 정도는 치료되었지 싶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내가 애썼다는 걸 누가 알아주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평생을 함께 살아도 여전히 어려운 시어머님께 들었으니 가슴이 먹먹하셨을 거예요. 사람이라는 게 공을 바라고, 치하를 바래 뭔가를 행한다는 건 경우가 아니지만 그래도 당연히 여기는 것보다는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기 마련이죠. 저 역시 그런 적이 있거든요. 철딱서니 없는 나이에 삼대독자 며느리 자리로 시집 와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영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몇 년 전 제가 병을 얻어 입원 했을 때 우리 어머님이 친척 분에게 하셨다는 ‘내게 우리 며느리가 그렇게 귀한 사람인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는 말씀에 그간 가슴 밑바닥에 켜켜이 쌓아두고 있었던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지던 걸요.
고부 사이에 오간 대화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 말씀 말고도 두 분이 나눈 바닷가에서의 담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는 안 태어나고 싶다. 잘난 남자로 태어날 거야.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아는, 중요한 나랏일 하는 사람. 그렇게 한 평생 잘나게 살고 싶다. 마누라는 오직 한 사람, 차분하고 심성 고운 여자 만나 한 평생 낯붉히는 일 없이 의좋게 정 좋게 그렇게. 꼭 그렇게 다시 살고 싶다.” 늘 누구보다 당당하신 어르신이시거늘 그간 오입쟁이 남편과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한스러우셨으면 할머니께서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좋겠어요. 제 인생에 그렇게 큰 불만은 없어요. 그래도 재혼해야 하는 여자는 싫어요. 한 사람하고 평탄하게, 쭉 잘 살아보고 싶어요.” 또한 민재 여사는 딸 데리고 들어와 꼬장꼬장한 시어머님 아래서 전실 자식과 시동생들 거두며 오지랖 부려야하는 삶이 얼마나 힘겨우셨으면 꼭 집어 재혼해야 하는 여자는 싫다고 못을 박으셨을까요. 워낙 화제가 된 ‘동성애’ 코드에 가려져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 SBS 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시어머니들의 변화이지 싶어요.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는 것부터가 크나큰 변화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첫 회 때 공항에 마중 시간을 대지 못한 민재(김해숙)와 시어머니(김용림)의 갈등은 결국 마지막 회에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하며 일종의 해피엔딩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영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태섭이 어머님. 제 마음 한 구석이 왜 이리 꺼림칙한지 모르겠어요. 터놓고 말하자면 아마 며느님이신 연주(남상미) 씨 때문이지 싶어요. 알고 보니 연주 씨가 제 딸아이와 스물일곱, 동갑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또래 처자들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 나이가 철이 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거든요. 며느님이 워낙 엽렵한 성품이긴 해도 층층시하에 둘씩이나 되는 시누이, 시누이 남편에 작은 아버지며 조카들,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지 뭡니까. 호섭(이상윤) 씨가 하는 다이버 강사 일과 부모님의 펜션 사업이 서로 공조를 이루고 있는지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재 여사의 비서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일에서 놓여날 날이 없겠더라고요. 더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누이들은 오며 가며 한 마디씩 가시 돋친 소리를 하지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솔직히 민재 여사도 엄청나게 쿨 한 분은 아니시잖아요. 게다가 치명적인 건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모두 공유하는 비밀이 없는 집이라는 사실이 아닐까요.
만약 제 딸아이가 민재 여사 댁 같은 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밤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고백하자면 민재 여사와 따님들이 연주 씨가 호섭 씨의 마음을 얻은 걸 두고 로또 당첨이니 뭐니 하실 때 죄송하지만 저는 혼자 ‘얼어 죽을 로또!’라고 외쳤다는 거 아닙니까. 민재 여사가 스스로 한탄하셨지만, 이 같은 상황을 이를 악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건 재혼 자리였기 때문이었죠. 그럼 연주 씨는 왜 요즘 세상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이 같은 시집살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까. 더욱이 제주 풍습에 따르면 고부간에 부엌은 따로 쓰는 법이라면서요? 부디 하루라도 빨리 맘 편히 살게 선처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참 세월이 흐른 후 ‘너 내 각시해라’라는 말로 위로하실 생각 마시고요. 그간 민재 여사께 가르침도 많이 받았는데 괜히 퉁명을 한번 부려보는 건 식구 모두가 두루 편안해졌는데 연주 씨의 앞날에만 어째 먹구름이 가득해보여서라는 거, 이해하시죠?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
고부 사이에 오간 대화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 말씀 말고도 두 분이 나눈 바닷가에서의 담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는 안 태어나고 싶다. 잘난 남자로 태어날 거야.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아는, 중요한 나랏일 하는 사람. 그렇게 한 평생 잘나게 살고 싶다. 마누라는 오직 한 사람, 차분하고 심성 고운 여자 만나 한 평생 낯붉히는 일 없이 의좋게 정 좋게 그렇게. 꼭 그렇게 다시 살고 싶다.” 늘 누구보다 당당하신 어르신이시거늘 그간 오입쟁이 남편과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한스러우셨으면 할머니께서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좋겠어요. 제 인생에 그렇게 큰 불만은 없어요. 그래도 재혼해야 하는 여자는 싫어요. 한 사람하고 평탄하게, 쭉 잘 살아보고 싶어요.” 또한 민재 여사는 딸 데리고 들어와 꼬장꼬장한 시어머님 아래서 전실 자식과 시동생들 거두며 오지랖 부려야하는 삶이 얼마나 힘겨우셨으면 꼭 집어 재혼해야 하는 여자는 싫다고 못을 박으셨을까요. 워낙 화제가 된 ‘동성애’ 코드에 가려져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 SBS 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시어머니들의 변화이지 싶어요.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는 것부터가 크나큰 변화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첫 회 때 공항에 마중 시간을 대지 못한 민재(김해숙)와 시어머니(김용림)의 갈등은 결국 마지막 회에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하며 일종의 해피엔딩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영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태섭이 어머님. 제 마음 한 구석이 왜 이리 꺼림칙한지 모르겠어요. 터놓고 말하자면 아마 며느님이신 연주(남상미) 씨 때문이지 싶어요. 알고 보니 연주 씨가 제 딸아이와 스물일곱, 동갑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또래 처자들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 나이가 철이 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거든요. 며느님이 워낙 엽렵한 성품이긴 해도 층층시하에 둘씩이나 되는 시누이, 시누이 남편에 작은 아버지며 조카들,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지 뭡니까. 호섭(이상윤) 씨가 하는 다이버 강사 일과 부모님의 펜션 사업이 서로 공조를 이루고 있는지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재 여사의 비서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일에서 놓여날 날이 없겠더라고요. 더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누이들은 오며 가며 한 마디씩 가시 돋친 소리를 하지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솔직히 민재 여사도 엄청나게 쿨 한 분은 아니시잖아요. 게다가 치명적인 건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모두 공유하는 비밀이 없는 집이라는 사실이 아닐까요.
만약 제 딸아이가 민재 여사 댁 같은 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밤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고백하자면 민재 여사와 따님들이 연주 씨가 호섭 씨의 마음을 얻은 걸 두고 로또 당첨이니 뭐니 하실 때 죄송하지만 저는 혼자 ‘얼어 죽을 로또!’라고 외쳤다는 거 아닙니까. 민재 여사가 스스로 한탄하셨지만, 이 같은 상황을 이를 악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건 재혼 자리였기 때문이었죠. 그럼 연주 씨는 왜 요즘 세상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이 같은 시집살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까. 더욱이 제주 풍습에 따르면 고부간에 부엌은 따로 쓰는 법이라면서요? 부디 하루라도 빨리 맘 편히 살게 선처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참 세월이 흐른 후 ‘너 내 각시해라’라는 말로 위로하실 생각 마시고요. 그간 민재 여사께 가르침도 많이 받았는데 괜히 퉁명을 한번 부려보는 건 식구 모두가 두루 편안해졌는데 연주 씨의 앞날에만 어째 먹구름이 가득해보여서라는 거, 이해하시죠?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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