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화 많이 안 보는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요? (웃음)” 관객들을 위한 영화 추천을 부탁하자마자 난색을 표하는 류승범. 하긴 그가 영화를 신마다 꼼꼼히 분석하고, 명배우들의 연기 패턴을 수집하며 작품에 임해왔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색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도 “머리로 하는 생각보다는 몸에서 나오는 익숙함을 믿는다”고 할 만큼 차가운 뇌를 이용해 터득한 화법과는 거리가 먼 배우. 그래서 맹수의 새끼는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포식자가 되듯이 류승범의 동물적인 감각은 캐릭터를 펄떡거리게 했다.

류승범을 세상에 알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문제아 상환은 정말 낯설지만 익숙한, 묘한 출현이었다.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인상도 아니면서 익숙하게 느껴졌던 건, 동네 으슥한 골목 어딘가에서 몰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 것만 같은 류승범의 얼굴 때문이었다. 이후 드라마 <화려한 시절>이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품행제로>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불안하고 불량하지만 분명 악인은 아닌 캐릭터에 류승범은 적역이었고, 특유의 사랑스러움마저 부여했다. 명품을 좋아하는 마약 판매상(<사생결단>), 억울한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소년(<주먹이 운다>)에 이르기까지 그에게선 줄곧 주체할 수 없는 혈기, 청춘의 푸릇함 대신 아드레날린이 풍기는 육식동물의 에너지가 감지됐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연기의 흠결을 떠나 그가 거쳐 간 필름에 류승범이라는 새로운 인장을 찍었다.

류승범이 추천하는 영화들도 ‘도 아니면 모’인 그의 분신들처럼 당신에게 최고이거나 최악일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싱거운 중간은 없다. 뇌가 아닌 그의 심장 혹은 살갗에 아로 새겨 지울 수 없는 영화들은 다 제각각이지만 놀랍게도 류승범과 닮아 있다. 그래서 “가리봉동과 압구정을 아우르는 멋을 가진 브래드 피트”처럼 강력한 매력을 지닌 이 영화들이 “계속해서 생각나고, 그 때마다 다시 보게 되는” ‘류승범 현상’에 시달릴 지도 모른다.

1. <매트릭스>(The Matrix)
1999년 │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아마 제가 가장 많이 본 영화일 거예요. <매트릭스>에 담긴 거대한 철학을 깨닫진 못했지만 살면서 계속 곱씹게 되요.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알약을 주는 것처럼 저도 인생에서 계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까요. 기술적이나 장르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지만 그 외에도 숨은 의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원래 철학적이거나 멋진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걸 노리고 본 건 아니지만 (웃음)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 굉장히 크게 다가온 영화예요.”

당시 영화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액션 신과 특수 효과 등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던 <매트릭스>. 여기에 감독들은 영화 곳곳에 다양한 상징들을 배치해 두었다. 가상세계에 대한 선언이기도한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 이론과 모피어스, 트리니티, 네오 등 종교적 언어유희에 가까운 주인공 이름 등 볼수록 새로운 의미들이 튀어나오는 <매트릭스>는 21세기에 등장한 최고의 텍스트 중 하나라 할 만하다.

2.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
1991년 │ 레오 까락스

“제게 멜로의 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영화예요. 강렬한 첫 장면도 그렇고 영화에만 집중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죠. 어째서 좋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요. 최근에 다시 봤을 때는 전과는 다르게 단점 같은 게 눈에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흠들을 넘어서는 힘이 있어요. 그리고 드니 라방을 좋아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팬조차 배려하지 않는 그의 연기는 정말! 좋아하지만 보고 있으면 무시당하는 기분이죠. (웃음)”

최근 <도쿄!>에서 레오 까락스 감독과 드니 라방의 실망스러운 조합에 상처 받았던 관객이라면 다시금 <퐁네프의 연인들>을 찾아보길 권한다.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모두 잊게 될 만큼 보는 이를 멍하게 만드는 화학작용은 추와 미, 사랑과 증오의 기준마저 전복시킨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연인의 모습을 이보다 더 치열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3.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년 │ 데이빗 핀처

“브래드 피트가 단순한 미남 배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한 영화죠. 아마 남자라면 누구나 ‘나도 저런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했을 거예요. 영화 자체의 짜임새도, 이야기도 다 좋았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안의 자기를 잘 모르고 살아가는데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 곱씹게 만들죠. 사실 전 이 영화의 모든 게 다 좋았어요. 색감, 이야기, 구성, 연기 하다못해 제가 잘 모르는 편집이나 앵글 같은 것도 최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소심한 회사원과 카리스마 넘치는 타일러에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 이상의 조합이 있을까? 서로 의식과 무의식, 구속과 방종의 대척점에 서있는 주인공과 타일러는 상대의 육체를 훼손하는 것으로 새로운 나를 증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파괴의 끝에서 주인공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세븐> 이후 지속된 브래드 피트와 데이빗 핀처 감독의 앙상블 중에서도 브래드 피트의 악마적이고 섹시한 매력이 극대화되었던 작품.

4. <주먹이 운다>(Crying Fist)
2005년 │ 류승완

“쑥스럽지만 제 영화를 추천해도 될까요? 당시 개봉 때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이제라도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해요. (웃음) <주먹이 운다>를 시작할 때 감독님하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영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 에너지가 충전이 됐으면 좋겠다”고요. 이 안에서는 류승범의 연기가 어떻고 연출자의 의도가 어떻고, 이런 걸 떠나서 공짜로 주는 할인티켓을 받은 듯한 같은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가슴 찡한데 나쁘지 않은 느낌이랄까? 용기내서 한 추천이니까 많은 분들이 지금이라도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면 해요.”

퇴물 복서 태식(최민식)과 사고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간 상환(류승범)은 둘 다 복싱 신인왕전에서 우승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태식은 거리에서 인간 펀치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상환은 쓰러진 할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링 위에서 싸운다. 마침내 결승에서 맞붙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보면, 누구도 응원할 수 없으면서 둘 다 응원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절망과 등을 마주 댄 희망이 오아시스처럼 나타난다.

5. <도성타왕>(龍的傳人)
1990년 │ 이수현

“중학교 때부터 주성치의 팬이었어요. 요즘은 주성치가 상업적인 흐름에 맞춰서 영화를 너무 잘 만드니까 예전 특유의 느낌이 오히려 덜해진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막 미쳐버릴 거 같이 웃긴 주성치 영화의 매력이 살아 있어요. (웃음) 맨땅에 헤딩하는 웃음이랄까? 주성치의 영화를 보실 때는 반드시 경비해제를 하고 보시면 더 얻는 게 많아요. 그 사람의 웃음에 무슨 의미가 있나, 너무 저급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접어둬야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도시로 오게 된 소룡(주성치)은 우연한 기회에 당구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되고, 얼떨결에 당구 도박에 참가하게 된다. 주성치의 초기작인 <도성타왕>에서 그는 2대 8로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쿵푸에서 배운 무지막지한 점프와 함께 큐로 당구대를 찍어 누른다. 그 모습에 배가 아플 정도로 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당구장 주인아저씨 외에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용서는 없다>의 막바지 촬영 중이에요. 분량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작업이었어요. 머리를 많이 써야하는 캐릭터거든요. (웃음)” 대한민국 최고의 부검의(설경구)와 두뇌싸움을 벌이는 살인범 성호는 흡사 <유주얼 서스펙트>의 버벌을 연상시킨다. 착하고 온화한 인상에 다리를 저는 성호는 웃는 얼굴로 누구보다 사악한 살인을 저지르는 악의 화신이다. 그래서 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다 못해 몸이 먼저 나가는 쏜 화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온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도전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류승범은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간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성격” 탓에 쉬었던 DJ로 ‘2009 글로벌 개더링 코리아’에 초대된 것. “워낙 가고 싶었던 페스티벌이었어요. 프로디지와 같은 페스티벌에 서다니 정말 영광이었죠.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니까요. (웃음)” 오싹한 살인범의 미소와 흥에 겨워 DJ 부스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그루브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이 남자, 정말 류승범답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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