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가 무섭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발언은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에서 가장 충격적인 자기 고백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들을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살육하고, 현기증이 날 만큼 강렬한 ‘아르젠토 레드’로 스크린을 붉게 물들이는 그가 피를 무서워하다니. 다리오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상징이자 쿠엔틴 타란티노, 조지 로메로 등 장르영화의 대가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거장이기도 한다.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살인 미스터리 모티브의 대중소설 ‘지알로’에 토대를 둔 그의 영화들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걸작이라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호러영화의 새로운 문법을 써냈으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세계가 고이지 않고 변하기를 원하는 데뷔 40년차의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을 <10 아시아>가 만났다.

“신작 는 첫 영화 <수정 깃털의 새>처럼 현실로 회귀했다”

PIFF에서 처음으로 관객과 만난 <지알로>는 전작들과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극 도입부에서 여자가 혼자 비를 맞으며 겁에 질려 택시에 타는 건 <서스페리아>를 연상시키고, 다리오 아르젠토식 인테리어나 색감이 배제된 전체적인 분위기는 <수정깃털의 새>와 닮아있더라.
다리오 아르젠토:
나의 근본적인 스타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동안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좀 더 리얼리즘에 가까운 방법을 써보았다. 미국 제작사 측의 요구도 있었고 <지알로>는 현실적인 영화로 완성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색감을 사용한 반면에 <서스페리아>는 내 상상 속의 색깔을 사용했다. 는 나의 첫 영화인 <수정 깃털의 새>처럼 현실로 회귀하면서 이렇게 변한 것이다.

원래 <지알로>는 빈센트 갈로, 당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 레이 리오타 등이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애드리언 브로디와 엠마뉴엘 세이그너가 출연했다.
다리오 아르젠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지알로>를 준비하는 동안 레이 리오타는 LA에서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해외 촬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웃음) 또 아시아 아르젠토는 임신하는 바람에 촬영에 합류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애드리언 브로디를 캐스팅한 것에 굉장히 만족한다. 여주인공이었던 엠마뉴엘 세이그너 같은 경우는 친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추천으로 캐스팅하게 되었다.

평론가이자 각본가 출신이기도 한데, 데뷔 후 줄곧 본인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해왔다. 그러나 <지알로>는 그렇지 않은 최초의 영화다.
다리오 아르젠토:
원래 모든 영화의 시나리오는 직접 썼는데 처음으로 내가 쓰지 않은 각본을 영화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작업이었지만 내가 각본을 쓰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나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이기 때문에 글을 쓰고 연출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지알로>는 새로웠지만 시나리오는 내가 쓴 게 더 나은 것 같다. (웃음)

“물론 이번에도 에 나오는 살인마의 손은 나의 것”

전작들은 이야기의 전개나 구성보다는 미학적인 측면의 완성도가 더 높았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할 정도로 짜임새가 촘촘해졌는데, 본인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영향도 있나? (웃음)
다리오 아르젠토:
분명 그런 측면도 있다. (웃음) 그러나 리얼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순간 말이다. 애드리언 브로디가 자고 있는 엠마뉴엘 세이그너를 쳐다보는 장면을 보면, 그가 이 상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모습 같은 건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두 가지 장면을 가장 좋아하더라.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주목받는 젊은 감독들이 당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하는데, 특별히 아르젠토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었던 감독이나 작품이 있나?
다리오 아르젠토:
내 스타일이 느껴지는 감독이나 영화를 많이 발견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 쿠엔틴 타란티노, 로버트 로드리게즈 같은 감독들. 예를 들면 쿠엔틴 다란티노의 <그라인드 하우스> 첫 장면은 <수정깃털의 새>와 똑같은 음악을 사용하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찍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기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에서의 모방은 곧 현실을 모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 아닌가? 그냥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상의 이야기는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 결국 현실은 영화와도 같다.

당신의 모든 작품들에 등장하는 살인마의 손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하는 <지알로>에사도 당신의 신들린 손 연기를 볼 수 있나?
다리오 아르젠토:
첫 영화 <수정깃털의 새>는 너무 저예산이라 잠깐 등장하는 살인자 역할에 전문배유를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나섰지. (웃음) 물론 <지알로>에도 내 손을 볼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딸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건 흥미로운 일”

당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 또한 주목받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다리오 아르젠토: 처음에 아시아를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멋진 경험이었다. 자기 딸을 주인공으로 네 번이나 영화를 찍은 건 내가 처음일 거다. (웃음) 그래서 딸과 나 사이에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런 작업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열네 살부터 지금의 서른한 살에 이르기까지 카메라 앞에서 딸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녀의 특별한 연기 색깔만큼이나 아시아라는 이름 또한 특이하다.
다리오 아르젠토:
아시아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아시아 대륙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듣기에도 좋다.

지난 10일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실은 피를 무서워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많은 이들이 아르젠토 영화라고 하면 <서스페리아>나 <딥레드>처럼 핏빛 이미지가 강렬한 것을 떠올리는데 의외였다.
다리오 아르젠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현실에서의 나는 굉장히 젠틀하고, 매너도 좋고, 친구들과도 잘 지낸다. 그러나 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원래 나는 손이 긁혀 피가 조금만 나도 끔찍해 하지만 영화 속에선 얼마든지 피의 축제를 벌여도 괜찮다.

글. 부산=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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