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2>는 여고라는 공간에서 여고생끼리 느끼는 동성애의 미묘한 긴장을 화면에 담아낸 연출만으로도 수작이라 할 만 하지만 한국에선 쉽게 보기 어려웠던 소재를 풀어냈다는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김태용 감독과 <여고괴담 2>를 공동 연출했던 민규동 감독의 신작 <끝과 시작>은 아마 <여고괴담 2>이 문을 열었으되 누구도 걷지 못한 길을 스스로 걸으며 가장 멀리 나아간 작품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자신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던 후배와 동거하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욕망을 느끼는 모습을 담은 영화 <끝과 시작>이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파격성 때문일 것이다. 10월 11일에 진행된 <끝과 시작> 갈라 프레젠테이션 기자회견은 그 파격적 시도에 참여한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상용 프로그래머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기자회견에는 민규동 감독과 주연을 맡은 엄정화, 김효진이 참석했다.

<오감도>의 단편이었을 때의 시적인 느낌도 좋았는데 굳이 그걸 소설처럼 긴 장편으로 갈 이유가 있었나.
민규동
: ‘굳이’라기보다는 처음 구상했던 이야기가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 장편의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그걸 다시 어떻게 압축할까 고민하면서 영화를 찍었고 그러면서 배우의 연기나 이런 것들이 온전히 살아나려면 이야기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여태 영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시나리오에 있는 신 중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영화에 반영한 것 같다. 그렇게 나만의 판단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파격적인 이야기인 만큼 캐스팅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텐데.
민규동
: 그래서 전혀 모르는 배우와 작업하는 게 어떨까 고민했고, 그 고민 때문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익숙한 배우와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엄정화와 김효진에게 전화를 걸어 우기듯 작품에 모셔왔다. 원래 계획은 6일 동안 촬영을 끝내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8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물리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정인데 그간 같이 작업하며 쌓은 신뢰가 소통에 큰 도움이 됐다. 같이 놀이터에 모여서 중독되어 하다보니까 짧은 기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배우에게 어떤 걸 기대했던 건가.
민규동
: 재인은 좋아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과 그 이면의 배신감을 놓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엄정화는 굉장히 밝고 가벼운 작품부터 진지한 작품을 폭넓게 오가는 배우이고, 나와 작업할 땐 밝은 인물을 했기 때문에 다른 느낌으로 가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과감한 장면들에 있어선 이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어린 친구가 옆에 있으니 잘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배우에게 남긴 거지. (웃음) 그리고 김효진은 <여고괴담 2> 오디션에서 봤었다. 그 때 말없이 어떤 아우라를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작업에선 촬영 3일 전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나루라는 인물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 왔기 때문에 익숙한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본인 역시 캐릭터에 중독이 되어서 촬영이 끝나는 걸 아쉬워할 정도였다.

감독도 감독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배우들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했나.
엄정화
: 마침 <인사동 스캔들>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연락을 줬다.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봤느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웃음) 같이 작업하자고 하더라. 마침 단편을 꼭 해보고 싶었던 터라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결정하고 4일 지나 바로 촬영에 들어가서 시간은 부족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김효진 : ‘텔레시네마’ 2부작을 촬영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다가 <오감도>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고 민규동 감독님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읽어 봤는데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합류했다.

서로에 대한 욕망을 느끼고 실제적인 행위를 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엄정화
: 우선 감독님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감정이 우러나야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우리가 이런 감정을 얼마만큼 표현할 수 있을지가 더 고민이었다. 물론 행위적인 면도 시나리오를 볼 때나 찍을 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키스신이나 엔딩 장면이 상당히 어려웠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에선 내가 리드를 당하는 느낌이어야 하는데 효진 씨가 가냘픈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느끼며 촬영해서 효진 씨에겐 조금 미안하다. 어쨌든 특별한 경험이었고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김효진 : 시간이 촉박해서 심리적 부담감이 있었는데 나루를 이해하고 그 감정을 따라가면서 마음이 많이 열렸다. 내가 어떻게 나루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지만 생각하며 지내서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님과 엄정화 선배가 많이 배려해줘서 편하게 찍을 수 있었다. 황정민 선배와 찍을 땐 엄정화 선배가 모니터도 해줬다.

영화가 짧은 만큼 인물의 특징을 살리는 설정들이 필요했을 것 같다.
김효진
: 일단 목 뒤와 발등에 도마뱀 문신을 했다. 신비롭고 사랑에 있어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담쟁이덩굴 같은 인물이라 녹색 매니큐어를 칠했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물이라 의상은 이것저것 껴입은 느낌으로 입었다. 정돈되지 않고, 정착되지 않는 캐릭터의 느낌을 살리려고. 머리도 원래 긴 머리였는데 마구잡이로 자른 느낌으로 바꿨다.
엄정화 : 나는 편안한 느낌으로 톤을 잡았다. 튀지 않게 배경과 어울리는 톤으로 잡았고, 슬픔에 짓눌린 모습을 많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에로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 각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듣고 싶다.
민규동
: 에로스는 관능적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에서 딱 붙는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여자의 허벅지 클로즈업이나, 국수를 들고 걸을 때 골반의 작은 흔들림처럼, 살색을 노출하지 않고도 프레임 안에서 익숙하지 않게 욕망을 자극하는 그런 이미지다.
엄정화 : 내가 느끼는 에로스는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것이 떠오른다.
김효진 : 영화를 찍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판타지고 하나는 죽음, 그러니까 타나토스였다. 농축되어서 치명적이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에로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글. 부산=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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