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외모의 어떤 특성이 배우 자체를 규정하는 기호가 될 때가 있다. 장동건의 얼굴이 그렇고, 권상우의 몸이 그런 것처럼. 최강희의 동안 역시 마찬가지다. 1995년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로 데뷔한 이후, 법적 성인인 스무 살이 되어 청소년 드라마 <나>의 방송부원을 연기할 때도, 2년 후 <학교>에 출연했을 때도 그녀는 학생의 신분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것이 어색한 적은 없다. 오히려 늙어서 추해진 장동건이나 배 나온 권상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이 먹은 최강희를 예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연기했던 <여고괴담>의 재이처럼 최강희는 몇 년이 지나도 같은 모습으로 교복을 입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2009년 지금, 그녀는 영화 <애자>에서 ‘19살 돌아이 애자’를 연기하며 다시 교복을 입었다. 역시나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가 데뷔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자리 그대로였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동시에 ‘29살에도 여전히 돌아이인 애자’까지 연기한다. 말하자면 <애자>는 그녀가 지금껏 조금씩 쌓아온 지난 시간이 한 번에 드러나는 영화다. 그 시간동안 그녀는 교복을 벗고 전문대 광고학과에 진학해(<광끼>) 의리 넘치는 초등학교 담임선생(<단팥빵>)이 되어 풀리지 않는 사랑에 고민하기도 하고 심지어 노처녀 딱지를 붙인 채 연하남과 연애(<달콤한 나의 도시>)를 했다. 다만 그녀의 성장이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가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의 민재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자>는 결국 최강희를 위한 영화다. 단순히 서른이 넘어서도 19살 여고생 역할이 어울리는 동안을 증명해서가 아니다. 그녀에게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누적되는 것이고, 때문에 19살 애자와 29살 애자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다. <애자>는 그 누적, 즉 성장의 과정을 그대로 스크린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인 셈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인공의 성장을 담은 영화의 추천을 부탁했다. 다음 5편의 작품은 애자처럼, 혹은 최강희 본인처럼 시간 속에서 성장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 <노이 알비노이> (Noi Albinoi)
2003년 │ 다구르 카리

“자기만 알고 남에겐 잘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보물 같은 영화가 있잖아요? <노이 알비노이>가 제겐 그런 영화예요. 노이라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딱 성장영화라는 분류가 어울리는 작품이죠. 모든 게 눈으로 뒤덮인 아이슬란드의 어떤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노이는 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해요. 그걸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집에서 삽으로 눈밭에 길을 내며 걷다가 만화경으로 하와이의 풍경을 보는 노이의 모습이죠. 말하자면 도피처인 셈이에요. 지금 있는 이곳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반항해 보지만 그게 또 아주 멋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면에서 아이슬란드 판 <애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춘기의 반항이 일생을 통틀어 커다란 의미를 갖는 건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찾는 어른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이 알비노이>의 노이가 가지고 있는 탈출 욕구도 마찬가지다. 선천성 색소 결핍증을 가지고 있어 남쪽의 뜨거운 태양을 만나면 안 되는 그가 하와이를 꿈꾸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거부하는 건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반항심이야말로 청춘의 가장 큰 특권이지 않을까. 아이슬란드 특유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영화가 보편적 공감 역시 획득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반항심 때문일 것이다.

2. <귀향> (Volver)
2006년 │ 페드로 알모도바르

“딸에게 당당하지 못한 엄마와 엄마처럼 살지는 않겠다던 딸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에요. <오픈 유어 아이즈>나 <바닐라 스카이>에서 신비로운 이미지로 나오던 페넬로페 크루즈가 이 영화에선 굉장히 드센 성격의 딸로 나오는데 연기가 정말 볼만해요. 개인적으로 그런 순간을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던 배우가 좋아지는 그런 순간.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라이문다가 엄마를 이해하며 성장한 이야기인 동시에 페넬로페가 한 사람의 배우로서 성장한 경우일 수 있겠네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제작노트에서 “나 자신의 근본이자 삶의 원류인 모성으로 돌아왔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을 성폭행한 아버지의 딸을 낳고도 꿋꿋하게 사는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와 그런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 죄책감을 지닌 엄마 이렌느(카르멘 마우라)가 화해하는 과정은 감독의 말처럼 모든 잘잘못을 떠나 상대방을 받아들여주는 거대한 원류와도 같다. 칸 역시 그 거대한 흐름을 인정하듯 영화의 중심을 잡아준 6명의 여성 연기자 모두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3. <나는, 인어공주> (The Mermaid, Rusalka)
2007년 │ 안나 멜리키안

“이것도 아끼고 있던 걸 깨내는 기분으로 소개하는 영화예요. 마니아 취향이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동화 <인어공주>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러시아 영화인데 상당히 트렌디한 느낌이에요. 여자 주인공의 머리카락도 초록색이고, 옷도 마치 아오이 유우처럼 입어요. 이 주인공이 말하자면 인어공주인 셈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말을 안 해요. 마치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그러다 왕자님과도 같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녀의 좀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볼 수 있죠.”

<인어공주>는 사실 꿈 많은 어린 시절에 읽기엔 너무 우울한 이야기다.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희생한 그녀가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내용이라니. <나는, 인어공주> 역시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알리사는 다른 남자를 만나는 어머니를 보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도시에서 자신만의 왕자를 만나 다시 입을 열고 그를 돕는다. 하지만 인어공주처럼 그녀 역시 그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다. 조금 우울한 결말이지만 그 성장의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면 얼마든지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성장영화다.

4. <가족> (A Family)
2004년 │ 이정철

“<애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캐릭터의 감을 잡으려고 일부러 찾아서 본 영화에요. 애자처럼 이 영화 속의 수애 씨도 고분고분한 캐릭터는 아니었잖아요. 수애 씨의 변신이었던 셈인데 전과 4범의 소매치기 역할을 굉장히 잘 소화했어요. 반항적이다 못해 거칠기까지 한 그런 모습. 아버지를 항상 원망하며 살던 그녀가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가족의 사랑은 성장의 중요한 계기인 것 같아요.”

요컨대 신파의 힘은 얼마나 새롭고 신선하느냐가 아닌, 익숙한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부모와 자식이 갈등하고, 사실은 자식을 엄청 사랑하는 부모의 정을 깨닫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의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무뚝뚝하고 강한 척 하던 아버지(주현)가 가족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장면 등을 통해 이 영화는 제법 뚝심 있게 주제의식을 밀어붙이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5.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Sisters On The Road)
2008년 │ 부지영

“신민아 씨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 무대 인사 있을 때 보러 가고 싶었는데 나름 연기자 체면도 있고 해서 그냥 따로 봤던 영화에요. (웃음) 그런데 정말 이 영화에서의 신민아 씨 연기는 진짜 인상 깊어서 따로 미니 홈피에 올리기도 했어요. 배우가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는다는 느낌? 아버지가 다른 자매인 신민아 씨와 공효진 씨가 신민아 씨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서로 한 단계씩 성숙해지는 내용이에요. 전형적인 로드무비 같으면서도 정말 장난 아닌 반전이 있어요. 돈 안 들이면서도 충격적인 반전. 스포일러는 꼭 피하고 영화를 봐야 할 거에요.”

아버지가 다른 명은(신민아)과 명주(공효진)는 외모도 성격도 딴판인 자매다. 그런 둘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의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일종의 성장여행을 그린 영화다. 성장이라고 했지만 그 과정이 가시적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툴툴거리는 소소한 다툼 안에서, 어떤 풍경의 공유 안에서 조금씩 둘은 소통을 시도하며 멀고도 가까운 가족이란 이름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잘 안 되면 그 때 가서 다시 생각해야겠지만 잘 되면 굉장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영화” <애자>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최강희는 이렇게 표현했다. <달콤한 나의 도시> 이후 연기를 그만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 평소 연기하던 역할과는 달리 입에 육두문자를 달고 다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고선 그녀는 “욕을 먹던 칭찬을 듣던 한 번 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변신을 선택했다.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연기하던 그녀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입는 경험을 했다. 그것이 성공했는지는 평가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익숙한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험을 통해 최강희라는 배우는 한 층 더 성숙해질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강희의 성장판은 변함없는 외모처럼 아직도 말랑말랑하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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