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보다 경제적 효율이 능사인 이 시대에도 꿈꾸는 청춘이 있는 것처럼 남존여비, 천출과 양반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MBC <탐나는도다>의 물질하기 싫은 해녀 버진(서우)은 윌리엄(황찬빈)과 박규(임주환)를 만나면서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탐나는도다>에게 허락된 시간은 홈드라마가 대세를 쥐고 있는 주말 저녁 8시. 그리하여 시청률은 한 자릿수를 맴돌고, 제대로 된 평가를 찾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설상가상 16부작으로 종영된다는 뉴스까지 들려오는 지금, 더 늦기 전에 <10 아시아> 강명석, 윤희성 기자가 한라봉보다 싱그러운 청춘들이 사는 그 섬을 방문했다. /편집자주

금발의 이양인은 바다의 시대에 산다. 한양의 양반은 쇄국의 시대에 산다. 제주도의 처녀는 쇄국의 나라에 진상품을 바치는 탐라의 시대에 산다. 동시대의 세 청춘. 그러나 각자 다르게 흘러가던 시간. MBC <탐나는도다>에서 탐라는, 세 청춘의 시간이 하나로 동조하는 공간이다. 남몰래 왕의 어명을 수행해야 하는 귀양다리 박규(임주환)도, 드라마 시작 10여분만에 바다를 건너온 이양인 윌리엄(황찬빈)도, 탐라에서는 버진(서우)의 시간을 따라간다.
용변을 볼 방법을 찾는데 한나절. 전복을 캐는데 한나절. 그 사이 사람들에게 구박받던 ‘귀양다리’는 어느덧 버진의 어머니(김미경)와 술잔을 나누고, 이양인은 탐라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탐라의 느릿한 시간은 처녀의 마음을 갑갑하게 하지만, 탐라에 첫 발을 디딘 모든 사람들을 그 곳의 일부로 만든다. 더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탐라의 빛나는 햇빛을, 손으로 쥐면 녹색 빛이 베어 나올 것 같은 농장을, 그리고 청춘 남녀의 얼굴에 은은한 연모의 빛을 감돌게 하는 탐라의 푸른 밤을 보게 된다.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시간이 흐르는 탐라

밀집된 이야기가 아닌 시간의 여유로운 흐름을, 배우의 클로즈업 대신 그들 뒤의 사람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풀샷을 보여주는 드라마. 그러나 탐라의 더디고 아름다운 시간은 탐라가 쇄국의 시대에 가장 폐쇄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버진이 해녀인 것은 탐라 밖으로 나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탐라 백성들이 매일의 삶을 반복하는 것은 끊임없는 진상에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탐라의 많은 사람들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박규는 귀양다리 행세를 하며 탐라의 진상품 도둑을 추적하고, 처음엔 음험해 보였던 이방(조승연)은 사실 강직한 사람이었으며, 탐라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제사장(박웅)은 뒤에서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윌리엄이 탐라 주민에게 커피를 서비스할 때 쯤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시간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낮의 풍경이 많이 등장하던 드라마는 어느덧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미스터리 활극을 벌이는 밤을 더 많이 보여주고,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을 한참 보여주던 여유로운 호흡은 세 청춘이 서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급박함으로 바뀐다. 바다의 시대에서 온 이방인들과 쇄국의 시대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탐라에 새로운 속도의 시간을, 그리고 더 이상 평온할 수만은 없는 삶을 가져다 줄 것이다. 윌리암은 서울로 압송될 것이고, 평민 해녀 버진은 이양인과 조선 최고의 엘리트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딘 시간 속에서 아름다웠던 탐라의 정경과, 그 정경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피어 오른 그들의 로맨스가 쇄국의 문이 열린 시대에 휘말리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허무맹랑 로맨스가 아닌 ‘진짜’ 연애담

<탐나는도다>는 24부작 기준으로 1/3에 달하는 시간을 들여 시청자들이 탐라 사람들과 같은 기억, 같은 시간의 호흡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탐나는도다>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한다. 마치 풋풋한 시절의 황인뢰 감독이 만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체험으로 드라마를 시청자에게 동화시킨다. 버진의 연애담이 사랑스러워졌다면, 그건 그의 사랑이 ‘진짜’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더 빠르게,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드라마들의 시대에, <탐나는도다>는 다른 시간을 가지고 나타나 이야기 대신 호흡과 영상이 작품을 꾸준히 따라가는 시청자에게 강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체험을 안겨준다. 그래서 <탐나는도다>가 16부로 종영되는 것은 쇄국의 시대만큼 비극적인 일이다. 지금까지 안단테에서 모데라토로 서서히 호흡을 끌어올린 이 드라마는, 전체 분량의 1/3이 날아가면서 그 유려한 호흡도, 호흡 속에서 자연스럽게 넓혀갈 수 있엇던 이야기의 폭도 일정부분 포기하게 됐다. 물론, 그것이 <탐나는도다>에 대한 이 시대의 대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닥친 절망일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는 탐라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글 강명석

신분을 숨긴 광해군, 세계를 무대로 하는 서린 상단의 등장으로 장르적 혼용을 꾀하고 있지만, 여전히 MBC <탐나는도다>의 가장 중요한 축은 버진을 둘러싼 로맨스에 있다. 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가장 열광할 때는 박규(임주환)가 버진(서우)에게 “그놈에게 가는 것, 내가 싫단 말이다”하고 속내를 드러내거나 윌리엄이 버진을 두고 “나의 보물”이라고 말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탐나는도다>의 로맨스는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청춘 로맨스물보다도 빈약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8회 방송 만에 윌리엄은 버진에게 키스를 시도했고, 박규는 버진과 입을 맞췄다. 전자는 불발되었고, 후자는 그 상황을 조금 머쓱해 하는 버진의 반응 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심심하고 느릿한 전개야말로 <탐나는도다>의 로맨스가 갖는 강점이다.

약자이나 수동적이지 않은 여주인공

천천히, 그러나 촘촘히 들여다 본 로맨스에는 대단치 않은 장면들이 포진해 있다. 양반 댁 도련님인 박규는 신분상승을 시켜주는 대신 밤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도포자락을 쥐여 주거나 떡을 먹는 입가를 닦아 준다. 외국인인 윌리엄은 전용기로 해외여행을 시켜주기는커녕 신분 탈출에 대한 불투명한 희망만 심어줄 뿐이다. 이는 물량과 규모로 로맨스조차 압도적인 이벤트로 만들고자 했던 기존의 드라마 화법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말하자면 그동안 판타지에 대한 오해 덕분에 생략되었던 로맨스의 기초단계가 충실히 묘사된 것인데, 이것은 이 드라마가 지극히 여성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은 탐라라는 공간의 힘에서 비롯된다.

탐라에서 “물질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고, 몸도 비실비실한” 버진은 상대적 약자이자 박탈자다. 생활력이 강한 끝분이 최고 미녀로 대접을 받는 이곳의 법칙에서 남성의 판타지에 기인한 연약하고 청순한 여성은 낙오자에 불과하다. 대신 버진은 태생적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그 세계를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버진을 “작은 인어”에 비유하는 윌리엄의 말은 다만 그녀의 모습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탈출에 대한 의지가 충천한 ‘인어 공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욕망은 행동의 원동력이고, 그래서 버진은 비록 약자일지언정 수동적인 인물은 아니다. 반면 이 세계로 초대된 두 남자는 뭍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의 권력을 잃는다. 덕분에 그동안 삼각관계의 중심이되, 주도자가 될 수 없었던 여자 주인공은 <탐나는도다>에 이르러 관계를 장악하고 선택을 결정하게 되었다.

버진은 여왕 못지않은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예컨대, 만화를 원작으로 하면서 소녀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로맨스 드라마인 MBC <궁>이나 KBS <꽃보다 남자>에서 여자 주인공은 초대자였다. 남성의 세계에 들어간 그녀들은 생명력을 바탕으로 개척을 해나가는 대신 좌충우돌하며 두 세계의 타협지점을 만들어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제 세상으로 두 남자를 초대한 버진은 오히려 위기에 처한 남자들을 구하고,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돕는다. 심지어 남자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그녀는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완성된 모성을 갖춘 우월한 인물이기까지 하다. 그녀의 주도권은 탐라의 환경적 토대위에서 더욱 공고해 진다. 박규에게 “버진이가 너한테 책임질 일 했냐”고 추궁하는 버진 어멍의 말은 남녀 관계의 키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져 있다는 탐라의 법칙을 공공연히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탐나는도다>가 진정 탐나는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남은 절반이 중요하다. 여성의 공간인 탐라를 벗어난 버진이 특유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선택되는’ 여주인공의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전반부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게 된다. 악인으로 그려지는 상단 대표 서린(이승민)이나 한양의 권력으로 등장한 박규의 어머니 등 앞으로 버진과 대립할 주요 인물들이 여성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개가 기대되지만, 한편으로는 탐라를 벗어나 권력을 회복하게 될 두 남자 사이에서 버진의 역할이 변모하는 과정에 대한 염려 역시 배제할 수 없다. 탐라의 한계 뿐 아니라 드라마의 구태의연한 공식까지 돌파해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버진은 왕권을 놓고 싸우는 신라시대의 여장부들 못지않은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윤희성

글. 강명석 (two@10asia.co.kr)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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