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배우 현빈과 송혜교는 공개적으로 열애 사실을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이들은 아마도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연기한 지오와 준영을 떠올렸을 것이다. 고민하고 싸우고 울고 헤어졌다가도 다시 힘을 내어 사랑하던 그들, 어쩌면 이 작품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결과는 누군가와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인지도 모른다. 열대야가 계속되던 어느 밤, <그들이 사는 세상>을 다시 보다가 노희경 작가의 근황이 궁금해진 것은 그래서였다.

“여름이라 체력을 기르면서 좀 쉬고 있어요.” 전신에 불필요한 지방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것처럼 부피감이 느껴지지 않는 체구의 노희경 작가는 요즘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집 뒷산을 오르며 건강을 추스른다. 그러나 드라마를 쓰지 않을 때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느낀 것들을 매일 적는 습관은 여전하다. “상상력을 키우고 아이디어를 만드는 일을 쉬어서는 안 돼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글쓰기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면 안 되거든요. 적어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매일, 10년 이상은 그렇게 하는 게 필요해요. 10년 지나고 나면 가끔 하루는 쉬어도 돼요. 하하”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드라마 가운데서도 그의 작품을 볼 때 우리가 조금 더 마음을 정돈하게 되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 바로 그 성실성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드라마’가 될 법한 작품들을 써 왔던 노희경 작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물었다. “막장 드라마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좋은 드라마는 세상에 있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외면하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요.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왜 부모에게 실망하는지, 형제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생기는지, 사랑하지만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 작가가 대충 ‘바르지’ 않고 진짜 인생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잊혀지지 않고 또 보고 싶고, 때로는 캐릭터를 흠모하게 되기도 하구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더 열기를 띤 목소리로 ‘내가 살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드라마’에 대해 들려주었다.

NBC
1994~2009년
미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는데 재작년에 표민수 감독 집에 놀러갔을 때 시즌 1, 2 DVD를 빌려 보고 반해서 사 모았어요. <그들이 사는 세상> 대본을 쓰면서 저녁마다 을 한 편씩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닥터 로스 역을 했던 조지 클루니가 시즌 5에서 빠지는 에피소드를 보는 순간 DVD 케이스를 집어던지면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 없이 다음 시즌이 나와?’라고 화를 냈을 정도로, 하하. 정말 최고의 남자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시즌 9에서 닥터 그린이 죽은 이후로는 너무 상처를 받아서 못 보고 있어요. 나중에 기사를 보니까 제작진도 제작비에 쪼들리고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던데,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인 것 같아요.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나 구성에 있어서의 다양한 시도까지, 정말 숭배하게 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에요.

SBS <인생>
1995년 극본 김수현, 연출 곽영범

우리나라 드라마에선 거의 처음으로 치매에 대해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 우리 정서에서는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면 가족이 다 끌어안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병으로 인식하거나 병원에 모시려고 하는 건 불효막심한 일로 받아들이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치매 환자 때문에 가족이 얼마나 힘든지를 조명했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도 제시했어요. 마지막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전문 병원에 모시면서 끝이 났죠. 김수현 선생님 작품 중에서 특히 특집극을 좋아하는데, KBS <홍소장의 가을>이나 <혼수>도 그랬듯 가장 한국적이고 현재적인 문제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드라마로 설득을 시키고 지혜를 줄 수 있을까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MBC <그대 그리고 나>
1997년 연출 최종수 극본 김정수

지금까지 본 어떤 가족극 보다 뛰어난 가족극의 정서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김정수 선생님은 여수가 고향이신데 <전원일기>에서 농촌의 서정성을 그리셨다면 이 작품에서는 바닷가 사람들의 정서를 깊게 그려내신 게 참 좋았어요. 요즘 작가들은 대부분 서울 사람들이라 ‘고향’의 정서 같은 걸 보기가 힘들거든요. 송승헌 같은 젊은 연기자가 처음으로 잘생긴 남자를 넘어 배우로 보이기 시작했고, 최불암 씨나 박원숙 씨 같은 중견 배우들이 처음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단순히 멜로나 가족극이라는 틀을 넘어 9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의 변화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까지 같이 느끼게 하면서, <전원일기> 이후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공감대를 가장 많이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남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연애를 못하는 건 너무 재서 그런 것 같아요”

“천천히 준비하고 있어요. 남보다 모자란 게 많으니까. 하하” 내년 5월, 혹은 여름 이후 방송을 생각하고 있다는 노희경 작가의 다음 작품은 연애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연애에 대해 좀 더 직접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했지만 연애는 사실 우리가 얼마나 비열하고 치사한지를 깨닫게 하는 면이 있는데 그런 문제들을 한 번 보고 싶어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에세이로 사랑에 심드렁했던 많은 이들의 심장을 쿡쿡 찌르기도 했던 그에게 ‘연애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너무 재서 그런 것 같아요.” 곧바로 냉철한 답변이 돌아온다. “대신 연애를 못해 본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 일은 다 대가가 있는 거니까 외로운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하하. 하지만 어릴 때 멋모르고 상처받고 상처주고 모욕당하고 대가를 치르다보면 그로 인한 지혜가 생겨요. 그러니까 다들 훈련을 해 보면 좋겠어요. 의 조지 클루니도 그랬다니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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