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MBC <베토벤 바이러스>를 마친 이재규 감독은 훌쩍 여행을 떠났다. 부인과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짜리 아이들과 함께였다. “뉴질랜드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동네였는데 마당에 나가면 거의 매일 밤 은하수가 보였어요.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과일 먹으면서 별 보고, 애들에게 별자리 얘기 해 주니까 좋아하더라구요.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시험 잘 봤다고 옛날 화신 백화점 아케이드에 데리고 가서 천체 망원경을 사주셔서 그걸로 별 보고 달 보고 그랬던 생각이 났어요. 천국이었죠.” 여전히 조금은 그리운 듯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석 달 만에 돌아온 그는 덧붙였다. “서울은 살기 힘든데, 그래도 재미있죠.”
MBC <다모>부터 SBS <패션 70s>, <베토벤 바이러스>까지 그동안 만드는 작품마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켜 ‘스타 감독’으로 불리는 이재규 감독이지만 사실 그가 따라다닌 것은 그저 ‘재미’인지도 모른다. “어릴 땐 축구가 재밌어서 매일 축구만 했고, 중학교 때 공부 좀 하다가 고등학교 가서는 많이 놀러 다녔어요. 어머니가 도서관으로 저녁 도시락 싸 갖고 오시면 받아먹고 2천원에 음료권 끊어주는 디스코텍 갔다가 도서관 끝날 시간에 집에 가길 반복했죠. 춤추는 게 좋았거든요. 처음엔 논만큼 밤새 공부를 해서 메웠는데 몇 달 지나니까 무너지더라구요. (웃음)”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날도 많았다. 선정적인 영화와 괜찮은 영화가 뒤섞여 상영되던 시기였다. 그 때 건진 것들이 <베티 블루>, <와일드 오키드>, <나인 하프 위크> 같은 작품들이었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소년은 신문학과를 거쳐 방송사에 입사했다.
MBC 드라마 국에서도 엄하고 일 잘 하기로 이름난 장두익, 이승렬, 안판석 감독 밑에서 일했던 조연출 시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는 그는 2003년 신인연출가로는 드물게 미니시리즈인 <다모>로 입봉했다. 그 후 매번 대중의 시선과 기대를 모으는 작품들을 내놓았던 이재규 감독이 지난해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들면서 배운 것은 이렇다. “옛날보다 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사는 모습에 귀와 마음을 열게 됐어요. 아집에서 조금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연출자로서 주관이 좀 흐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라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그에게서는 좀처럼 성장을 멈추거나 노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덧 불혹을 맞았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이재규 감독이 고른 ‘나를 꿈꾸게 해 준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MBC <여명의 눈동자>
1991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만들어 준 드라마에요. 대학교 1학년 때쯤 본 작품인데 그 전까지는 제가 생각하는 세계가 대부분 영화였지 드라마는 그냥 흘러가는 농담이나 가십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드라마가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는 드라마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던 시절이었는데 1회를 보고 친구와 술 마시면서 한참 작품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화면이 주는 매력이나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 하고자 하는 얘기 같은 것들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고 급기야는 나도 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거죠”
日 <하얀 거탑>(白い巨塔) 후지TV
2003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드라마에요. 작품을 보게 된 건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들기 한참 전, 의학 드라마를 준비하던 때였어요. 수많은 의학 드라마들을 추천받아서 쌓아놨다가 무작정 하나를 선택해 보기 시작했는데 그대로 작업실에서 밤을 새웠어요. 저를 비롯한 또래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을 제대로 담은 작품이라 그렇게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날 이후 인생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지요.”
美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 Sci Fi
2003~2009년
“죽기 전에 이런 드라마를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드라마에요. <베토벤 바이러스>를 함께 했던 홍진아 작가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매 회 ‘인간이라는 종족이 얼마나 한심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줘요. (웃음) 정치, 법, 가족, 종교, 신 등 우리가 고민하는 모든 것들을 살짝살짝 이야기하고 고민의 깊이가 계속 느껴져요. 그리고 그 깊이에 비해서는 오히려 그냥 편안하게 즐기면서 봐도 좋고, 열심히 행간을 읽으려고 애쓰면서 봐도 좋은 드라마에요. 여러 가지로 부러운 작품인데 저도 언젠가는 이렇게 논쟁적인,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도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장르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연히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
요즘 약 5,6년 만에 모처럼 다양한 작품을 보고 읽으며 지낸다는 이재규 감독은 아직 다음 연출작을 결정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좋은 대본이나 원작, 작가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판타지적 요소가 담긴 소설을 하나 소개받아 조만간 영화를 위한 기초 대본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오랜 꿈이었던 연극 연출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 다음 번 이재규 감독을 만나게 될 무대가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르불문, 그의 작품에 대한 막연한 기대의 근원에 대한 힌트는 있다. “예전에 만드는 작품들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였을까, 과연 내가 무엇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자뻑’할 때도 있고 한없이 우울해질 때도 있는데 누가 저더러 그러시더라구요. 스태프, 배우처럼 제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TV를 보는 사람들이 같이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MBC <다모>부터 SBS <패션 70s>, <베토벤 바이러스>까지 그동안 만드는 작품마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켜 ‘스타 감독’으로 불리는 이재규 감독이지만 사실 그가 따라다닌 것은 그저 ‘재미’인지도 모른다. “어릴 땐 축구가 재밌어서 매일 축구만 했고, 중학교 때 공부 좀 하다가 고등학교 가서는 많이 놀러 다녔어요. 어머니가 도서관으로 저녁 도시락 싸 갖고 오시면 받아먹고 2천원에 음료권 끊어주는 디스코텍 갔다가 도서관 끝날 시간에 집에 가길 반복했죠. 춤추는 게 좋았거든요. 처음엔 논만큼 밤새 공부를 해서 메웠는데 몇 달 지나니까 무너지더라구요. (웃음)”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날도 많았다. 선정적인 영화와 괜찮은 영화가 뒤섞여 상영되던 시기였다. 그 때 건진 것들이 <베티 블루>, <와일드 오키드>, <나인 하프 위크> 같은 작품들이었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소년은 신문학과를 거쳐 방송사에 입사했다.
MBC 드라마 국에서도 엄하고 일 잘 하기로 이름난 장두익, 이승렬, 안판석 감독 밑에서 일했던 조연출 시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는 그는 2003년 신인연출가로는 드물게 미니시리즈인 <다모>로 입봉했다. 그 후 매번 대중의 시선과 기대를 모으는 작품들을 내놓았던 이재규 감독이 지난해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들면서 배운 것은 이렇다. “옛날보다 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사는 모습에 귀와 마음을 열게 됐어요. 아집에서 조금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연출자로서 주관이 좀 흐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라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그에게서는 좀처럼 성장을 멈추거나 노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덧 불혹을 맞았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이재규 감독이 고른 ‘나를 꿈꾸게 해 준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MBC <여명의 눈동자>
1991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만들어 준 드라마에요. 대학교 1학년 때쯤 본 작품인데 그 전까지는 제가 생각하는 세계가 대부분 영화였지 드라마는 그냥 흘러가는 농담이나 가십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드라마가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는 드라마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던 시절이었는데 1회를 보고 친구와 술 마시면서 한참 작품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화면이 주는 매력이나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 하고자 하는 얘기 같은 것들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고 급기야는 나도 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거죠”
日 <하얀 거탑>(白い巨塔) 후지TV
2003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드라마에요. 작품을 보게 된 건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들기 한참 전, 의학 드라마를 준비하던 때였어요. 수많은 의학 드라마들을 추천받아서 쌓아놨다가 무작정 하나를 선택해 보기 시작했는데 그대로 작업실에서 밤을 새웠어요. 저를 비롯한 또래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을 제대로 담은 작품이라 그렇게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날 이후 인생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지요.”
美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 Sci Fi
2003~2009년
“죽기 전에 이런 드라마를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드라마에요. <베토벤 바이러스>를 함께 했던 홍진아 작가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매 회 ‘인간이라는 종족이 얼마나 한심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줘요. (웃음) 정치, 법, 가족, 종교, 신 등 우리가 고민하는 모든 것들을 살짝살짝 이야기하고 고민의 깊이가 계속 느껴져요. 그리고 그 깊이에 비해서는 오히려 그냥 편안하게 즐기면서 봐도 좋고, 열심히 행간을 읽으려고 애쓰면서 봐도 좋은 드라마에요. 여러 가지로 부러운 작품인데 저도 언젠가는 이렇게 논쟁적인,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도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장르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연히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
요즘 약 5,6년 만에 모처럼 다양한 작품을 보고 읽으며 지낸다는 이재규 감독은 아직 다음 연출작을 결정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좋은 대본이나 원작, 작가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판타지적 요소가 담긴 소설을 하나 소개받아 조만간 영화를 위한 기초 대본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오랜 꿈이었던 연극 연출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 다음 번 이재규 감독을 만나게 될 무대가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르불문, 그의 작품에 대한 막연한 기대의 근원에 대한 힌트는 있다. “예전에 만드는 작품들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였을까, 과연 내가 무엇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자뻑’할 때도 있고 한없이 우울해질 때도 있는데 누가 저더러 그러시더라구요. 스태프, 배우처럼 제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TV를 보는 사람들이 같이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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