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좋아하던 소년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친구가 노트에 끼적끼적 적어 보여 준 시를 읽고 진지한 감상을 들려 준 뒤부터 두 소년은 ‘문학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넘사스럽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과 모여 기국서의 연극 <관객모독>을 함께 본 뒤로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연극, 영화, 문학에 대한 토론과 비평을 시작했고, 어느 날 문득 하나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다른 한 명이 대답했다. “만들면 되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8mm 필름 카메라와 조명 장비를 사고 <영화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공부한 끝에 이들이 완성한 22분짜리 단편 영화의 제목은 <게으름의 찬양>. 마치 한 편의 성장소설 같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감독과 <비트>의 김성수 감독, 故 진이정 시인, 그리고 안판석 감독이다.
1987년 MBC 입사 후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영화 <국경의 남쪽> 등을 연출했던 안판석 감독은 2007년 MBC <하얀 거탑>을 통해 드라마 연출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남성 취향의 이야기를 하나 하니까 비슷한 걸 기대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그래서 내가 정말 그런 걸 잘 하나 하고 자만해 있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닭살이 돋기도 했다. (웃음) 좀 어렸다면 그 비슷한 걸 찾아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 일 하는 사람 중에선 나도 나이를 좀 먹은 축이다 보니 그렇게 되진 않았다. 그래서 책 보고, 신문 읽고, 생각 좀 하며 지냈다.” 지난 2년의 시간에 대한 그의 회상이다.
올해로 연출 경력 만 22년, 인문학 교수를 연상시키는 차분한 풍모의 안판석 감독이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문학청년 그대로의 열정이 넘친다. “8,90년대에 좋은 드라마가 많았던 건, 그 당시 한창 일했던 감독과 작가들이 지금의 사람들보다 좀 더 인문학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 우리는 세계 명작이나 고전 소설, 철학서와 역사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고, 가난하던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 마이너 체험을 해 보았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글은, 모든 창조는 슬픈 마음에서 나온다. 슬플 때 자기를 뒤돌아보고 어떤 경험을 끌어내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 과거에 비해 기술이 발달하고 더 많은 자본이 들어왔지만 ‘작품’은 오히려 줄어든 한국 드라마의 현재에 대한 물음에 그가 답했다. 그렇다면 그가 보고 경험했던 한국 드라마의 르네상스기에는 어떤 작품들이 TV를 빛냈을까.
MBC <베스트셀러 극장> ‘겨울행’
1985년, 극본 유지형, 연출 최종수
“KBS에는이, MBC에는 <베스트셀러 극장>이 있었다. <베스트셀러 극장>은 소설 뿐 아니라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겨울행’은 한 소녀(김민희)가 엄마를 찾아 가다가 길에서 남자(강남길)를 만나 둘이 어딘가로 향해 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다. 샷의 힘이 돋보인 작품으로, 남발되지 않고 절제된 샷, 꼭 필요한 부분에만 들어가는 정교함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창작자가 되려면 많이 생각해야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영상은 곧 문학이고, 문학 안에 시, 소설, 드라마, 영화가 다 있다. <베스트셀러 극장>이 바로 그 좋은 본보기였다.”
MBC <마당 깊은 집>
1990년, 극본 박진숙, 연출 장수봉
“당시 미니시리즈는 8부작이었다. 지금의 16부작보다 훨씬 ‘미니’ 시리즈다웠고 작품의 밀도나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마당 깊은 집>은 김원일의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6. 25 이후 힘들던 시절 대구의 한 집에 모여 사는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와 감독의 굴하지 않는 용기, 하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거나 하지 않는, 전문가로서의 미학적 추구가 양보 없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도 감동을 이끌어낸 명작이다. 이렇듯 전쟁을 비롯해 어떤 시대나 사건, 역사의 한 부분을 극화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설정이 주는 스펙터클을 ‘이용’만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고, 그것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1992년, 극본 박정화, 연출 황인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각색해 아름다운 여자(이미연), 그녀를 사랑하는 부유한 남자(권인하), 여자의 옛 애인이자 매니저(송승환)의 관계를 그린 드라마다. TV 드라마 미학에 있어서의 형식적 실험과 용기 있는 결정이 돋보였고, 그러면서도 내용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교직되어 나가면서 새로운 층위의 쾌감을 주었다. 요즘 <돌아온 일지매>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초반에 ‘책녀’의 내레이션에 대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짓을 하느냐’라는 비난이 많았지만 제 3자의 내레이션은 황인뢰 감독이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를 통해 90년대 초반 이미 했던 시도였고, 지금 작품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새로운 방식들을 추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데, 황인뢰 감독이 참 잘 하고 있다. 드라마가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은 그런 창작자들 덕분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이건 작품이다’라는 생각이다.”
최근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 타워>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연출을 그가 맡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안판석 감독은 아직 말을 아낀다.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장르 불문, 이야기가 된다면 뭐든 한다’라는 원칙 뿐”이다. 대신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한 그의 원칙은 훨씬 분명하고 정교하다. “목표는, 그 직전에 했던 작품보다 한 발 더 나가야 한다는 거다. ‘무엇’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지만 ‘어떻게’는 나에게 달린 문제니까 하면 할 수 있다. 그럼 해야지.” 부드러운 표정이 단호해지며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띤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이건 작품이다’라는 생각이다. 거기에는 드라마가 유기체라는 생각이 포함된다. 무엇 하나도 빠지거나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되고, 작품 속 어떤 부분도 다 자기 역할이 있고,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고, 명 신과 망한 신 없이 모든 신이 다 괜찮아야 하고, 모든 연기는 자연스러워야 하고, 몸에 소름이 돋는 닭살스런 대사는 없어야 되고, 필요한데 말하지 않아선 안 되고, 필요 없는데 말해서도 안 되고, 작품의 흠결을 감추기 위해 필요 없는 샷을 마구 찍어 붙임으로써 시청자를 현혹하려 해서도 안 되고, 히트할 것이 분명하더라도 뻔 한 얘길 뻔하게 전달해서 한 번 더 거기에 편승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작품을 향한 엄격한 요구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드라마의 장인(匠人)답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1987년 MBC 입사 후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영화 <국경의 남쪽> 등을 연출했던 안판석 감독은 2007년 MBC <하얀 거탑>을 통해 드라마 연출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남성 취향의 이야기를 하나 하니까 비슷한 걸 기대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그래서 내가 정말 그런 걸 잘 하나 하고 자만해 있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닭살이 돋기도 했다. (웃음) 좀 어렸다면 그 비슷한 걸 찾아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 일 하는 사람 중에선 나도 나이를 좀 먹은 축이다 보니 그렇게 되진 않았다. 그래서 책 보고, 신문 읽고, 생각 좀 하며 지냈다.” 지난 2년의 시간에 대한 그의 회상이다.
올해로 연출 경력 만 22년, 인문학 교수를 연상시키는 차분한 풍모의 안판석 감독이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문학청년 그대로의 열정이 넘친다. “8,90년대에 좋은 드라마가 많았던 건, 그 당시 한창 일했던 감독과 작가들이 지금의 사람들보다 좀 더 인문학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 우리는 세계 명작이나 고전 소설, 철학서와 역사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고, 가난하던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 마이너 체험을 해 보았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글은, 모든 창조는 슬픈 마음에서 나온다. 슬플 때 자기를 뒤돌아보고 어떤 경험을 끌어내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 과거에 비해 기술이 발달하고 더 많은 자본이 들어왔지만 ‘작품’은 오히려 줄어든 한국 드라마의 현재에 대한 물음에 그가 답했다. 그렇다면 그가 보고 경험했던 한국 드라마의 르네상스기에는 어떤 작품들이 TV를 빛냈을까.
MBC <베스트셀러 극장> ‘겨울행’
1985년, 극본 유지형, 연출 최종수
“KBS에는
MBC <마당 깊은 집>
1990년, 극본 박진숙, 연출 장수봉
“당시 미니시리즈는 8부작이었다. 지금의 16부작보다 훨씬 ‘미니’ 시리즈다웠고 작품의 밀도나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마당 깊은 집>은 김원일의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6. 25 이후 힘들던 시절 대구의 한 집에 모여 사는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와 감독의 굴하지 않는 용기, 하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거나 하지 않는, 전문가로서의 미학적 추구가 양보 없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도 감동을 이끌어낸 명작이다. 이렇듯 전쟁을 비롯해 어떤 시대나 사건, 역사의 한 부분을 극화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설정이 주는 스펙터클을 ‘이용’만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고, 그것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1992년, 극본 박정화, 연출 황인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각색해 아름다운 여자(이미연), 그녀를 사랑하는 부유한 남자(권인하), 여자의 옛 애인이자 매니저(송승환)의 관계를 그린 드라마다. TV 드라마 미학에 있어서의 형식적 실험과 용기 있는 결정이 돋보였고, 그러면서도 내용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교직되어 나가면서 새로운 층위의 쾌감을 주었다. 요즘 <돌아온 일지매>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초반에 ‘책녀’의 내레이션에 대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짓을 하느냐’라는 비난이 많았지만 제 3자의 내레이션은 황인뢰 감독이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를 통해 90년대 초반 이미 했던 시도였고, 지금 작품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새로운 방식들을 추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데, 황인뢰 감독이 참 잘 하고 있다. 드라마가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은 그런 창작자들 덕분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이건 작품이다’라는 생각이다.”
최근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 타워>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연출을 그가 맡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안판석 감독은 아직 말을 아낀다.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장르 불문, 이야기가 된다면 뭐든 한다’라는 원칙 뿐”이다. 대신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한 그의 원칙은 훨씬 분명하고 정교하다. “목표는, 그 직전에 했던 작품보다 한 발 더 나가야 한다는 거다. ‘무엇’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지만 ‘어떻게’는 나에게 달린 문제니까 하면 할 수 있다. 그럼 해야지.” 부드러운 표정이 단호해지며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띤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이건 작품이다’라는 생각이다. 거기에는 드라마가 유기체라는 생각이 포함된다. 무엇 하나도 빠지거나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되고, 작품 속 어떤 부분도 다 자기 역할이 있고,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고, 명 신과 망한 신 없이 모든 신이 다 괜찮아야 하고, 모든 연기는 자연스러워야 하고, 몸에 소름이 돋는 닭살스런 대사는 없어야 되고, 필요한데 말하지 않아선 안 되고, 필요 없는데 말해서도 안 되고, 작품의 흠결을 감추기 위해 필요 없는 샷을 마구 찍어 붙임으로써 시청자를 현혹하려 해서도 안 되고, 히트할 것이 분명하더라도 뻔 한 얘길 뻔하게 전달해서 한 번 더 거기에 편승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작품을 향한 엄격한 요구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드라마의 장인(匠人)답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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