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어느 날 밤, 동생 먹이겠다고 사온 치킨을 꺼내는 뒷모습 같은 것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수줍게 모은 손, 한없이 축 늘어진 어깨,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일을 고백하는 순간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입. 여러 장의 스냅샷을 남기 듯 정상윤을 눈에 담는 순간이다. 그가 무대 위에서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동안 보여주던 몸의 언어는 ‘날 갖고 놀지마’, ‘절대 배신 안 해’라는 대사 보다 더 많은 생각의 파편을 남기며 이내 배우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2006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무대에 등장한 정상윤은 이후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컴퍼니>, <씨왓아이워너씨> 등과 연극을 오가며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최근 공연 중인 <쓰릴 미>에서는 180cm가 넘는 큰 키와 고운 외모로 ‘그’(이하 리차드)를 연상시키지만, “좀 더 디테일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유약해 보이는 ‘나’(이하 네이슨)를 맡았다. “내추럴하고 잔잔한 것들을 좋아한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정상윤은 극적인 목소리 대신 자신의 몸을 이용해 ‘그럴 수밖에 없어서 슬픈 나’를 표현해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자기야라고 불러주는 거 오랜만이다’라며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가, 서로의 욕망을 위해 계약서를 작성하던 중 비열한 웃음을 슬며시 흘리는 섬광과도 같은 순간의 기억이 강렬해진다. ‘정상윤의 발견’이라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관객들의 마음을 ‘쓰릴’하게 만든 그에게 “공연할 때는 너무 좋은데, 끝나고 나면 너무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쓰릴 미>에 대해 물었다.

뮤지컬 <쓰릴 미>는 부모님의 돈과 명예, 명석한 두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졌던 스무 살의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로브가 1924년 시카고에서 실제 저지른 아동납치살인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범죄를 통해 ‘나’와 ‘그’로 대변되는 두 남자의 비틀린 관계에 대해 더욱 깊게 파고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작품은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마니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매년 극장을 가득 채우며 공연 중이다. 특히 그동안 <쓰릴 미>를 거쳐 간 김무열, 이율, 이창용 등의 배우들은 이후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난 네 그 찌질함만 그리웠다”라는 극중 리차드의 대사만큼이나 정상윤이 표현하고 있는 네이슨은, 살인자이지만 그들이 ‘20살’이었다는 점에 더 초점을 두어 지난 시즌에 비해 발랄하고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봤던 <쓰릴 미>는 어두운 작품을 더 어둡게 표현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어요. 잔인하게 아이를 죽이고, 감옥에 갔어도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은 굉장히 행복하고 치열했던 순간이거든요.” ‘피로 쓴 계약서’로 인해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지독하게 서로를 원하는 공생관계였으며 이 모든 것들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그는 스스로 리차드를 경찰에 고발했음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사형을 당하든, 어떻게 되든지 간에 어차피 다 막다른 골목인데도 그 안에서 또다시 둘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게 측은하면서도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장면에서 좀 웃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같은걸 봐도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더 유쾌하고 장난스럽게 넘기잖아요. 전 그런 느낌이 좋더라구요.”

현재 ‘그’를 맡은 김우형과 팀을 이루어 공연 중인 정상윤은 4월 중순부터 김산호, 김하늘과의 새로운 공연을 시작한다. 뮤지컬 <그리스>를 함께 했던 김산호와의 새로운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던 그에게, 실제 20살의 나이로 <쓰릴 미>에 합류한 어린 김하늘의 이야기를 꺼내자 “하아, 뽀송뽀송한 애 옆에서 굴욕이 될 것 같다”며 웃는다. 많은 남자배우들이 꿈꾸는 강한 캐릭터 보다는 “극단적인 감정 대신 잔잔해서 매력적인” <컴퍼니>의 로버트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정상윤은 ‘정해지지 않고 비어있는 배우’를 꿈꾼다. 리차드가 빛나야 네이슨도 빛나고, 네이슨이 빛나야 리차드도 빛나는 이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같은 <쓰릴 미>처럼 그도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여백’이 넘치는 배우가 되리라 믿는다. “집에 와서 보니까 부슬비에 옷이 다 젖어있는거에요. 그런 느낌을 주고 싶다”라던 그가 싱글거리며 웃는다. “저 말 좀 잘한 거 같죠?”라고.

‘살아있는 동안 (Life plus 99 years)’
정상윤은 “네이슨이 정말로 리차드를 위에서 내려 보는 듯 한 느낌”의 ‘살아있는 동안’을 베스트 넘버로 꼽았다. 항상 자신의 뒤를 따라다녔다는 리차드의 말에 “그렇게 생각해? 모르겠어?”라며 스스로 살인에 동참한 진짜 이유에 대해 고백하는 반전의 순간 부르는 곡이다. “물론 한명은 완전 미치려고 하지만 (웃음) 어떻게 보면 네이슨 입장에서는 감옥에서든 어디서든 함께할 수 있으니까 행복한 거잖아요. 그 노래가 굉장히 와닿더라구요.” 새장 속에 갇힌 한 쌍의 새처럼 남은 인생을 함께 했던 네이슨과 리차드는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까. 그렇지만 네이슨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고, 동반자였던 리차드는 다른 죄수에 의해 살해당한다. “해석하기 나름인데, 저는 네이슨이 사주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가 나빠서가 아니라, 죽여서라도 자기 옆에 놔두고 싶지 않았을까.” 죽여서라도 곁에 남기고 싶은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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