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인터뷰를 끝낸 다음에도 성우 유강진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잘 나가는 젊은 스타 성우들이 많은데, 왜 나 같은 늙은이가 궁금합니까?” 그러나 <슈퍼맨>, <007>, <벤허> 등 수많은 외화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연기 했고, <라이온 킹>, <더 파이팅>을 비롯해 다양한 애니메이션의 더빙에 참여 했으며, KBS <동물의 왕국>의 내레이션, SBS <여인천하>의 해설 등을 맡았던 그는 엄연한 스타급 성우다. 그리고 이에 더해 그는 최근 MBC 에브리원 <떴다, 그녀>에서 근엄하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갠소 아이돌” “아이돌 신세계” 등의 단어를 발음하며 가장 젊은 방송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데뷔 45년차. 그러나 그의 마음과 목소리는 누구보다 젊었다.
<떴다, 그녀>에서 목소리와 대본의 불균형적인 조화가 인상적이다. 생소한 단어들이 많을 텐데, 가장 충격적인 단어가 있다면?
유강진: 글쎄, 하도 많아서. (웃음) 대본을 받고 모르는 게 있으면 제작진에게 물어 보는데, 젊은 친구들이 사용하는 준말들을 보면 빙그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참 재미있다. ‘지못미’ 같은 거. 나이는 좀 들었어도, 내가 정신세계가 젊다. 직접 그 단어들을 사용은 안 하지만 아이돌들에게 기분이 동화된다. 같이 그렇게 뛰고 싶은데,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 (웃음)
“2PM 멤버들 중 재범이, 닉쿤, 우영이 이름은 외웠다”
2PM 멤버들 이름도 다 외웠겠다.
유강진: 다는 모르겠고 재범이, 닉쿤 정도. 아, 우영이! 이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나오겠는데. (웃음)
처음 <떴다, 그녀> 섭외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강진: 나는 기본적으로 섭외를 받았을 때, 내 목소리와 잘 어울리지 않으면 수락하지 않는다. 첫째, 작품에 손해고, 결과적으로 내 커리어에도 손해라고 본다. 그래서 예능을 처음에 시작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담당 PD가 너무 강력하게 내 목소리를 원한다고 하더라. <동물의 왕국>처럼 해 주면 된다면서. (웃음) 막상 해 보니까 그 톤은 아닌 것 같고, 지금의 말투를 만들었는데 다행히 크게 어긋나지 않는가 보다.
그렇다면 첫 예능 방송이?
유강진: SBS <작렬, 정신통일>이었다. 그 전에는 내 보이스 칼라가 중후한 편이라 PD들도 나를 그런 분위기로 주로 기용 했었다. 요즘 예능은 통통 튀고, 젊은 연예인들이 나와서 발랄하게 만들어 가지 않나. 처음 <작렬, 정신통일>에 섭외 받았을 때 PD한테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PD가 애초에 내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기획을 했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다. 한 달 정도 씨름 하다가 결국은 정 안 맞으면 중도 하차한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 했었다. 막상 하고 보니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넣고, 출연자들이 문제를 엉뚱하게 맞추거나 할 때는 나도 같이 웃어가면서 재미있게 했었다.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남달랐나? 성우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는지.
유강진: 그런 건 아니고. 국민학생 때 웅변을 좀 했다. 내 자랑 같지만 전국대회 나가서 우승도 하고 그랬다. 학교 연극반도 좀 했고. 사실 대학 때 전공은 철학과였는데, 다른 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故 이낙훈 선배하고 연극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 선배가 졸업 무렵에 나한테 성우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하시더라. 그 말 듣고 처음에는 이왕 방송 일을 할 바에야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는데, 이낙훈 선배가 성우는 여러 가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워낙 강력하게 권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 성우 시험은 한 번에 통과 했던 건가?
유강진: 그렇다. 1964년도에 지금은 없어진 TBC가 개국 준비를 하면서 성우를 뽑았는데, 내가 1기생이었다. 경쟁률이 200대 1정도 됐다. 어떻게 운이 좋았다. (웃음) 당시에 라디오 드라마가 굉장히 인기가 있었는데,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라디오 드라마 시간이 되면 전파사에 들러서 다 듣고 귀가 할 정도였다.
“레드 버틀러, 슈퍼맨, 그레고리 팩 다 내가 했지”
라디오 외에 후시녹음도 했다고 들었다.
유강진: 그때만 해도 동시녹음이 기술적으로 어렵던 시절이었으니까. 남궁원 선생 목소리도 많이 했고. 운이 좋아서 당시 영화 주인공의 80% 정도를 전담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눈뜨면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외화가 붐이었을 때는 며칠씩 밤을 새기도 했다. 시사 과정도 요즘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라서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절이지.
외화 더빙을 할 때도 주인공을 많이 했다.
유강진: <벤허>나 <십계>에서 찰톤 헤스턴의 목소리 연기를 주로 했었고, 숀 코넬리 목소리도 많이 했고, <슈퍼맨>의 크리스토퍼 리브도 내가 더빙 했다. 감사한 일이다.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했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목소리도 더빙 한 것으로 안다.
유강진: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라 녹음할 때 신경을 많이 썼던 작품이다. 레트 버틀러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활동적인 인물이라 내 기분 자체를 그렇게 가져가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외화 더빙을 할 때 원칙 같은 것이 있나? 같은 배우는 비슷한 목소리를 내도록 한다든지.
유강진: 작품마다 그 역할에 빠져드는 것뿐이지, 배우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같은 배우라도 작품마다 캐릭터가 달라지기 때문에 역할에 몰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최대한 우리말의 억양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살려야 한다는 거다. 작품 시사를 할 때 들었던 외국어 대사는 캐릭터를 캐치하고 나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녹음 할 때는 절대로 그 말투나 억양을 따라가면 안 된다.
그래도 배우들마다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살려왔다.
유강진: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팩을 더빙 했었는데 그 사람을 연기 할 때와 숀 코넬리를 할 때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다. 전자는 차분하고 지적인 느낌이라면 후자는 아무래도 <엔트랩먼트>나 <더 록> 같이 오락 영화들을 주로 찍었으니까 활동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를 하는 거지. 사실, 배우들은 연기를 할 때 의상도 입고, 세트도 있고 그렇지 않나. 그러나 성우들은 스튜디오에 앉으면 마이크와 콘솔밖에 보이는 게 없다.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키포인트다.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게임 <워크래프트>에서 ‘인간 남자’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경우는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나.
유강진: 사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은 작품 전체를 보지 못하고 녹음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집요하게 담당 PD에게 작품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나름대로 전개 될 방향을 예상하면서 몰입을 하는 거지. 또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보다 조금 더 과장된 발성을 원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시청층이 젊을 테니까,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 더 비현실적인 어린이용 작품을 할 때는 억양을 더욱 강조하고. 작품마다 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특성에 맞추는 건 배우로서 당연한 거다.
그렇다면 <동물의 왕국>은 또 다른 방식이 필요했겠다. 연기 상황이 아니니까.
유강진: 그래서 섭외 받고 고민이 많았다. 화면도 중요하지만, 한 시간 동안 혼자 끌고 나가는 내레이터가 작품의 성취를 좌우 할 것 같더라. 고민 끝에 리얼하게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살아있는 드라마 아닌가. 픽션이 없는 화면이니까 우리말도 감정 표현에 가감 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면 될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아직 10대라 젊은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성우 중에서도 배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 성우일 만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유강진: 성우는 얼굴을 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은 라디오든, 외화든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각자의 이상형을 그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 사람의 이상형에 부합한다는 보장이 없다. 듣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상형을 간직하게 놔두는 것이 좋은 거지. (웃음) 대신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아무데나 갈 수 있고 편하다. 말을 하면 알아보는 경우는 많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성우라는 직업이 너무 좋다.
45년 동안 한 길만을 걸어 왔는데,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건가.
유강진: 사람이 살면서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게 몇 가지 안 된다. 그런데 성우는 비록 목소리로만 경험 하는 것일지라도 수많은 인간상이 될 수 있다. 의사도하고, 변호사, 사업가도 하고 심지어 슈퍼맨도 될 수 있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가.
유강진: 그런 면도 있다. 그리고 실제 도전에는 한계가 있지만, 소리의 세계에서 도전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좋은 소리를 위해서 많이 준비하고 공부를 한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녹음에 반영하기도 하고. 예컨대, 백화점과 마트, 재래시장은 다 같이 북적이는 곳이지만 그 현장의 소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 차이를 신경 써서 들어 두면 연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말이 파고들어 보면, 이렇게 어려운 언어가 없다. 같은 문장을 써 놓고도 어미 처리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게 우리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단어의 음장이나, 정확한 발음을 위해서 헷갈릴 때마다 즉각 사전을 찾아보고 있다. 게다가 우리말이 사실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다. 특히 템포가 그렇다. 내가 방송 3사에서 <더 록>을 다 더빙했다. 그런데 할 때 마다 같은 숀 코넬리인데도, 말투가 조금씩 다르다. 4,5년 전에 녹음 한 것을 내가 모니터 하면서 ‘어우, 어떻게 내가 저렇게 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데, 사실 녹음할 당시에는 그 템포가 맞는 속도였단 말이지. 그런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제나 노력하는 것도 공부의 일환이다.
본인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 하는 만큼, 후배들이나 성우 지망생들에게 꼭 하고 싶은 조언이 있을 것 같다.
유강진: 많다. 적어도 방송을 한다면 우리말의 뜻에 맞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을 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안타깝다. 그리고 요즘은 눈을 감고 방송을 들어보면 다 한사람이 하는 것 같다. 캐릭터가 각자 다 달라야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현실적으로 현재 성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틀어져 있다. 필요한 인원보다 많은 성우들을 양산하고 있는데, 심지어 신인들에게 올바른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교육 과정이 전무한 실정이다. 의례적인 일주일 연수를 거쳐서 바로 실전에 투입되고 있다. 그 와중에 살아남으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터전이 양적으로는 많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성우 시장이 그렇게 변하는 과정 속에서, 본인은 언제나 그 흐름을 잃지 않고 중심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유강진: 고마운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달라지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노력인가. 젊은 감각을 키우기 위한 비법이라도 있나?
유강진: 내 마음이 젊다. 마음은 아직도 10대다. (웃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떴다, 그녀>에서 목소리와 대본의 불균형적인 조화가 인상적이다. 생소한 단어들이 많을 텐데, 가장 충격적인 단어가 있다면?
유강진: 글쎄, 하도 많아서. (웃음) 대본을 받고 모르는 게 있으면 제작진에게 물어 보는데, 젊은 친구들이 사용하는 준말들을 보면 빙그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참 재미있다. ‘지못미’ 같은 거. 나이는 좀 들었어도, 내가 정신세계가 젊다. 직접 그 단어들을 사용은 안 하지만 아이돌들에게 기분이 동화된다. 같이 그렇게 뛰고 싶은데,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 (웃음)
“2PM 멤버들 중 재범이, 닉쿤, 우영이 이름은 외웠다”
2PM 멤버들 이름도 다 외웠겠다.
유강진: 다는 모르겠고 재범이, 닉쿤 정도. 아, 우영이! 이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나오겠는데. (웃음)
처음 <떴다, 그녀> 섭외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강진: 나는 기본적으로 섭외를 받았을 때, 내 목소리와 잘 어울리지 않으면 수락하지 않는다. 첫째, 작품에 손해고, 결과적으로 내 커리어에도 손해라고 본다. 그래서 예능을 처음에 시작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담당 PD가 너무 강력하게 내 목소리를 원한다고 하더라. <동물의 왕국>처럼 해 주면 된다면서. (웃음) 막상 해 보니까 그 톤은 아닌 것 같고, 지금의 말투를 만들었는데 다행히 크게 어긋나지 않는가 보다.
그렇다면 첫 예능 방송이?
유강진: SBS <작렬, 정신통일>이었다. 그 전에는 내 보이스 칼라가 중후한 편이라 PD들도 나를 그런 분위기로 주로 기용 했었다. 요즘 예능은 통통 튀고, 젊은 연예인들이 나와서 발랄하게 만들어 가지 않나. 처음 <작렬, 정신통일>에 섭외 받았을 때 PD한테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PD가 애초에 내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기획을 했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다. 한 달 정도 씨름 하다가 결국은 정 안 맞으면 중도 하차한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 했었다. 막상 하고 보니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넣고, 출연자들이 문제를 엉뚱하게 맞추거나 할 때는 나도 같이 웃어가면서 재미있게 했었다.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남달랐나? 성우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는지.
유강진: 그런 건 아니고. 국민학생 때 웅변을 좀 했다. 내 자랑 같지만 전국대회 나가서 우승도 하고 그랬다. 학교 연극반도 좀 했고. 사실 대학 때 전공은 철학과였는데, 다른 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故 이낙훈 선배하고 연극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 선배가 졸업 무렵에 나한테 성우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하시더라. 그 말 듣고 처음에는 이왕 방송 일을 할 바에야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는데, 이낙훈 선배가 성우는 여러 가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워낙 강력하게 권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 성우 시험은 한 번에 통과 했던 건가?
유강진: 그렇다. 1964년도에 지금은 없어진 TBC가 개국 준비를 하면서 성우를 뽑았는데, 내가 1기생이었다. 경쟁률이 200대 1정도 됐다. 어떻게 운이 좋았다. (웃음) 당시에 라디오 드라마가 굉장히 인기가 있었는데,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라디오 드라마 시간이 되면 전파사에 들러서 다 듣고 귀가 할 정도였다.
“레드 버틀러, 슈퍼맨, 그레고리 팩 다 내가 했지”
라디오 외에 후시녹음도 했다고 들었다.
유강진: 그때만 해도 동시녹음이 기술적으로 어렵던 시절이었으니까. 남궁원 선생 목소리도 많이 했고. 운이 좋아서 당시 영화 주인공의 80% 정도를 전담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눈뜨면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외화가 붐이었을 때는 며칠씩 밤을 새기도 했다. 시사 과정도 요즘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라서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절이지.
외화 더빙을 할 때도 주인공을 많이 했다.
유강진: <벤허>나 <십계>에서 찰톤 헤스턴의 목소리 연기를 주로 했었고, 숀 코넬리 목소리도 많이 했고, <슈퍼맨>의 크리스토퍼 리브도 내가 더빙 했다. 감사한 일이다.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했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목소리도 더빙 한 것으로 안다.
유강진: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라 녹음할 때 신경을 많이 썼던 작품이다. 레트 버틀러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활동적인 인물이라 내 기분 자체를 그렇게 가져가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외화 더빙을 할 때 원칙 같은 것이 있나? 같은 배우는 비슷한 목소리를 내도록 한다든지.
유강진: 작품마다 그 역할에 빠져드는 것뿐이지, 배우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같은 배우라도 작품마다 캐릭터가 달라지기 때문에 역할에 몰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최대한 우리말의 억양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살려야 한다는 거다. 작품 시사를 할 때 들었던 외국어 대사는 캐릭터를 캐치하고 나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녹음 할 때는 절대로 그 말투나 억양을 따라가면 안 된다.
그래도 배우들마다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살려왔다.
유강진: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팩을 더빙 했었는데 그 사람을 연기 할 때와 숀 코넬리를 할 때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다. 전자는 차분하고 지적인 느낌이라면 후자는 아무래도 <엔트랩먼트>나 <더 록> 같이 오락 영화들을 주로 찍었으니까 활동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를 하는 거지. 사실, 배우들은 연기를 할 때 의상도 입고, 세트도 있고 그렇지 않나. 그러나 성우들은 스튜디오에 앉으면 마이크와 콘솔밖에 보이는 게 없다.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키포인트다.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게임 <워크래프트>에서 ‘인간 남자’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경우는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나.
유강진: 사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은 작품 전체를 보지 못하고 녹음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집요하게 담당 PD에게 작품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나름대로 전개 될 방향을 예상하면서 몰입을 하는 거지. 또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보다 조금 더 과장된 발성을 원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시청층이 젊을 테니까,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 더 비현실적인 어린이용 작품을 할 때는 억양을 더욱 강조하고. 작품마다 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특성에 맞추는 건 배우로서 당연한 거다.
그렇다면 <동물의 왕국>은 또 다른 방식이 필요했겠다. 연기 상황이 아니니까.
유강진: 그래서 섭외 받고 고민이 많았다. 화면도 중요하지만, 한 시간 동안 혼자 끌고 나가는 내레이터가 작품의 성취를 좌우 할 것 같더라. 고민 끝에 리얼하게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살아있는 드라마 아닌가. 픽션이 없는 화면이니까 우리말도 감정 표현에 가감 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면 될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아직 10대라 젊은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성우 중에서도 배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 성우일 만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유강진: 성우는 얼굴을 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은 라디오든, 외화든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각자의 이상형을 그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 사람의 이상형에 부합한다는 보장이 없다. 듣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상형을 간직하게 놔두는 것이 좋은 거지. (웃음) 대신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아무데나 갈 수 있고 편하다. 말을 하면 알아보는 경우는 많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성우라는 직업이 너무 좋다.
45년 동안 한 길만을 걸어 왔는데,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건가.
유강진: 사람이 살면서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게 몇 가지 안 된다. 그런데 성우는 비록 목소리로만 경험 하는 것일지라도 수많은 인간상이 될 수 있다. 의사도하고, 변호사, 사업가도 하고 심지어 슈퍼맨도 될 수 있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가.
유강진: 그런 면도 있다. 그리고 실제 도전에는 한계가 있지만, 소리의 세계에서 도전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좋은 소리를 위해서 많이 준비하고 공부를 한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녹음에 반영하기도 하고. 예컨대, 백화점과 마트, 재래시장은 다 같이 북적이는 곳이지만 그 현장의 소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 차이를 신경 써서 들어 두면 연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말이 파고들어 보면, 이렇게 어려운 언어가 없다. 같은 문장을 써 놓고도 어미 처리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게 우리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단어의 음장이나, 정확한 발음을 위해서 헷갈릴 때마다 즉각 사전을 찾아보고 있다. 게다가 우리말이 사실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다. 특히 템포가 그렇다. 내가 방송 3사에서 <더 록>을 다 더빙했다. 그런데 할 때 마다 같은 숀 코넬리인데도, 말투가 조금씩 다르다. 4,5년 전에 녹음 한 것을 내가 모니터 하면서 ‘어우, 어떻게 내가 저렇게 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데, 사실 녹음할 당시에는 그 템포가 맞는 속도였단 말이지. 그런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제나 노력하는 것도 공부의 일환이다.
본인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 하는 만큼, 후배들이나 성우 지망생들에게 꼭 하고 싶은 조언이 있을 것 같다.
유강진: 많다. 적어도 방송을 한다면 우리말의 뜻에 맞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을 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안타깝다. 그리고 요즘은 눈을 감고 방송을 들어보면 다 한사람이 하는 것 같다. 캐릭터가 각자 다 달라야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현실적으로 현재 성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틀어져 있다. 필요한 인원보다 많은 성우들을 양산하고 있는데, 심지어 신인들에게 올바른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교육 과정이 전무한 실정이다. 의례적인 일주일 연수를 거쳐서 바로 실전에 투입되고 있다. 그 와중에 살아남으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터전이 양적으로는 많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성우 시장이 그렇게 변하는 과정 속에서, 본인은 언제나 그 흐름을 잃지 않고 중심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유강진: 고마운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달라지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노력인가. 젊은 감각을 키우기 위한 비법이라도 있나?
유강진: 내 마음이 젊다. 마음은 아직도 10대다. (웃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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