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2일 숀 펜에게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 <밀크>는 7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커밍아웃한 게이로서는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되었던 하비 밀크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교과서에도 위인전에도 나오지 않는 그, 하비 밀크에 대해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하비 밀크를 비롯해 칠레 군사 쿠데타의 한가운데서 저항의 노래를 부르다 총살당한 음악가 빅토르 하라,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국제여단의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잭 시라이 등 마흔아홉 명의 짤막한 평전이 실려 있다. 체 게바라나 안중근처럼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사코와 반제티, 이진우, 양정명 등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의 삶과 죽음이다.

1951년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살아온 저자 서경식은 ‘맺음말’에서 말한다. “나는 이를테면 ‘20세기인의 여러 묘비명’이라 부를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다. 실제로 내가 집필을 맡은 인물들은 대부분 사형, 전사, 암살, 객사,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선명한 ‘죽음’을 통해 그들은 이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얼핏 특별해 보일 수도 있을 그들의 ‘죽음’의 형태는 20세기를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삼일절이자 미디어법 통과로 여야가 대치하고 방송사 노조 파업이 줄을 잇던 지난 주말 이 책을 다시 꺼내 봤다. 야만의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은 지금 무엇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문득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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