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에 다니던 10여 년 전, 댄스가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에 ‘어떻게 연극쟁이가 연예인을 하냐’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했던 한 소년은 어느 순간 ‘기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선 “떠나는 그대여 울지 말아요”(‘이미 슬픈 사랑’)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진한 화장과 화려한 의상에 슬픈 얼굴을 감춘 채 “달콤하게 날 채워줘”(<헤드윅>)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제는 한손엔 술잔을, 그리고 다른 한손엔 여자의 허리를 감싼 채, “감춰둔 욕망, 날 취하게 하라”(<돈 주앙>)며 여자들을 유혹한다.

뮤지컬 배우 김다현에 대한 이야기다. ‘테리우스’라 불리던 안정환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이미 슬픈 사랑’의 야다에서 시작된 그의 캐릭터는,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드윅>, <프로듀서스> 등을 거치며 더욱 견고해졌다. 환하게 웃는 얼굴 속에서도 슬며시 비추던 특유의 유약하고 소심하고 우울한 느낌. 그것이 그동안 그가 뮤지컬을 통해 관객들에게 선보였던 캐릭터의 얼굴이다. 그런 그가 “김다현이라는 배우가 이런 것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돈 주앙으로 돌아왔다.

뮤지컬 <돈 주앙>은 스페인의 젊은 귀족이자 전설적인 옴므파탈 돈 주앙의 삶과 사랑, 그리고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2006년 오리지널 팀의 공연으로 국내무대에 첫선을 보였고, 이후 3년이 지난 올 2월부터 주지훈, 김다현, 강태을 3명의 배우가 ‘돈 주앙’의 분신이 되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3명의 배우 중 김다현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인간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라는 부분에 포인트를 두고 그만의 돈 주앙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특히나 돈 주앙은 ‘세상 모든 여자들이 애타게 부르는 이름’인만큼 그가 가진 매력을 무대위에서 모두 발산해야한다. “모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단순히 멋있는 것 뿐 아니라 다양한 매력을 보여줘야 되요. 섹시함, 귀여움, 남자다움 그리고 모성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있어야 되는데, 그 모습을 보고 관객들이 아주 그냥 쓰러져야 되는 거죠. 하하”

“관객 중에는 ‘김다현은 언제 나오냐’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요즘 김다현은 그동안 맡았던 역할과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의 변신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프랑스 뮤지컬은 뉴욕의 브로드웨이, 런던의 웨스트앤드 작품과는 또 다른 장르라고 생각해요. 조명이나 댄스 등 비주얼적인 부분도 탁월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간다는 것이 포인트죠. 노래를 대사로 표현한다는 역발상이 매력적이고 신선하지만 이런 작품을 했던 경험이 없어서 많이 어렵긴 해요. 그런데 음악이 너무 좋지 않나요?” 9회 정도 진행된 자신의 무대에 대해 이젠 객관성을 많이 잃었다며 웃지만, ‘2막의 디테일한 연기’와 ‘가사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감정’ 등 앞으로 더 강조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똑부러진 자가진단을 내린다.

“<꽃보다 남자> 때문에 다시 꽃이 각광받는” 것이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김다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배우에게도 ‘꽃’이라는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이제 서른이 넘어서 민망해요. 하지만, 나중엔 그 ‘꽃다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라며 웃는 김다현은, 올 한해 <돈 주앙>에만 올인할 계획이다. “일단 무대에서 빛나는 배우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기대감과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다현이 하는 건 꼭 보러 가야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의 바람대로 ‘꽃다현’이라는 닉네임에 감춰져있던 신중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의 이름에 오늘도 티켓예매 버튼을 누른다.

‘사랑으로 나는 죽네’
“좋아하는 곡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같은데, 연기하면서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바로 이 곡이에요.” 김다현은 <돈 주앙>의 넘버 중 ‘사랑으로 나는 죽네’를 베스트 넘버로 꼽았다. 라파엘과의 결투 끝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돈 주앙이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속죄하며 부르는 곡이다. “돈 주앙은 사랑‘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죽는 거예요.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극이 진행되는 동안 최대한 그런 변화들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고, 돈 주앙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같이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때 돈 주앙이 완성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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