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돌아온 일지매>는 故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다. 대개 만화를 드라마로 만드는 경우 재미난 설정이나 캐릭터만 쏙 갖다 쓰고 원작은 단물 빠진 껌처럼 뱉어 버리는 데 비해 <돌아온 일지매>는 만화 <일지매> 고유의 재미를 제법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니, 모를 수도 있겠다. 아직도 ‘카타르시스’가 ‘햄릿 아빠 이름’ 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고전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읽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섣부른 기대일 테니. 그래서 준비했다. <일지매>에 대해 알아두면 좋은 몇 가지 상식, 그리고 지금쯤 눈치 챘겠지만 이 글은 책녀의 음성을 떠올리며 읽는 것이 좋겠다.

일지매 얘기를 한다더니 고우영 얘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이렇다. 학교 다닐 때도 직각삼각형의 직각을 포함하는 두 변 위의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은 빗변 위의 정사각형의 넓이와 같다는 정리보다, 피타고라스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이런 쓸데없는 것을 증명해서 시험에 나오게 하나 궁금해 하는 중고생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지매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명작으로 기억되게 한 이 만화가, 고우영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고우영은 1939년 만주 본계호(本溪湖)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으나 한국에 돌아와 열 살 되던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었고 스무 살 무렵 어머니와 두 형을 잃으며 본격적인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통념이 있었으나 70년대 초반 고우영이 일간 스포츠에 연재한 <임꺽정>은 수많은 성인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일간 스포츠 편집국장의 말에 따르면 1971년 당시 2만 부에 불과했던 신문 발행 부수가 4년 뒤에는 30만 부에 이르렀고, 거기에는 고우영의 만화가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하니 감히 그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로도 고우영은 <일지매> <삼국지> <초한지> <열국지> <십팔사략> <가루지기전> 등 무수히 많은 걸작을 내놓았고 2005년 지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 그 어떤 글로도 그의 재기 넘치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 고우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일단 서점으로 달려가시라!

그렇다. <일지매>는 1975년 12월 17일부터 1977년 12월 31일까지 일간 스포츠에 연재된 바 있다. 애초에 고우영은 6.25 전쟁 전 청계천 시장에서 봤던 <의적 일지매>라는 책을 뼈대로 해 극화를 할 요량이었는데 끝내 그 책을 다시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100% 창작을 통해 자신만의 <일지매>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일지매>가 연재되던 시기는 박정희 정권의 군부독재 시절, 무자비한 검열의 잣대는 작품을 만신창이로 훼손시켜 놓았고 심지어 등장인물들이 이북 사투리를 쓴다 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다니 법질서 확립과 명랑사회 구현을 빙자한 공권력 오남용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2004년 복간된 <일지매>는 원작자가 누락되고 훼손된 부분을 다시 그리고 사투리까지 복원해 넣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돌아온 일지매>에서 배 선달과 차돌이가 남겼다고 하는 여덟 권짜리 <기이 일지매>는 이 완전판 <일지매>를 의미하는 듯하다.

놀랍게도, 배 선달과 차돌이는 <일지매>에 나오지 않는다. 할 일 없는 천애 백수, 그리고 갈 곳 없는 천애 고아. 나이, 신분, 출신, 학벌, 지위, 빈부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은 이 두 사람의 평생 우정 스토리는 드라마에만 나온다. <돌아온 일지매>의 황인뢰 감독은 수많은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매개로 일지매의 일거수 일투족을 뒤따르고 기록하는 배 선달과 차돌이를 집어넣었다고 한다. 덕분에 일지매가 살인 누명을 쓸 뻔했을 때 세렝게티 초원만큼이나 광활한 오지랖을 지닌 배선달은 그에게 칼이 없었음을 증언해 주기도 하니, 약방의 감초 같은 두 사람의 역할은 은근히 드라마에 잘 녹아들고 있는 것 같다.

말이 많다니? <돌아온 일지매>의 실질적 주인공은 책녀라고 믿는 사람들은 눈 감고 손들어 보자. 역시, 한 명 빼고는 다 들지 않았나. 거기 당신, 그래 당신 빼고는 다 들었단 얘기다. 그동안 살면서 남들이 예스 할 때 혼자 노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잠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반성 다 했다면 알려주겠다. <일지매>의 화자는 원작자 고우영이다. 작품에서 자신의 개입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던 고우영은 사연 많은 인간사와 당대의 생활상,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던 70년대 한국의 현실까지 교묘하게 비틀어 넣은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 주옥같은 내레이션 가운데 지금 보아도 무릎이 탁 쳐지도록 감탄스러운 것은 후반부 등장하는 의인 슬슬도사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다. “그러나 빈대는 정말 울고 있었다. 그가 오열해야만 하는 심정을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원 그래프 삽입) 스승의 죽음, 현실의 부조리, 자신의 신세, 자신의 흐느낌이 듣기에도 처량해서 가중되는…그 슬픔, 아직도 미혼이라는 이유, (마지막으로 작게) 택견 도술책을 물려받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 변한 슬픔” 요즘 유행하는 ‘○○○의 뇌구조’의 원형을 처음 만든 이는 아무래도 고우영이 아니었을까.

하하. <돌아온 일지매>에는 어떻게 등장할지 모르지만 원작을 기준으로 하면 앞으로도 나올 인물은 무궁무진하다. 앞서 말한 슬슬도사는 도적 떼들이 일지매를 잡기 위해 고용한, 이른바 프로페셔널 킬러인데 뛰어난 무예와 기행의 소유자다. 그 밖에도 남장을 하고 일지매 행세를 하는 여검객 성숙, 일지매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호하지만 어딘가 수상쩍은 사나이 양포, 조선의 카사노바 낭골, 어을우동의 먼 친척인 색녀 고운이, 한 무리로 몰려다니며 공동생활을 하는 작은 이들, 나라 팔아먹을 악역 김자점 등. 게다가 여장을 한 일지매에게 반하는 순정파 사나이 맹수잡이 박수동까지 등장하니 조선판 <커피 프린스 1호점>도 찍을 수 있겠다.

그래도 얼굴은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니까 용서해 주자. 원래 <일지매>에서 일지매는 보시다시피 날 때부터 마스카라, 볼터치, 립글로스를 자연 장착한 꽃미남이다. 저기 저, 눈두덩 위에 연보라색 그늘은 아이섀도우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어미인 백매가 둘도 없는 미녀였으니 그 유전자를 모조리 물려받은 모양이다. 원작의 일지매는 영국의 셜록 홈즈 만큼이나 변장술에 능한데 그 중에서도 기생으로 변장하고 탐관오리들의 술자리에 끼어 정보를 캐는 일이 많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몸이 가늘었던 일지매에 비해 <돌아온 일지매>에서 일지매를 연기하는 정일우는 당시로 치면 육척장신에 속하는 장정이니 아무리 치마를 입고 고운 얼굴이라 해도 가까이에서 본 포졸이 “계집이 아니잖아!”라며 놀랄 수밖에. 물론 그래서 기생이 된 일지매의 활약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연애 불변의 법칙에 ‘빈익빈 부익부’라는 것이 있다. 빈자는 바로 이 번 주 토요일에 하루 종일 집에서 잠만 자기로 작심한…어떤 사람들이고, 일지매 같은 경우가 바로 부자, 아니 연애계의 재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청나라 시절부터 ‘온리 일지매’였던 모란공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일지매의 첫사랑 달이, 섬마을에서 일지매를 두고 경쟁하다 목숨을 잃은 봉이, 성게더러 봉이를 죽이도록 사주한 질투의 화신 난이, 일지매를 좋아하는 일본 소녀 리에, 일지매를 숨겨주었다가 평생 코 꿰이는 월희. 지금까지 <돌아온 일지매>에 나온 여자들만 해도 농구팀이 하나에 식스맨까지 있다. 그런데 <일지매>에는 아직도 수많은 여자가 남아 있다. 사랑하는 정혼자까지 있으면서 일지매에게 반해 매달리는 숙영 낭자, 하룻밤 동안 일지매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관기, 어린 남동생과 자신을 구해 준 일지매에게 매달리는 소녀 등 다 합치면 축구팀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일지매에게는 여자를 부르는 자기장이라도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일지매를 돕는 건, 왜 하필, 매번, 소녀들인 걸까? 잘생겨서? 착해서? 주인공이니까?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개탄할 사이도 없이 발렌타인 데이는 자꾸만 다가올 따름이다.

안됐지만 일지매는 고독한 영웅이다. 그래서 <일지매>는 김자점이 조선을 청나라에 넘기려는 음모를 파헤친 일지매가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침략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데서 끝을 맺는다. 물론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조금 더 다룰 예정이라고 하지만 사실 원작은 이렇듯 깔끔하면서도 미완성인 듯 허무한 것이다. 허나, 옆 나라 일본의 명작 <슬램덩크>에서도 최강 산왕을 꺾고 올라간 북산이 3연패 하고 떨어지는 데서 끝내 버린 걸 보면 본래 그것이 대작다운 결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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