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MBC <돌아온 일지매>에서 월희(윤진서)는 일지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지금 <돌아온 일지매>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설명일 것이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를 바탕에 둔 <돌아온 일지매>는 지금도 한국 만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원작을 2009년에 돌아오게 만든 가장 충실한 재현이자, 30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까지 하는 요즘 시대에 왜 일지매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원작 만화의 충실한 재현을 통해 오히려 드라마의 가능성을 확대한 <돌아온 일지매>에 대한 이야기와 <돌아온 일지매>의 정일우와 윤진서를 볼 수 있는 녹화 현장, 원작과 드라마의 차이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황인뢰 감독 인터뷰까지 <돌아온 일지매>에 궁금할 법한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고우영이 황인뢰에게. 그리고 황인뢰가 고우영에게. 황인뢰 감독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를 원작으로 MBC <돌아온 일지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만화 <일지매>는 <돌아온 일지매>가 등장하는 순간 ‘완성’의 가능성을 얻었다. <돌아온 일지매>에서 왕횡보(박철민)는 그의 옆걸음질을 움직이며 보여줄 수 있고, 고우영 화백이 작품 속에서 “색깔을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던 부분들은 HD 영상을 통해 그들의 색을 찾는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는 단지 <일지매>의 드라마 버전이 아니다. <돌아온 일지매>는 만화 <일지매>의 리메이크를 넘어 <일지매>의 예술적 성취에 도전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 속의 사람들과 만나다
만화 <일지매>는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꾼의 화법에 따라 스토리가 흘러가는 파격을 선택했었다. 고우영 화백은 직접 만화 <일지매>의 화자로 나서 시공간을 무시한 채 이야기를 전개한다. 과거와 현재를 마음대로 오가고, 이야기 중에 현대에 벌어진 사건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만화 <일지매>가 인물 중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만화 <일지매>는 사실상 일지매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지매부터 일지매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하나까지 그들의 연원과 결말이 있다. 만화 <일지매>의 이야기꾼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바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돌아온 일지매> 역시 일지매부터 구자명(김민종), 백매(정혜영)의 과거사를 훑는다. 차돌(이현우)과 배선달(강남길)이 8권(<일지매>가 8권이다)의 <일지매전>을 집필하고, 차돌이가 첫 회에 일지매의 활약상을 퍼뜨리는 이야기꾼을 하는 설정은 <돌아온 일지매>가 이야기꾼이 전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일수록, <돌아온 일지매>는 고우영 화백이 바라본 ‘시대’를 보여준다. 노비의 자식은 아버지에게조차 버림받고, 권력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민의 재산을 빼앗는 시대. <돌아온 일지매>의 첫 회에 현재의 월희를 통해 “그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돌아온 일지매>가 보여주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사람을 통해 재구성한 그 시대 전체다. 여기서 <돌아온 일지매>는 만화 <일지매>와 달라진다. <돌아온 일지매>는 원작에서 틀린 부분마저 똑같이 하면서 “왜? 원작에서 그렇게 하고 있거든”이라며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그러나 스포츠 신문에 연재 돼 칸을 잘게 나눴던 만화 <일지매>는 스토리를 이야기꾼의 해설이나 인물들의 대화로 풀었다. 반면 <돌아온 일지매>는 일지매가 다리 밑에 버려졌을 때 아이의 얼굴 대신 다리 밑에서 아이를 거둔 열공스님(오영수)과 걸치(이계인)를 담은 풀샷을 보여줄 수 있다. 양반댁에서 버려진 아이를 스님과 걸인이 거두는 그림. 패물 도둑과 한 패라는 누명을 쓰고 취조를 받다 겨우 풀려난 백매가 포도청을 뒤로 하고 나오는 모습. 만화 <일지매>가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를 하나씩 모아 시대의 큰 그림을 보여준 반면, <돌아온 일지매>는 그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통해 시대의 여러 단면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한 시대를 담은 사진집이 때론 역사책 이상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청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거리의 사람들 전체와 싸워야 하는 일지매는 어떤 마음일까. 그 풍경 안의 사람이 하나씩 보이는 순간, 시청자들은 “켜켜이 쌓인 시간 속의 사람들”과 직접 만날 수 있다.
영상과 나레이션 사이의 여백, 그 안에 숨 쉬는 것
그래서 <돌아온 일지매>는 ‘책녀’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돌아온 일지매>의 첫 회는 한 회 전체가 한 권의 이야기책이나 다름없다. 영상이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일지매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사이, 만화 <일지매>의 내러티브에서 가져온 ‘책녀’의 나레이션은 <돌아온 일지매>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 나레이션과 영상 사이의 여백 사이에서 <돌아온 일지매>는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문법을 제시한다. 이야기를 축약한 영상과 적당한 정보를 주는 나레이션 사이에서, 시청자들은 자신만의 <돌아온 일지매>를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나레이션을 곱씹어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다. 대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 ‘책녀’의 나레이션과 몇 개의 스케치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물론 ‘책녀’의 나레이션이 기본적으로 만화 <일지매>의 탄탄한 내러티브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책녀’의 문제는 월희(윤진서)가 일지매에게 호감을 보일 때 “잘 생겨서? 주인공이니까?”라는 것처럼 캐릭터의 감정선을 깨는 것이지, 그 존재가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가 아니다. ‘책녀’의 나레이션이 없다면 차돌이 만두 하나를 훔친 죄로 관리의 칼에 죽을 뻔한 것에 대해 “법질서 확립을 빙자한 공권력 남용에 의한 미성년 상해 사건”이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레이션이 적당한 정보를 던지면, 영상은 시청자에게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일지매와 월희가 저자거리의 풍경을 뒤로 하고 신발 가게에 나란히 섰을 때, 당신은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대중적인 이야기, 영상미, 시대정신의 완전한 삼각형
그래서 <돌아온 일지매>는 황인뢰 감독의 정점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MBC <궁>, MBC <궁S>등은 전형적이고 허술한 스토리라인이 황인뢰 감독의 영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줄였고, 결과적으로 황인뢰 감독이 표현할 수 있는 영상의 폭도 줄였다. 하지만 최고의 이야기꾼이 만든 최고의 이야기가 바탕에 깔린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영상의 완성도를 최대한으로 높일 수 있다. 열공 스님이 분노로 폭주해버린 일지매를 독방에 가둬 놓고 대화할 때, 일지매가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열공스님이 열어놓은 창에는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열공스님이 일지매를 풀어주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일지매의 얼굴에는 빛이 쏟아진다. 누군가는 영상의 품격만을 눈여겨 볼 것이고, 누군가는 달라진 일지매의 캐릭터를 볼 것이며, 누군가는 그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할 수도 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훨씬 더 풍부할 수 있다. 황인뢰 감독은 MBC <베스트 극장>의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에서 보여줬던 영상미를 대중적인 이야기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돌아온 일지매>가 대중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인가는 지금 한국의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와 직결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어디까지’는 <돌아온 일지매>의 ‘시대의식’과도 연결된다. <돌아온 일지매>가 그린 조선시대는 ‘아이들의 지옥’이다. 어린 아이는 내버려지기 일쑤고, 그들을 받아들일 사회 안전망은 무용지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지매, 달이(윤진서), 월희, 차돌이는 모두 고아다. 또한 <돌아온 일지매>는 의붓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차돌-배선달, 일지매-걸치를 연이어 보여주며 “2인조 고아 남성 듀오”라는 표현까지 쓴다. 그리고 구자명은 법을 철저히 지키려 하면서도 “법이 누구 편인지 보자”는 관리와 마주칠 때, 법이 아이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자괴감에 빠진다. 가난한 아이들은 버려지고, 세상은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법’은 백성을 학대한다. 일지매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970년대에 나온 만화 <일지매>는 이 문제의 해법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고 있었다. 구자명은 악법일지라도 법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원칙주의자에 가까웠고, 나라의 혼란은 김자점 같은 간신에 의한 것이었다. 만화 <일지매>는 모든 면에서 파격적이었지만, ‘법’과 ‘왕’이라는 그 시대의 절대적인 개념들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30년 만에 돌아온 일지매는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드라마에도, 세상에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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