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내 꿈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꿈이 뭐냐고 물으시기에 그렇게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그러셨다. “최초, 라는 단어는 빼거라. 최초, 라는 건 네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니?” 아버지도 나도, 내가 똑똑하고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꿈은 영부인이었다. 얼굴은 여드름투성이에 몸무게는 60킬로그램을 육박했지만 실현 가능성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대학 가면 살은 다 빠진다. 피부도 깨끗해질 거고…”란 엄마도 나도, 그렇게 믿었으니까. 결국, 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거나 나는 패션 기자가 되었다. 지금은 촬영을 위해 뉴욕에 와 있고. 마침 뉴욕에 오던 날,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내가 한때 꿈꾸었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작을 지켜볼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설렜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TV를 켰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였다. TV 속에서, 검은색 코트를 입고 넥타이보다 조금 더 진한 와인색 머플러를 두른 버락 오바마와 연두색 드레스와 코트를 입은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 앞 길을 행진하고 있었다.

제이크루에서 의상을 구입하는 영부인

몇 시간째 취임 행사를 중계하고 있을 테니 지쳤을 만도 한데, 앵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직업을 가진 엄마의 상징과도 같은 미셸은 두 딸의 의상은 제이크루 웹사이트에서 구입했습니다. 자신이 오늘 낀 장갑과 함께 말이지요. 퍼스트 레이디가 보통의 미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접근 가능한 브랜드에서 자녀들의 의상을 구입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앵커는 미셸이 재클린 케네디 이후 가장 스타일리시한 퍼스트 레이디가 될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내 눈에 미셸은 선명하고, 날렵하고 정갈해 보이는 버락에 비해 어색해 보였다. 옷 색깔 때문이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했다는 레몬그라스 옐로 컬러. 전통적으로 퍼스트 레이디들은 취임식에 레드와 블랙을 조합해 입었다는데 미셸의 초컬릿색 피부에는 차라리 그게 나았을 뻔 했다. 적어도 흐리멍텅해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마냥 신난 앵커는 말을 이어갔다. “미셸은 오늘 거대 패션 하우스의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재능 있지만 독립적으로 자신의 레이블을 꾸려온 디자이너 이사벨 톨레도가 만든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역시 현명한 선택이지요.”

때로 우리가 선택하는 옷은 일종의 ‘성명(statement)’이다. 우리는 옷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신 전한다. “우습게 보지 마세요”, “건드리지 말아요”, “알고 보면 나, 쉬운 여자예요” 같은 다양한 말들을…. 그러나 옷이, 특히 여자에게 있어서 옷이 다른 모든 즐거움은 차치하고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만 쓰인다면 대체 삶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을뿐더러, 나를 즐겁게 하는 데에 있어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면서 의사 표현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옷이란, 어쩌면 두 알로 하루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알약과도 같지 않을까?

옷입기의 즐거움

옷을 고르기 전에 국민들의 경제 상황, 과거의 퍼스트 레이디들이 입었던 옷, 쿠바와의 관계, 그 옷을 만든 디자이너의 국적이나 재정 상태까지 고려해야 하는 삶이 변호사의 부인으로 살던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이사벨 톨레도는 쿠바 출신이며, 25년 동안 옷을 디자인해왔다. 소규모로 사업을 이끌어가는 미국 디자이너들은 미셸이 이사벨 톨레도의 옷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들 사이에 활기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난이 주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럴 능력이 되는 데도 모든 휘황찬란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마음 또한 적잖이 고통스러울 게다. 너무 많이 가진 어떤 사람들이 ‘창고 대방출’에서 건진 이천 원짜리 보물이 주는 행복을 모르는 것처럼 세상엔 너무 많은 힘을 가진 나머지 순수한 옷 입기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여자들도 있다.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하면, 또 누군가 내게 돌을 던질까? 어쨌거나 영부인 되는 꿈, 일찌감치 포기하길 잘 했다. 오늘 밤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던 성적과,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는 살들과, 사라지긴 했으나 흔적을 남기고 간 여드름을 기리며 건배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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