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국에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가 상륙했다. 90년대를 강타했던 일본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앞서 대만과 일본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한국에서도 수많은 시청자들의 마음과 채널을 접수했다. 한동안 중년 대상의 드라마가 주를 이루었던 한국 드라마계에 모처럼 등장한 하이틴 로맨스라는 면에서는 반갑지만 사실 캐릭터와 연출, 음악, CG까지 아쉬운 구석이 많은 이 드라마에 ‘명품’이나 ‘웰메이드’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준표의 기습키스만큼이나 거부하기 힘든 <꽃남>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중일 <꽃남>을 아우르는 잡학사전, 왜 여자들이 <꽃남>에 열광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뼈아픈 배움의 과정, 다양한 드라마 작가에 맞추어 가상으로 만들어 본 <꽃남> 설정집까지 꽃구경의 모든 것을 <10 아시아>에서 준비했다.

신화고만 F4의 세상은 아니다. 월,화 밤도 F4의 세상이다. KBS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가 4년 만에 KBS 월화 미니시리즈 시청률 20%를 넘어섰다. 현재 6회까지 방영된 <꽃남>은 동시간대 부동의 1위였던 MBC <에덴의 동쪽>의 시청률을 바짝 추격하고 있을 뿐 아니라 SBS <아내의 유혹>과 더불어 온오프라인의 ‘대세’다. <꽃남>의 주 시청자층인 30대 여성들은 주인공 구준표(이민호)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나도 구준표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환호를 지르고, 10대 여성들은 엄마와 함께 TV 앞에 앉는다. KBS <개그 콘서트>가 끝나면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온다며 괴로워하던 직장 여성들은 이제 <꽃남>을 보는 낙으로 월요일을 기다린다.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도시개발 프로젝트의 이름대로, <꽃남>은 여성을 행복하게 하는 ‘여행(女幸)’ 드라마인 것이다.

의미있는 비판이 무의미한 다른 차원의 세계

사실 <꽃남>의 성공은 절반 이상 약속된 것이기도 했다. 일본 순정만화가 카미오 요코가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연재한 만화 <꽃보다 남자>(원제 : 花より男子)는 일본 내 누적 판매량 5,900만부를 넘어선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가난한 서민 가정의 소녀 츠쿠시가 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귀족 학교에 들어가 학교를 지배하는 네 명의 재벌 2세 F4와 만나고, 그 중에서도 가장 거만하고 특권 의식에 휩싸여 있는 츠카사와 사랑에 빠진다. 이 줄거리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만화 <캔디 캔디>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원작은 철없고 이기적이던 남자아이가 독립심 강하고 용감한 여자아이를 만나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한 로맨스로 풀어내며 순정만화의 신 고전으로 떠올랐다. 1995년에는 일본에서 영화로, 2001년에는 대만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며 아시아를 휩쓴 <꽃남>이 처음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친구는 No, 사랑은 Yes>와 <오렌지 보이>라는 두 가지 버전의 해적판 만화를 통해서였다. 특히 <오렌지 보이>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책 대여점과, 수십 명이 만화책을 돌려 보던 여학교 교실을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정식 단행본이 발행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판 <꽃남>의 제작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열광과 우려의 시선이 공존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사이 대만판과 일본판 드라마, 영화를 접했던 팬들의 기대치는 높고도 다양했다. 캐스팅에 대한 찬반 의견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은 엄청난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작품의 뚜껑을 연 지금, <꽃남>이 바로 그 원작이 갖는 힘을 통해 움직이는 작품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잣집 자녀들만 다니는 신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세탁소집 딸 금잔디(구혜선)는 “서민 주제에 우리랑 어떻게 공부를 해?”라는 말을 듣고, 구준표는 “하여간 서민 주제에 자존심만 살아 가지고”라는 대사를 서슴지 않는다. 수 년 전 한 여배우가 ‘평민 발언’으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을 만큼 민감한 주제지만 <꽃남>에서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 화내는 시청자는 많지 않다. 만화, 그것도 일본 순정 만화가 원작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청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구준표가 “F4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밝혀 둘 일이 있다” 따위의 비장한 대사를 날려도 허세라며 비웃음당하지 않고 ‘그러려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원작을 선행학습한 시청자들의 암묵적인 이해 덕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남의 타워팰리스가 아닌 고풍스런 저택, 레이스 달린 앞치마 차림의 메이드가 일하는 구준표의 집에 처음 갔을 때 금잔디는 집사에게 “저어, 그러니까 여기가 우리나라, 한국 맞는 거죠?”라고 묻는다. 그렇다. <꽃남>의 배경은 한국이 아니라 만화 속의 다른 세계인 것이다. 이는 금잔디의 집을 방문한 구준표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은 잔디 가족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MBC <궁>에서 황태자 신(주지훈)이 채경(윤은혜)의 집을 방문했을 때와 흡사한 광경, 그러나 ‘왕실’이라는 코드가 등장했던 <궁>과 달리 <꽃남>의 세계는 빈부의 격차가 신분을 가르고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그로 인해 비판받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이다.

동경하지 않지만 구경하기 즐거운 아이들

하지만 구준표에게 정면 도전했거나, 혹은 심기를 거스른 금잔디를 향한 학교 학생들의 따돌림은 보다 ‘한국적’으로 리얼하고 심각하다. 자전거를 불태우고 얼굴에 소화기를 발사한다. 금잔디는 성폭력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고, 남자와 함께 침대에 있는 사진을 찍혀 공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하드코어한 사건들은 누구에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해자는 사과하지 않고 피해자인 금잔디는 매번 가해지는 폭력에 한결같은 태도로 맞서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잔다. 그리고 이 모든 폭력은 금잔디가 구준표의 여자친구가 되면서 간단히 지워진다. 일관된 분위기 없이 장면에 따라 멜로와 호러와 로맨틱 코미디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과정에서 여주인공이자 <꽃남>을 구성하는 두 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인 ‘서민’을 대표하는 금잔디의 내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굳이 속물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고, “난 돈 주고 살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라며 반발하기엔 너무나 큰 힘이 작용하는 데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부모라는 현실적인 방어막까지 갖춘 것이 츠쿠시 캐릭터가 기본적으로 갖는 약점이지만 주인공의 심리적 고민이 드러나는 원작에 비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꽃남>의 금잔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물론 <꽃남>에서 금잔디의 존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구준표가 금잔디에게 원하는 것 역시 “한 마디만 해. 날 좋아한다고 한 마디만 해”인 것처럼, <꽃남>의 포인트는 F4를 좋아하게 만드는 데 있다.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보러 간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처럼 <꽃남>은 F4라는 아이돌 그룹의 쇼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로맨틱한 윤지후(김현중)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플레이보이 소이정(김범)이 미녀들에게 작업을 걸고 맏형 격의 송우빈(김준)이 개그를 구사하는 것은 일종의 개인기 무대다. 완벽해 보이지만 “호랑이도 제 발 저린다더니” 따위 말실수를 일삼고 아무 고용인을 향해서나 “그냥 쟤부터 잘라 버려!”라며 소리를 질러 대는 폭군 고등학생 구준표가 갖는 매력은 <아내의 유혹>이 주는 화끈한 재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그런 구준표가 잔디를 걱정하며 “찔찔 짜는 거 하지 말라구. 안 어울려!”라고 퉁명스레 내뱉는 순간은 <캔디 캔디>에서 ‘동산 위의 왕자님’이 캔디를 향해 “울지 마. 꼬마 아가씨는 웃는 얼굴이 훨씬 예뻐”라고 토닥이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꽃남>은 허점이 많지만 ‘먹히는’ 판타지다. 연출이나 영상의 아쉬움을 지적하는 시청자들도 “준표님 때문에” 혹은 “지후 때문에” 혹은 “그냥 재밌으니까”채널을 고정하고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동경하지는 않지만 구경하기 즐거운 세계, 깊이 생각할 것도 앞뒤 고민할 것도 없는 <꽃남>의 매력은 어쩌면 ‘구준표 님’의 이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잘 생겼지, 키 크지, 똑똑하지, 돈 많지. 어떻게 구준표가 싫을 수가 있어? 너 진짜 바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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