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고득점자들은 한 결 같이 말한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국영수에 충실했어요.” 고깝게 들리지만 잘 새겨 둘 말이다. 화려한 사교육, 고가의 보약, 치밀한 전략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본기가 튼튼해야만 한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시청률이 수능 점수라면, 언제나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KBS 일일드라마는 고득점자의 답안지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 되어도 마치 같은 드라마를 보듯 반복되는 그들의 기본 법칙은 인기 드라마의 기본기라 할 수 있겠다. 배우고 익혀 외워서 써먹자. 시청률 30%를 넘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단, 수능 시험을 잘 본다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인생사는 새옹지마로 요약된다. 국경 노인의 아들이 전장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낙마라는 불의를 사고를 겪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자 주인공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인지라,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녀는 숱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집안은 가난해야만하며, 평범한 수준이라면 아버지의 사업이 몰락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고아거나, 연변에서 왔거나 고립무원으로 기댈 곳 없는 상황은 더욱 드라마틱한 효과를 줄 수 있다. 심지어 가족도 돈도 없는데,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입양된 가정에 치명적인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라면 반대로 그녀의 행복은 반드시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궁핍하고 피곤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의 성격만은 반드시 명랑하다 못해 때로는 맹랑하고 털털하며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계속되는 고난에 눈물 흘리며 무릎 꿇는 여자는 미니시리즈로 가라, 일일 연속극의 여자 주인공에게 “힘내자! 아자 아자!”하고 스스로를 북돋을 수 있는 독백쯤은 필수다.
일일 연속극의 남자 주인공은 모름지기 돈이 많거나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한다. 제 실력으로 들어갔건, 낙하산 인사건 직책은 주로 본부장이나 실장 아니면 팀장이다. 그러나 부하 직원들과 결코 사이가 좋아서는 안 된다. 그는 냉철하기 보다는 냉정하고, 까칠한 정도를 넘어 호전적인 cold eyes baby이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 주인공을 위한 변명으로 불행한 가족사, 실패한 첫사랑을 배치하라. 그가 여자 주인공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급 노예모드로 변모할 때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좋다는 여자에게는 막대기처럼 굴고, 집안에서 반대하는 여자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느라 주변 여자는 다 울리는 남자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싶다면 수족이 수축되는 애정표현을 추천한다. 옥탑 방에 촛불로 하트를 그려놓고 한 달 안에 결혼하자고 들이대거나, 지친 아내 앞에서 머리에 넥타이를 묶고 망측한 춤을 추는 남자는 분명 거북하지만 거절 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법이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더 큰 힘을 발휘 하는 것은 주로 여자 주인공의 라이벌이다. 남자 주인공의 연적이 유학을 가거나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동안에도 여자 주인공의 연적들은 에너자이저급의 체력으로 백만스물한번째의 패악을 위해 절치부심 할 따름이다. 애초에 남자 주인공의 약혼녀였던 이들은 그들의 부모님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회사에서는 상사로서 여자 주인공을 괴롭혀야 한다. 좋은 집안에서 잘 배운 것은 물론, 예쁘고 날씬하기까지 한 이들은 솔직하고 당당하며 적극적인 한편으로 집요하고 치졸한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넌더리내는 남자를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대신, 그녀들은 문자를 조작하고, 이간질을 하고, 여자 주인공의 비밀을 폭로하는데 허송세월을 한다. 게다가 어느 순간 드라마 마무리 단계에 이르면 밸도 없이 주인공 커플을 도와주거나 축하해 주기도 한다. 악녀라 쓰고 답답이라 읽으면 맹꽁이로 해석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일일 연속극은 기본적으로 홈드라마를 지향한다. 기획 의도에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것을 선언하는 것은 물론, 매 회 온 가족이 식탁이나 거실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핵가족화 된 현대 사회의 추세를 역행하고, 담백하고 성숙한 태도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쿨한 가족 행태를 철저히 배제함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의중은 고루하되, 그 구현 방식만은 첨단을 달려야 한다. 남편의 계모가 낳은 발달장애의 도련님을 돌봐야 하는 가난한 며느리, 이복 언니가 입양한 조카의 애인의 아버지와 결혼하는 노처녀, 아들을 데리고 재혼한 누나의 집에 얹혀사는 애 딸린 이혼남에 이르기까지 일일연속극은 입양, 재혼, 더부살이, 국제결혼 등 가능한 거의 모든 형태의 가족을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가족 형태를 고안할 수 없다면 입양아의 출생의 비밀, 국제적인 재혼 등 이종 결합 가족을 조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 형태가 어떤 모양이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결말이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는 가족 외부에서 더욱 필요한 법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오빠가 하필이면 삼촌과 이혼한 숙모의 조카를 매정하게 버린 남자라거나,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연상의 미혼모가 하필이면 어머니가 음식을 납품하는 폐백 이바지 전문 업체 사장님의 딸이라거나, 심지어 라틴 댄스로 가까워진 여인이 파혼한 조카의 옛 약혼녀의 엄마라는 상황은 등장인물에게는 놀랍겠지만, 시청자들에게는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좁디좁은 세계관은 인물들이 어떻게든 만날 수 있는 이유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사건의 연쇄적인 파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선호된다. 이에 더해, 꼬이고 또 꼬인 인물 관계를 차근차근 분석하고 이해하는 난해한 과정이 중년 시청자들의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분석이 나와 주기만 한다면 시청자 복지에 힘쓰는 공영방송에 지불하는 수신료가 더 이상 아깝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DNA를 부여받은 것처럼, 일일연속극 속의 시어머니들은 한 결 같이 결혼에 반대해야 한다. 그렇게 말리는 결혼 하겠다고 우기는 아들을 제 손으로 길러놓고서는 안면몰수하고 며느리에게 원망과 구박을 쏟아내는 뚝심과 집요함 역시 시어머니들의 필수 요건이다. 이들은 아들의 연애를 방해 하는데 자신의 재력과 권세를 총동원하는데, 여자 주인공을 찾아가 돈을 쥐여 주는 고전적인 방법은 물론, 아들을 해외 지사로 발령 내거나, 아예 회사에서 내쫓아버리는 극약 처방도 불사한다. 반대에 부딪힌 아들은 주로 가출을 감행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방심하는 성격 때문에 금방 발각되고는 한다. 임신을 해 버리거나,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방식도 한 때 선호 됐으나, 이제는 조연들의 해결책으로 저평가 되고 있다. 대신 최근의 트렌드는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이 여자 주인공의 가족과 사랑에 빠져 버리는 것인데, 겹사돈을 강행하거나 결혼식을 어이없이 파탄 내는 등의 과감한 방식으로 뛰어 넘을 것을 권한다. 이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 결혼에 도달한 새댁은 마치 훈장처럼 한동안 아침마다 한복을 입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하는 임명장인 동시에, 오래간만에 방송을 본 시청자들에게 명확히 사태를 알려주는 징표인 까닭이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는 건강한 꿈과 희망을 가진 젊은이들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취업 대란을 겪지도 않고, 박봉을 쪼개 재테크에 고심하지도 않으며 그저 열심히 회사에 출근을 한다. 회사는 주로 주부 친화적인 홈쇼핑이나 식품회사가 적합하다. 때로 첨단미래통신회사를 등장 시켜 남자 주인공의 시크함에 힘을 실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나 어떤 쪽이든 중요한 것은 직업적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남자 주인공이 양복을 입고 자신만의 방에 앉아 있거나, 여자 주인공이 단란하고 실없는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만 연출 할 수 있다면 횡성 축협부터 대기업 LK까지 어떤 직장이라도 무방하다. 다만 주인공이 일터에서 연인, 연적, 때로는 예비 시부모까지 만나서 연애도 하고, 신경전도 벌이고, 불효를 조장하는 와중에 충실한 근무를 하기란 실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너무 노골적으로 바쁜 회사는 피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사주인 예비 시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작전이므로 때때로 주인공은 회사를 위해 밤을 지새운다. 물론,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정교할 필요는 없다. 겉으로는 회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가볍게는 며칠 서류를 뒤적이거나, 심각해 봐야 몇 번의 잠복이면 해결 될 수 있는 정도가 적합하다. 주인공이 코피를 흘린다면, 너무 걱정 마시라. 사건이 잘 해결 될 수 있다는 좋은 징조다.
어떤 파행을 전제로 하건 사실 일일 연속극 속의 연애는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흡사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어쩌면 젊은이들의 연애담은 ‘가족’이라는 거대한 밑그림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일일 연속극에서 빛을 발하는 연애담은 주로 중견 연기자들의 몫이다. 아들과 아버지가 큰며느리의 친구를 두고 대립하는 파격적인 삼각관계나 사별 후 잊지 못한 첫사랑과 그녀의 아들, 동생 까지도 식구로 받아들이는 지고지순한 순정, 이혼의 위기에서 질투를 계기로 다시금 애정이 샘솟는 것도 모자라 늦둥이를 임신하기에 이르는 불타는 사랑은 지난한 주인공들의 연애와 달리 극에 생생한 활기를 불어 넣는다. 뿐만 아니라 중견 연기자들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은 발연기를 걷어낸 대본의 생생하도록 민망한 맨얼굴을 마주하게 만들어 작품과 시청자 사이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애증의 연대감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저걸 만든 사람도, 저기 출연하는 사람도, 저걸 보고 있는 우리도, 모두 공범인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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