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영화 <파니핑크>를 보았다. 너무 좋아서 몇 차례나 돌려보았던 기억이 있다. 파니와 오르페오의 우정을 보면서 한동안 게이 남자와 결혼해 입양해 사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에쿠리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란 책을 읽은 뒤 그 망상을 접긴 했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파니가 그랬던 것처럼 관을 짜고 싶었다. 삶이 권태롭거나 비관적일 때 내가 죽어 누울 관을 직접 만들어보는 거다. 그건 좀 더 삶이 괴롭게 다가올 때 한번쯤 해볼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꼈다. 부박하고 힘든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건 날 알아주고 가치 있다 말해주는 사람들이다. 비통함에 빠져있던 파니와 오르페오가 서로에게 그런 의미가 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행복해졌던 것처럼.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반쯤 채워진 잔을 가리키며 ‘저 잔이 반이 빈 것이냐, 반이 찬 것이냐.’ 선문답 같지만 이 영화에선 그게 마법의 주술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문이 되기도 했다. 지리멸렬한 일상을 여행처럼 살기. 투정하지 않기.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기. 내공 부족으로 아직까진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엄청 노력하면서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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