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고백컨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여인은 딱 한 명이었다. 토끼를 닮은 얼굴, 앵두 같은 입술, 눈웃음만으로도 갸르르 떨게 만드는 그녀. 영화 <의천도룡기>의 소소(구숙정)를 처음 본 순간 브라운관에서 전자파가 아닌 다른 강력한 파장이 인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연애 따위는 청춘드라마에나 나오는 ‘나부랭이’라고 치부하던 냉소적인 한 중학생의 가슴에 ‘사모’라는 감정을 아로새겼다. 그 감정은 이내 방대한 그녀의 필모그라피를 추적하는 열정이 되었고, 심지어 버스를 타고 나가 그녀의 사진을 사 모으기까지 했다. 남자의 길을 걷는 내게 치욕스런 과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생동감은 그녀의 웃음을, 5월에 피어난 초록 잎사귀의 푸르름은 통통 튀는 그녀의 생기와 같았다. 아침 햇살의 싱그러움은 그녀의 새하얀 피부빛을 닮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그녀를 영화 <외전혜옥란>으로만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일일드라마 감독보다 창작욕이 왕성한 왕정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그녀의 필모그라피를 한 작품으로만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도신2><소림오조><의천도룡기><녹정기><이연걸의탈출><추남자> 등 장르불문하고 어떤 영화나 역을 맡아도 제 역할을 다해냈던 그녀다. 장난끼 어린 얼굴과 당찬 표정은 코믹에서, 태극권을 특기로 삼은 운동신경은 액션에서, 타고난 하드웨어는 에로에서 빛을 발했다. 굉장히 보폭이 큰 스펙트럼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든 자기화 해버리는 스펀지 같은 배우. 장난끼와 관능미 사이를 오가며, 백치미를 걷어내고 제대로 애교를 부릴 줄 아는 그녀는 도시의 그림자와 시끌벅적한 남자의 세계를 동경한 90년대 홍콩 영화계를 빛내준 꽃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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