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온에어>의 드라마 작가 영은(송윤아)은 어머니도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쓰는 것이 목표다. <온에어>는 영은이 신작 <티켓 투 더 문>을 통해 작품성은 물론 어머니의 지지까지 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영은의 어머니가 KBS <너는 내 운명>이나 MBC <흔들리지마>처럼 재벌 2세, 교통사고, 출생의 비밀이 뒤섞인 드라마를 좋아했다면 어땠을까. 또다른 드라마 제작기인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현빈)의 아버지가 밥상이 엎어지는 것도 모르고 보는 건 “저 죽일 년”이라고 외치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다. <티켓 투 더 문>이 꿈이라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현실이다. 그리고 2008년 한국 드라마는 꿈이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너는 내 운명>의 시청률은 40%대에 육박하고, 문영남 작가의 SBS <조강지처 클럽>은 온갖 논란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다. MBC <에덴의 동쪽>의 제작사는 건강악화로 물러난 나연숙 작가대신 <흔들리지마>의 이홍구 작가를 선택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혹은 ‘막장 드라마’가 프라임타임까지 넘본다. 반면 SBS가 높은 완성도를 목표로 편성한 ‘프리미엄 드라마’는 <달콤한 나의 도시>와 <신의 저울>을 남기고 사라졌고, <비포 앤 애프터>, <라이프 특별 조사팀> 등 MBC의 시즌제 드라마 시간대 역시 폐지됐다. 그리고 KBS는 <드라마시티>를 없앴다. 한국에서 ‘시도’를 용인하는 시간대는 사라졌다.

드라마라는 실용주의적 욕망 충족기

물론, 이 모든 것은 드라마의 대중성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2008년의 첫 히트작 MBC <뉴하트>는 2007년의 첫 히트작 MBC <하얀거탑>의 리얼리티에 선명해진 선악 구도와 멜로, 코미디를 더했다. 그 결과는 <하얀거탑>도 달성 못한 최고 시청률 32.0% (TNS미디어코리아기준)로 돌아왔다. ‘미드’의 유행과 함께 전문직 드라마와 에피소드식 구성 등은 한국에서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더 넓은 시청자층을 확보하려면 기존 요소의 결합이 필요했다. SBS <일지매>는 슈퍼히어로물과 에피소드식 구성을 사극과 결합하는 새로움 속에 삼각관계와 출생의 비밀이라는 기존 코드를 더했고, 치열한 드라마 제작기였던 <온에어>의 후반은 멜로가 부각됐다. 그러나 이런 결합은 위험한 줄타기와 같다. MBC <밤이면 밤마다>와 MBC <대한민국 변호사>는 문화재와 법정 소송을 소재로 했지만,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멜로 위주의 전개로 차별성을 잃었고, MBC <스포트라이트>는 방송사 기자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스토리라인이 빈약했다. 그리고 SBS <식객>은 원작에서 요리의 리얼리티를 가져온 뒤, MBC <주몽>을 연상시키는 형제들의 ‘요리 경합’을, <타짜>는 만화와 영화의 에피소드에 두 남자의 대립과 삼각관계라는 통속 코드를 버무렸다. 새로운 경향들은 기존의 흥행 코드 안에 흡수됐고, 그것들을 조금 다르게 치장하는데 봉사하기 시작했다.

MBC <베토벤 바이러스>와 SBS <바람의 화원>은 지금 드라마의 딜레마를 보여줬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강마에(김명민)를 중심으로 여러 캐릭터가 살아 숨 쉬던 활력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해졌고, 동성애 코드와 미술을 결합했던 <바람의 화원>도 후반부는 남녀 주인공의 멜로와 끊임없는 문제 해결에 치중하면서 전반부의 독특한 감성을 상실했다. 대중성 때문이건, 혹은 생방송에 가까운 제작 상황 때문이건, 한국 드라마는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들 사이의 딜레마에 시달렸다.

‘막장 드라마’의 득세는 제작자들이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포기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 ‘막장 드라마’는 높은 출연료의 배우도, 사전조사도, 심지어 주연 배우의 상식적인 연기력 없이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에덴의 동쪽>은 이 ‘막장드라마’의 효율성을 50부작 서사극에 적용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한류스타 송승헌이 70~80년대를 배경으로 거의 매 회 조폭들과 싸우고, 출생의 비밀과 삼각관계도 끼어든다. 한류스타로 수출을 기대하고, 중장년층으로 대표되는 기존 시청자층에 익숙한 코드로 안정적인 시청률을 노린다. 새로움은 없지만, 돈 벌 확률은 높였다. 사극을 통해 현실 정치의 문제를 거론한 KBS <쾌도 홍길동>과 ‘난세’에서 인간의 선택을 논한 KBS <최강칠우>가 큰 반응을 얻지 못한 뒤에 <에덴의 동쪽>이 등장한 것은 현재 시청자들의 선택을 보여준다. 그들은 드라마를 보며 현실을 바라보는 대신 성공에 대한 욕망, 내 가족에 대한 집착적인 애정, 적에 대한 복수를 즐겼다. ‘실용주의 정부’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주가와 땅값에 울고 웃는 시대에 실용적으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드라마가 성공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다. KBS <대왕세종>처럼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가 고민하는 드라마는 생존하기 힘들다. 그리고 KBS는 광고 판매를 위해 <대왕세종>을 KBS2로 옮겼다.

현실은 그렇게 퇴보했다

물론, 시청자에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욕망만이 남은 시장에서 작가와 감독은 어떤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 그것은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할 이유다. 이 드라마는 바로 지금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삶과 드라마가 서로를 어떻게 반영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직은 무언가를 위해 애쓰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힘이 센 것은 <너는 내 운명>처럼 연장과 억지 설정이 계속돼도 30% 이상의 시청률을 고수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너는 내 운명>이 중장년층 시청자들을 결집시킨 사이, 그들의 자식들은 게임과 인터넷, 케이블과 IPTV로 옮겨간다. 10~20대는 <너는 내 운명>을 보는 대신 인터넷에서 호세(박재정)의 ‘발연기’만 따로 모은 동영상을 보며 낄낄거린다.

올해 드라마가 빠져나간 자리를 오락 프로그램이 메운 것은 당연하다. 오락 프로그램은 적은 제작비로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다. 여기에 MBC <무한도전>의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처럼 시트콤적인 캐릭터 코미디와 느와르와 리얼리티 쇼를 한데 섞을 수 있는 창작력도 가졌다. 드라마 업계가 할 일은 당장의 돈을 벌 수 있는 ‘막장 드라마’의 제작이 아니라 다양한 드라마를 제작 할 수 있는 현실적인 토대를 마련해줄 수익구조를 찾는 것이었다. 50대 퇴직자도 인터넷으로 드라마를 다운받는 시대에 그들은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었는가. 불법 다운로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IPTV과 모바일에 대한 접근은 지지부진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평균 시청률은 10% 후반이었지만, 다양한 이슈를 일으키며 공연, OST등 여러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하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제작비 문제로 9회까지는 하나의 촬영팀으로만 촬영했다. 현실은 그렇게 퇴보했다.

물론 제작사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노력하고, 톱스타들의 출연료를 자진 삭감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출연료 폭등은 한류시장에만 기대 한류스타에게 엄청난 출연료를 준 제작사들로부터 시작됐다. 또한 제작사들이 제작비 절감 외에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방법은 무엇인가. 공중파 방송사들은 제작비 절감을 위해 공채 탤런트를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단막극이 모두 폐지된 상황에서 공채 탤런트들이 연기를 배울 곳은 없다. 당장의 돈과 미래를 맞바꾼 결과는 사라진 줄 알았던 제도를 부활시키고, 콘텐츠의 질을 떨어뜨린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위한 선택

그 점에서 KBS <태양의 여자>의 성공은 중요하다. <태양의 여자>는 출생의 비밀과 복수극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초반 시청률은 한자리 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통속성 안에 긴장감 넘치는 구성과 요즘 여성들의 욕망을 반영하며 완성도와 대중성을 모두 잡았다. 또한 중장년층을 타겟으로한 가족 드라마의 탈을 쓴 ‘막장 드라마’들이 나오는 동안, KBS <엄마가 뿔났다>의 김수현 작가는 기존 가족 제도의 균열 앞에 놓인 ‘어른’들의 고민을 통해 재미와 품위를 모두 지켰다. 두 작품의 성공은 결국 문제는 창작력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반전.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그들이 사는 세상>은 해외 수출로 적자를 보지 않았다. 문제는 시청률이 아니라 그 드라마에 가장 좋은 수익구조를 찾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동력이 될 수 있는 좋은 드라마, 더 다양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 업계가 해야 할 일은 제작비를 아끼며 ‘막장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주의와 막장 드라마, 블록버스터까지 모두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다.

그래서 2009년은 한국 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의 해일 수도 있다. 현실적인 수익구조를 찾으면서 미래를 준비할 새로운 동력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할 것인가. 앞으로 1년의 선택이 ‘그들이 사는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영은과 지오는 과연 그들과 그들의 부모가 함께 만족하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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