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주 아주 어릴 때 말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나는 내 자신에게 선물을 할 일이 생길 때면 속옷을 샀다. 하숙비를 착각한 아버지가 다른 달보다 10만원을 더 송금했을 때도, 회사에 입사해 첫 출장을 갔을 때도, 어느 남자친구가 제 신용카드를 내밀며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다 사!” 했을 때도 내가 산 건, 구두나 티셔츠가 아닌 속옷이었다. ‘야시시’하거나, 순결을 가장하기에 적합하거나, 혹은 삶아 입기에 적절한 속옷들. 그건 어쩌면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할 때마다 ‘내가 오늘 팬티를 갈아입었던가?’하는 생각이 맨 먼저 떠오른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크게 와 닿았던 사춘기 시절의 어느 순간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는지 모른다. 흠모하던 한 선배의 하숙집에 갔다가 그녀의 나달나달한 브래지어와 맞닥뜨렸던 대학교 1학년 때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도 모르겠고.

그저 사랑하는 그의 속옷이 엄마표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예전처럼 속옷을 사들이지는 않지만 오랜 버릇은 어지간해선 고쳐지지 않는 법인지 속옷은 내게 여전히 특별한 대상이다. 누군가의 속옷을 보게 될 일이 생길 때,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것 또한 그래서이리라. 내 애인의 것이든, 쭈그리고 앉은 외간 남자의 것이든 남자의 속옷과 마주할 때, 나는 죽은 쥐가 가로막고 있는 막다른 골목을 지나야만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여섯 살짜리처럼 두렵고 불안해진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길. 내가 방금 속옷 광고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쌔끈’한 데다 비싸기까지 한 속옷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내 눈에 띄는 속옷은-특히 내 남자의 속옷은- 남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치게 ‘쌔끈’할 필요는 없지만(그렇다면 그 남자를 오히려 의심하게 될 테니) 색이 바래서 후줄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그 남자의 겉옷이 내게 주었던 설렘, 딱 그만큼만 충족시켜 주면 좋겠다. 너무 직접적으로 브랜드 로고가 밴드에 새겨진 속옷을 입은 남자는 가슴팍에 커다란 로고가 새겨진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남자만큼이나 유치해 보여서 싫지만, 엄마가 사다 준 팬티를, 해지고 낡고 구멍이 나도 엄마가 다시 사다 줄 때까지 입고 다니는 남자는 한심해 보여서 더 싫다.

얼마 전까지 내가 사랑한 남자는 방송국 PD였다. 지가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이라고 첫사랑 여자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새로 사귄 여자친구도 있지만 그게 뭐 대술까 싶었다. 가난한 집 외아들에 마음까지 약해 이 사람 저 사람 일 다 참견하는, 결혼하면 피곤할 스타일의 남자였지만 그런 것도 내 사랑엔 별 문제가 안됐다. 그는 내가 최근에 본 남자 중 자기 몸의 아름다움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남자였고, 자기 몸을 돋보이게 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였다. 더 이상 뭘 바랄까. 게다가 그는 체크 셔츠를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만큼이나 멋지게 소화해내 나를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그의 셔츠는 언제나 몸에 꼭 맞지만, 젖꼭지의 위치와 겨드랑이 주름까지 남들이 눈치챌 수 있을 만큼 꼭 맞지는 않았다. 그의 셔츠는 그의 몸이 그곳에 있다는 것, 어깨와 가슴엔 적당한 근육이 붙어 있고 배는 납작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만 꼭 맞았다. 그토록 몸에 맞춘 듯한 셔츠를 찾아내기 위해서 모르긴 해도 몇 군데의 옷 가게를 돌며 수십 벌의 셔츠를 입어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래서 그가 더 좋았다.

굿바이, 지오선배

그의 직업은 드라마 PD, 제 입으로 “나보다 더 일 많이 한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고 할 만큼 PD 중에서도 특히 바쁜 PD, 잘디 잘게 쪼개 써도 모자랄 시간의 일부를 제 몸에 맞는 셔츠를 찾는데 바쳤다고 생각하면 그가 더 좋아졌다. 청바지를 입은 그의 허벅지도 좋았다. 허벅지는 꼭 맞지만 엉덩이 부분은 ‘할랑’하게 남는 그의 청바지 차림은 라이언 오닐의 청바지 차림 못지 않았다. 그의 청바지를 보며 그만큼이나 몸에 잘 맞는 그 남자의 속옷을 상상했다고 한다면 나는 음탕한 여자일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만 하겠다. 나는 그의 팬티가 ‘엄마표 팬티’와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어떤 색이든, 어떤 디자인이든 그의 겉옷이 주던 섹시하고도 풋풋한 느낌과 맞닿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처럼만의 하룻밤’을 보낸 뒤, 이불 속에서 드러난 것은 대한민국 남자들의 ‘표본 팬티’라고 해도 좋을, ‘엄마표’ 팬티였다. 그 뒤, 그 남자는 요즘 내가 한창 빠져 있는 패딩 베스트에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좋을 체크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지만 더 이상은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엄마표’ 팬티를 본 이상, 이제 그가 마이클 바스티앙(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남성복 디자이너의 이름이다)의 재킷과 팬츠를 멋스럽게 매치하고 나타난다고 해도 마음 설렐 일은 없을 것이다. 왜 제 몸에 맞는 셔츠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맬 정열은 있으면서 제 이미지에 맞는 속옷을 살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난 후줄근한 회색 사각 팬티는 싫어요” 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혹은 속옷 가게 점원에게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남자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 이른 바람일까?

어쨌거나 이제 정지오와는 안녕이다. 속옷만 아니었으면 주준영과 혈투를 벌여서라도 빼앗아볼까 했는데 맘이 변했다. 아무리 얼굴이 잘 생기고,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해도 ‘됐거든요’다. 난 이왕이면 속옷도 잘 입는 남자, 하나만 택하라면 차라리 겉옷보다 속옷을 더 잘 챙겨 입는 남자가 좋다. 별나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속옷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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