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영화 역시 장르적인 장식보다는 이야기의 뚝심 속에 빛나는 경우가 많다. 러닝타임 내내 쉬지 않는 수다로 혼을 빼놓은 <황산벌>도 그러했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힘으로 용감하게 걸어 나간 <왕의 남자>도 그러했으며, 이후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까지 그는 먼저 관객의 귀를 열게 하고 결국엔 마음을 열게 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감독이다.

“지금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해요. 이야기가 사라졌다. 서사를 잃었다고 떠들지. 하지만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어느 순간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패션화 되고, 패턴화 되고 있을 뿐 인 거죠.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요. 단지 우리가 그것을 재구성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단순히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목표에 더 가치를 둔다는 이준익 감독은 “좋아했던 영화의 대부분은 사회와 개인, 그 사이의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개인 이준익이 가진 영화적 취향은 자기 존재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해야만 했던 386 이전 세대의 공통적인 요소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런 연유로 그의 영화에서는 모두 가난했던 시절, 그 가운데 발견하는 낭만과 사랑에 대한 향수의 흔적이 깊이 베어나는지도 모른다.

“최근작을 보면 제가 일부러 촌스럽게 가는 건지도 몰라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찍는 영화가 싫은 사람이거든요. 그 시대의 트렌드에 맞추고 얼마 후면 촌스러워지는 그런 이야기가 싫어요. 그런 면에서 나는 올드한 사람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여전히 “시대와 환경이, 문명이 변화해도 변하지 않는 것.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표류하는 그 긴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원형”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가 추천하는 ‘타임리스 스토리’의 주문이 내려진 아름다운 이야기 5편이다.




1.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
1977년│감독 존 바담

“우리나라에는 존 트라볼타가 디스코를 열심히 추는 ‘춤쟁이’ 영화로만 인식 되었는데 말이지(웃음). 사실 이 영화는 그것 보다는 훨씬 묵직하고 촘촘한 결을 품고 있어요.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각기 다른 핏줄의 이주민 집단, 그들 중에 주류의 시스템과 사회로부터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맴돌아야 하는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죠. 이 젊은이들에게 디스코는 단순한 ‘춤’이 아니에요. 낭만이자 꿈이자 세상을 찌르는 가장 적극적인 몸짓인 거죠. 이 영화가 만들어낸 이야기적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것을 그 어떤 작품보다 심도 있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이탈리아 계 청년 토니(존 트라볼타). 가족도 일터도 어디 하나 맘 붙일 곳 없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이 남자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바로 디스코 장이다. 남다른 춤 실력과 ‘충만한 필’로 무대를 장악하는 디스코의 황제, 토니는 마을 친구들과 아가씨들의 추종과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당시 존 트라볼타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토요일 밤의 열기>는 등 비지스의 흥겨운 음악과 함께 전 세계를 디스코 열풍으로 이끌기도 했다.



2. <집시의 시간> (Dom Za Vesanje)
1989년│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유랑하는 인간들이 모인 작은 사회. 집시의 삶이라 해도 그들 역시 커다란 사회 속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지는 인간들이란 말이죠. 그렇게 소외된 존재끼리의 나누는 질투가 있고,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배신이 있고, 또 사랑이 있어요. 하지만 신기한 것이 그 많은 드라마들이 구구절절 개인사로 점멸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 춤을 추더라고.”

사생아로 태어난 한 집시청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드라마. 가난하고 되는 일 없는 페란에게 세상이란 잔인하고 비정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한쪽 알이 빠진 안경처럼 현실을 눈감을 수 있는 절반의 탈출구 역시 마련해준다. 가난과 사랑, 범죄와 배신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한바탕 굿판처럼 풀어놓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기묘하고 독창적인 연출력은 1989년 칸 국제영화제가 감독상으로 화답했다. 연기경험이 전무한 실제 집시들을 출연해 자신들의 언어로 펼쳐놓는 연기와 음악은 사실적인 동시에 진실하다.



3.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년│감독 오슨 웰즈

“어떤 영화들은 몇 년 만 지나도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어떤 영화들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뜨거워요. 그게 바로 고전이, 클래식이 가지는 힘인 거죠. <시민 케인>이 지난 영화 100년사에 늘 1등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의 드라마트루기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펼쳐지는 한 개인의 욕망에 대한 의구심. 과연 내가 쫓고 있는 성공이 내가 찾으려 하던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그걸 고민하잖아요. 결국엔 <시민 케인>의 이야기를 능가하는 영화를 나 역시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아요.”

미국 언론계의 대부 찰스 포스터 케인의 죽음과 그가 죽기 전 남긴 ‘로즈버드’라는 말의 암호를 풀기 위해 케인의 지난 일생을 역 주행해 파헤쳐나가는 신문기자. 이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시민 케인’의 모습은 막강한 파워를 가진 ‘신문왕 케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영화를 연출 했던 당시 25세였던 오슨 웰즈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번뜩이는 <시민 케인>은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라는 타이틀을 영구 획득 하면서 세계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4.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감독 존 슐레진저

“중학교인가, 여하튼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영화였는데 숨어서 봤던 영화에요. 텍사스 촌뜨기가 젊은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호기롭게 뉴욕에 입성해요.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인 존 보이트가 젊은 모습으로 나오죠. 그리고 그곳에 먼저 와 비열한 방법으로 생존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한 도시의 패배자를 만나요. 이 패배자가 촌뜨기를 등쳐먹으려 과정을 보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인간군상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요.”

풍운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입성한 조(존 보이트)는 남자에 굶주린 뉴욕여성을 상대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지만, 이 냉정한 도시는 텍사스 촌뜨기의 희망사항에는 영 무관심하다. 그렇게 돈도, 꿈도 바닥이 날 때쯤 조는 한때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절름발이 부랑자 렛쪼(더스틴 호프먼)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점점 목을 조여 오는 빈곤, 꼬이기만 하는 인생. 결국 조와 렛쪼는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 행 버스에 오른다. 따뜻한 태양이 비치는 그 곳으로 향하며, 카우보이 옷을 벗어 던지는 조는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지만, 폐병으로 고생하던 렛쪼는 미쳐 플로리다에 닿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그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한다.



5. <헤드윅> (Hedwig And The Angry Inch)
2000년│감독 존 카메론 밋첼

“플라톤의 성 담론을 보면 원래 남성과 여성이 하나였다는 말이 나와요. 원래 하나였는데 남, 여라는 성으로 갈리게 된 인간. 또한 원래 하나였지만 동과 서로 갈린 독일의 모습. 이 시대와 개인의 비극이 교접해 잉태한 인물이 바로 헤드윅인 거죠. 동독과 서독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시대를 한발을 절면서 통과해내야 했던 한 인물에 대한 영화에요.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다소 감성적으로 혹은 너무나 유희적으로만 소비하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헤드윅>이 너무나도 철저한 이성적 논리 위에 만들어진 감성적인 이야기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독일 남자 한셀. 그는 미군병사의 결혼 제안으로 성전환 수술까지 했지만 싸구려 시술로 여전히 ‘성난 1인치’가 남아있는 기괴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엄마의 이름 ‘헤드윅’으로 바꾸고 미국으로 떠나지만 이 땅에서 ‘그녀’가 맛보는 것은 달콤한 꿈이 아니라 쓰디쓴 배신뿐이다. 존 카메론 밋첼의 전율 넘치는 연출이 돋보이는 <헤드윅>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이준익 감독이 “시나리오 단계에서 보고 이건 된다”라는 확신을 얻어 한국에 수입해 들여온 영화. 이후 조승우 등이 출연한 뮤지컬로 제작되면서 국내에서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했다.


“이야기는 기본이고 그 이상을 찍는 영화가 될 것”



660년 삼국시대의 <황산벌>, 연산군 시대의 <왕의 남자>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포연 위에 아득하게 불러 본 <님은 먼 곳에>까지. 이준익 감독은 언제라도 과거로 떠날 수 있는 타임머신과 그 시대와 현재를 잇는 튼튼한 동아줄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사람이다. 새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역시 4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과 같은, 1589년 기축년. 당시 ‘기축옥사’라는 사건을 시작으로 “세상을 뒤집고 싶은 왕족 출신의 서자와 그 인간을 꺾고 싶은 기생의 자식,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이상을 믿지 않는 맹인 검객과 왕족 출신의 남자를 사랑 했던 한 기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칼싸움, 액션영화”라고.

“세상 밑바닥에서 세상 꼭대기를 꿈꾸던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맞이하는 이야기에요” 박흥룡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올해 3월 크랭크인을 앞두고 현재 막바지 캐스팅 중이다. “이야기는 기본이고 그 이상을 찍는 영화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이준익 감독. 동짓달 기나긴 밤 춘풍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어두었던 그의 새로운 이야기는 ‘정든 관객’ 오시는 밤 스크린 위에서 또 다시 굽이굽이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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