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깎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가 이 보다 또렷할까. 단정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목소리. 어디 하나 모난 구석 없어 보이면서도 무엇 하나 대충 뭉뚱그린 것도 없을 것 같은 김소은에게는 갓 여고생 티를 벗은 스물하나 답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다. “캐스팅이 금방 결정 됐어요. 감독님이 이미 제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고 채시라 언니랑 닮았다고 생각 하셨대요”라며 웃는 얼굴은 아직 앳된 소녀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천추태후를 연대 별로 나눠서 조목조목 설명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이 배우 앞에 ‘아역’이라는 수식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주와 서민을 오가야 하는 벅찬 계절

“원래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인물 분석을 많이 하는 편”이라는 그녀는 KBS <천추태후>를 앞두고 많은 사극을 보며 특유의 말투와 연기 스타일을 연습했다. 고려사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은 기본, 성인 연기자로의 연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채시라가 출연한 사극들을 참조하는가 하면, 천추태후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해서 서태후에 대한 책도 읽었다. 처음 하는 정통 사극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일정이 꼬이면서 전혀 다른 배경의 KBS <꽃보다 남자>를 동시에 촬영하게 되자 고민은 두 배가 되었다. 영화 <두 사람이다>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 경험은 있었지만, 인물의 성격은 물론 현장의 분위기마저 판이하게 다른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그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연기를 하면서 어려움에 빠질 때, 답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김소은이 찾는 사람은 언제나 작품의 감독님이다. “저보다 넓은 시각으로 작품을 보고 계신 분이잖아요. 저는 언제나 감독님들의 조언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눈물 연기를 할 때도 슬픈 생각을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인물을 이해해야 울 수 있다는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그날의 교훈들은 또박또박 기억 속에 적어 둔다. “MBC <자매바다>로 데뷔를 했는데, 그땐 연기가 어찌나 서툴렀던지 감독님께 거의 매일 야단맞았어요. 그래도 그때의 경험이 있어서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잘해야지, 못하지 말아야지, 그런 오기 같은 게 생겼거든요.”

“계획이 많은 편이에요, 멀리 내다보고 단계를 미리 생각해요”

모든 상황에서 배움을 얻는 사람에게 나쁜 추억이란 없다. “<꽃보다 남자>를 촬영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어요. <천추태후>를 찍을 때 추운데서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제 웬만한 건 힘들지도 않은가 봐요 . 2부에서 덩치 큰 아저씨랑 싸우는 신 보셨죠? 그런 건 정말 될 때까지 계속 호흡을 맞춰보는 수밖에 없거든요.” 듣기에도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김소은은 웃는다. 지나가버린 일을 홀가분하게 생각하는 웃음이 아니다. 아침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던 그 경험 속에서도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익혔음을 스스로 알기에 가능한 여유의 웃음이다.

“계획이 많은 편이에요. 멀리 내다보고 단계를 미리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연기를 시작 하고 나서도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영리함이다. 과거와 미래를 잘 조합해 현명하게 지금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녀를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그 영리함은 얄밉기 보다는 기특하다. 자신이 또박또박 적어 놓은 계획을 따라 그녀가 앞으로도 잘 해 나가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아역 배우들이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 <천추태후>가 어쩐지 궁금해진다. 힘주어 쓴 글씨는 그 자체로도 선명한 모양새를 갖추지만, 뒷장에 남겨지는 무늬로 더욱 뚜렷해지는 법이니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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