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히트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그 다음을 유지해 나가는 일이다. 혜성같이 등장했던 신인 작가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 지는 경우가 허다한 드라마 시장에서 1996년 MBC <짝>을 시작으로 <진실>, <맛있는 청혼>, <결혼하고 싶은 여자>, <메리 대구 공방전>에 이어 지난 해 KBS <태양의 여자>를 내놓고 올해로 데뷔 14년을 맞이하는 김인영 작가는 보기 드물게 안정된 커리어를 쌓아 온 드라마 작가다.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유연하게 넘나들고 심리 묘사와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강점인 그는 특히 <태양의 여자>에서 어린 시절 용서받지 못한 잘못을 저지른 신도영(김지수)과 그 피해자였던 윤사월(이하나)의 대립과 갈등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내며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작가와 극본이 갖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승률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대중의 감성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균형감을 지니고 있다. 브레히트의 희곡에서 드라마의 모티브를 떠올리고 발레와 클래식을 좋아해 언젠가는 발레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무엇을 보든 드라마를 떠올리는 이 열정 넘치는 작가에게도 물론 작가 지망생 시절이 있었다. 이십대 초반 공모전 당선 후 단막극과 <짝>을 통해 정식으로 데뷔하기까지,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건 에베레스트 등반대만 하는 일이 아니야. 나도 매일 주저앉고 싶은 나 자신과 싸우면서 산다구”라는 <메리 대구 공방전>의 대사처럼 길었던 기다림의 시간 동안 그를 뜨겁게 만들었던 드라마들에 대해 들어 보았다.

MBC <두 권의 일기>
1990, 극본 최성실, 연출 이진석

“1990년에 MBC <두 권의 일기>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2부작 특집극이었는데 1편에서는 채시라 씨가 70년대 여고생으로 나와서 로맨티스트인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음악다방에 가서 클리프 리차드 노래를 듣는 그 당시 얘기를 보여주고 2편에서는 90년대가 배경으로 채시라 씨는 여고 선생님, 최진실 씨는 그 반 학생으로 나와요. 가수 변진섭을 좋아하고 과외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가출도 하는 여고생. 그렇게 세대가 다른 두 여자의 이야기를 굉장히 독특한 구성을 통해 흥미로우면서도 찡하게 풀어 낸, 좋은 드라마였어요.”

MBC <우리들의 천국>
1990, 극본 최성실, 연출 이진석

“그리고 그 해에 MBC <우리들의 천국>에도 최진실 씨가 홍학표 씨와 사랑에 빠지는 가짜 대학생 ‘승미’라는 역으로 출연했어요. 당시 드라마에서 여자 캐릭터는 착하고 순종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승미라는 애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그러다 백혈병으로 죽는 독특한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승미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감정을 시청자로서 이해하게 됐던 거죠. <태양의 여자>를 보신 분들이 도영이의 거짓말은 나쁘지만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계속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게 아마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MBC <폭풍의 계절>
1993, 극본 최성실, 연출 이관희

“1993년에 방송된 MBC <폭풍의 계절>의 홍주(김희애)와 진희(최진실) 캐릭터도 좋았어요. 그렇게 뜨겁고 강렬한 여자들, 차별화된 캐릭터에 끌리는 편이에요. 공교롭게도 다 최성실 작가의 작품이고 최진실 씨가 출연했는데, 이런 작품들에는 90년대 드라마 특유의 극적인 스토리가 갖는 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태양의 여자>의 시청률이 높지 않던 초반에는 ‘이런 설정의 드라마가 90년대 초반에 나왔으면 대박 났을 텐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고, 뻔해 보이는 설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쓰는 게 재미있거든요”

“이제는 유쾌한 이야기로 돌아갈 차례”

지난 해 <태양의 여자>를 통해 <10 아시아>가 선정한 ‘2008년 최고의 작가’로 뽑히기도 한 김인영 작가는 지금 올 하반기에 방영 예정인 MBC 미니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좋은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권석장 감독과 다시 만난다. 뚜렷한 콘셉트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발랄한 <메리 대구 공방전> 다음에 강렬한 <태양의 여자>를 썼으니까 이번에는 유쾌한 이야기로 돌아갈 차례”라며 즐거운 눈빛을 보이는 그의 다음 작품을, 이번에도 역시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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