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내 꿈이 될 수 있을까요?” 꿈은 많지만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자신감은 넘치지만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모르는 열여덟 소녀는 재차 물었다. “만약 아니면?” KBS <낭랑 18세>의 정숙은 웃으며 말했지만 선택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처럼 실패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5년 전 정숙을 연기하며 주목 받는 신예로 떠올랐던 한지혜에게도 마찬가지다. 교복에 깻잎 머리가 어울리던 어린 여배우는 나이를 먹으며 기존 이미지를 이어가거나, 확장하거나, 배반하는 방식으로 순간순간 선택을 했다. 결과는 가끔 안일할 정도로 무난했고, 가끔 헉 소리 나게 실패적이었다. 착실히 스타로서의 네임밸류를 쌓는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먼 궤적. 확률의 지뢰밭에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2008년을 지나 현재 서 있는 지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이다.

우수한 성적이 스타성으로 귀결되지 못했던 시간들

1위와 9위. 지난 2008년 한지혜가 출연한 두 편의 드라마 KBS 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와 MBC 창사특집극 <에덴의 동쪽>의 평균 시청률 순위(AGB 닐슨 기준)다. 시청률이 인기로 환산되는 우리나라 드라마 시장에서 최고의 블루칩으로 인정받아 마땅한 성적표지만 그녀는 그 성적을 고스란히 자신의 스타성을 높이는데 쓰지 못했다. <미우나 고우나>의 나단풍은 한지혜의 연기로 좀 더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가 될 수 있었지만 KBS 일일드라마에서 계속해서 변주된 팀장님 혹은 실장님의 여자 버전 이상의 역할을 해주진 못했고, <에덴의 동쪽>은 지현이 플롯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던 초반부에 이미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이 그녀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두 번의 선택으로 언제나 한 걸음 정도 부족해보였던 그녀의 경력에 오르막 계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영화 <싱글즈>에서 철없는 척하지만 지독히도 현실적인 정준의 어린 여자친구 지혜로 실질적인 연기 데뷔를 했던 그녀는 여기에 상큼함은 더하고 계산적인 면은 뺀 <낭랑 18세>의 정숙 역으로 자신이 제법 잘 할 수 있으면서 남들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았다. 하지만 드라마 속 정숙과 혁준(이동건)의 인기와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갔던 영화 는 혈액형별 사랑유형만큼이나 뻔하고 안일한 작품이었고, 이미지를 바꿔 정통 멜로에 도전한 KBS <구름계단>은 시청률 4%에 머물렀다. 한 번만 더 치고 올라오면 스타로서의 레벨 자체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때마다 마지막 한 걸음이 부족했다.

그런 그녀가 “KBS 일일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시청률이 보장되니까 시청률에 대해 100% 확신”을 갖고서 <미우나 고우나>를 선택해 자신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리고, <에덴의 동쪽> 지현 역을 통해 연기에 대한 욕심을 내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두 작품 사이의 휴식기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그녀는 <미우나 고우나>의 성과를 통해 젊은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는 <에덴의 동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시키고 ‘배우 한지혜가 연기하는’ 지현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을 끝낼 때마다 가능성과 아쉬움을 남기고 한 발 물러선 채 제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던 그녀가 두 작품을 연속적 작업으로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선 것이다.

가능성을 저력으로 바꾼 최초의 시도, 그리고 그 이후

최근 <에덴의 동쪽> 여성 캐릭터 중 지현의 무게감이 갈수록 커지는 건 그래서 고무적이다. 8부까지 남자에게 목이나 매는, 그래서 “시놉시스를 보고 다들 별로라고 생각했을” 지현이었지만 한지혜는 나중에 상처를 극복하고 가공할 의지를 보여준다는 말에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심정으로 그녀를 선택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동욱(연정훈)의 원수 신태환(조민기)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만 자신의 아이 태호에게 깨끗한 회사를 물려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떻게든 전진하는 지현의 모습은 가끔 화면 안에서 신태환에 맞먹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탁월하다고 까진 할 수 없지만 조금은 붕 뜬 톤과 감정으로 격앙된 모습을 연기하던 <미우나 고우나> 시절보다 연기적으로 훨씬 진일보한 모습이다. <에덴의 동쪽>의 높은 시청률을 스스로 견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인기의 관성을 최근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끌어오는 뚝심은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 중 가장 눈에 띈다. 8년여의 연예계 활동에도 불구하고 저력이란 말보단 가능성이란 말이 어울렸던 이 여배우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제법 단단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최근 그녀가 패셔니스타로서의 욕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은 이 일련의 상승 기류에 비춰볼 때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 지난 MBC <연기대상> 사회자로서 보여준 슈퍼 모델 출신다운 신체비율과 의상 감각은 시청자들에게 그녀가 키 크고 예쁜 트렌디한 여자 연예인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시켜줬다. 대중적 인지도와 연기 발전, 그리고 육체적 아름다움의 과시의 트라이앵글은 연기를 업으로 삼은 여자 연예인이 스타의 아레나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최대 공약수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녀가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이룬 주목할 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녀는 아직도 저력보다는 가능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언제나 한 걸음 모자라다고 느껴지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이룬 것 이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검이 가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금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서 잠깐 반짝했다 비슷한 이미지의 또 다른 배우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걸 몇 번씩” 본 이 예쁘고 연기 욕심 많은 여배우는 어떤 선택을 통해 대체불가능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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