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가 있다. 그들은 한 때 친구였고, 한 때는 연인이었으며, 결국 고백과 싸움과 엇갈림을 거쳐 이별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들은 서로에 대한 바람과, 작은 노력과 큰 우연으로 어느 거리에 선다.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느낌. 적당한 거리. 잘 지냈냐는 말. 죽을 것 같은 사랑이 지나간 뒤 다시 만난 일상의 한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무엇이라 말하고, 무엇이 되길 바랄까. 어쩌면, 그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현빈이 그의 표정에 일상의 무게를 담게 된 것은. MBC 일일 시트콤 <논스톱 4>에서 대학시절 행복한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현빈과 한예슬은 5년 뒤 동창 모임에서 재회한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감정에 펑펑 울던 그 시절은 지난 지 오래다. 그 뜨거운 안녕 뒤에도 일상은 계속되고, 그들은 서로의 달라진 현재를 마주한다. 두 사람은 서로 무엇을 이야기할까. <논스톱 4>는 거기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이야기를 끝냈다. 그건 청춘의 한 시기 뒤에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청춘 시트콤의 예상치 못한 결말이자, 현빈의 시작이기도 했다.
얼굴 한 켠에 삶의 그늘이 드리워진 배우
<논스톱 4>를 시작으로, 현빈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없는 배우가 됐다. 그에게 엔딩은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일상의 시작이었다. MBC <아일랜드>의 강국은 중아(이나영)와 이혼한 뒤 새 인생을 시작하고,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진헌과 삼순(김선아)은 뚜렷한 결론 없이 ‘연애중’인 상태로 산다. KBS <눈의 여왕>에서도 그는 연인의 죽음 뒤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현빈의 드라마에는 헤어진 연인과의 눈물겨운 이별이나 연인과 이마를 맞대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로맨틱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현빈은 희극이나 비극대신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을 사는 한 남자의 그늘진 표정을 보여준다. <논스톱 4>처럼 시트콤의 발랄한 분위기 안에서도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을 애써 참으며 평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던 모범생,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떠나버린 사랑 때문에 홀로 울다가도, 새로운 연인 앞에서는 치기 어린 아이 같은 모습까지 보여줄 수 있는 레스토랑 사장. 마치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가 앓는 녹내장처럼, 드라마 속에서 현빈의 일상은 어쨌든 견뎌내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치료는 가능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하고, 3개월마다 수술을 해야 하는 병 같은 인생.
여주인공을 시한부 인생으로 설정한 <눈의 여왕>에서도, 현빈에게 눈길이 갔던 건 비극적인 사랑에 아파할 때가 아니라 죽은 친구 때문에 8년간을 방황하며 살았던 태웅의 무게가 고스란히 화면 위에 드러날 때였다. 무엇을 말하든, 침착한 표정으로, 조금은 그늘진 모습을 보여주던 현빈의 표정.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가 복잡한 가정사와 병에 마음이 무너져 준영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 조금 구부정한 그의 뒷모습이 무겁게 눌려 있는 듯한 느낌을 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많은 것들”에서 연기에 필요한 동작들을 가져오고, 지오를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사람”으로 연기하고 싶었던 현빈은 일상성을 넘어 일상이 품은 삶의 그늘을 드라마 안으로 옮겨왔다. 그것은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소지섭이 보여준 극단적인 비극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봉태규가 보여준 볼 품 없는 청춘의 일상과도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기다.
일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다
그래서 현빈은 드라마 속에서 그 널찍한 등으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현빈을 테크닉적으로 아주 뛰어난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일상과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 그리고 그것을 젊은 배우의 몸으로 연기토록 해야할 때, 인정옥 작가와 노희경 작가는 모두 현빈을 찾았다.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 안에 연애의 일상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의 느릿한 말투와 그의 그늘진 표정이 없었다면 그가 말하는 연애에 대한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와 닿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빈이 그의 널찍한 등만큼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의 무게가 더욱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도, 애틋한 어머니도, 사랑스러운 애인도, 녹내장도 모두 끌고 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드라마 감독을 하나의 일상으로 통합해낸다. 그는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귀여운 아들이고, 닭살을 떠는 연인이기도 하며, 제작 현장을 매끈하게 지휘하는 드라마 감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다양한 일상이 하나씩 쌓이면, 그는 모든 스트레스를 담고 살아가야 하는 지오가 된다. 지오가 준영과 결별 선언을 할 때의 긴장감은 그 순간 현빈이 폭발적으로 감정을 내쏟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갑갑한 일상이 하나씩 쌓인 결과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빈이 평이해 보이는 일상에서 얼마나 예민하게 감정의 파고를 잡아내는지 보여준다. 그는 지금 젊고, 스타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연기를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배우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이 일상의 이야기 뒤에는 현빈의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연기를 했던 그는 최근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로 ‘상상력’이 필요했다던 정신병자 연기를 시도했다. 또한 <그들이 사는 세상> 뒤에는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다시 연출을 맡는 드라마 리메이크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일상 안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줬던 현빈이 더 다양한 연기를 욕심내기 시작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상 안에서 청춘의 그늘을 보여주던 배우는 어느새 작품 하나를 책임 질만큼 든든한 어깨를 가졌고, 이제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끝났다. 하지만 지오도, 준영도, 현빈도 계속 자신의 일상을 살아간다. 현빈은 그 일상 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얼굴 한 켠에 삶의 그늘이 드리워진 배우
<논스톱 4>를 시작으로, 현빈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없는 배우가 됐다. 그에게 엔딩은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일상의 시작이었다. MBC <아일랜드>의 강국은 중아(이나영)와 이혼한 뒤 새 인생을 시작하고,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진헌과 삼순(김선아)은 뚜렷한 결론 없이 ‘연애중’인 상태로 산다. KBS <눈의 여왕>에서도 그는 연인의 죽음 뒤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현빈의 드라마에는 헤어진 연인과의 눈물겨운 이별이나 연인과 이마를 맞대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로맨틱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현빈은 희극이나 비극대신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을 사는 한 남자의 그늘진 표정을 보여준다. <논스톱 4>처럼 시트콤의 발랄한 분위기 안에서도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을 애써 참으며 평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던 모범생,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떠나버린 사랑 때문에 홀로 울다가도, 새로운 연인 앞에서는 치기 어린 아이 같은 모습까지 보여줄 수 있는 레스토랑 사장. 마치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가 앓는 녹내장처럼, 드라마 속에서 현빈의 일상은 어쨌든 견뎌내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치료는 가능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하고, 3개월마다 수술을 해야 하는 병 같은 인생.
여주인공을 시한부 인생으로 설정한 <눈의 여왕>에서도, 현빈에게 눈길이 갔던 건 비극적인 사랑에 아파할 때가 아니라 죽은 친구 때문에 8년간을 방황하며 살았던 태웅의 무게가 고스란히 화면 위에 드러날 때였다. 무엇을 말하든, 침착한 표정으로, 조금은 그늘진 모습을 보여주던 현빈의 표정.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가 복잡한 가정사와 병에 마음이 무너져 준영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 조금 구부정한 그의 뒷모습이 무겁게 눌려 있는 듯한 느낌을 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많은 것들”에서 연기에 필요한 동작들을 가져오고, 지오를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사람”으로 연기하고 싶었던 현빈은 일상성을 넘어 일상이 품은 삶의 그늘을 드라마 안으로 옮겨왔다. 그것은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소지섭이 보여준 극단적인 비극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봉태규가 보여준 볼 품 없는 청춘의 일상과도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기다.
일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다
그래서 현빈은 드라마 속에서 그 널찍한 등으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현빈을 테크닉적으로 아주 뛰어난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일상과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 그리고 그것을 젊은 배우의 몸으로 연기토록 해야할 때, 인정옥 작가와 노희경 작가는 모두 현빈을 찾았다.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 안에 연애의 일상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의 느릿한 말투와 그의 그늘진 표정이 없었다면 그가 말하는 연애에 대한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와 닿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빈이 그의 널찍한 등만큼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의 무게가 더욱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도, 애틋한 어머니도, 사랑스러운 애인도, 녹내장도 모두 끌고 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드라마 감독을 하나의 일상으로 통합해낸다. 그는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귀여운 아들이고, 닭살을 떠는 연인이기도 하며, 제작 현장을 매끈하게 지휘하는 드라마 감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다양한 일상이 하나씩 쌓이면, 그는 모든 스트레스를 담고 살아가야 하는 지오가 된다. 지오가 준영과 결별 선언을 할 때의 긴장감은 그 순간 현빈이 폭발적으로 감정을 내쏟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갑갑한 일상이 하나씩 쌓인 결과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빈이 평이해 보이는 일상에서 얼마나 예민하게 감정의 파고를 잡아내는지 보여준다. 그는 지금 젊고, 스타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연기를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배우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이 일상의 이야기 뒤에는 현빈의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연기를 했던 그는 최근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로 ‘상상력’이 필요했다던 정신병자 연기를 시도했다. 또한 <그들이 사는 세상> 뒤에는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다시 연출을 맡는 드라마 리메이크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일상 안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줬던 현빈이 더 다양한 연기를 욕심내기 시작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상 안에서 청춘의 그늘을 보여주던 배우는 어느새 작품 하나를 책임 질만큼 든든한 어깨를 가졌고, 이제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끝났다. 하지만 지오도, 준영도, 현빈도 계속 자신의 일상을 살아간다. 현빈은 그 일상 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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