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기자]
‘해피 엔드’(1999) ‘사랑니’(2005) ‘은교’(2012) ‘4등’(2016)의 정지우 감독이 신작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관객을 마주한다. 깊숙이 은근하게 베어 무는 정 감독의 시선은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푸릇한 첫사랑 멜로에도 정지우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1975년 동갑내기 대학생 미수(김고은 분)와 고등학생 현우(정해인 분)가 처음 만난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0여년에 걸친 사랑이, 청춘이 담겨 있다. 개봉 전날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선연하게 들려주었다.
10. 이야기의 출발은 1994년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하거나 각별한 의미가 있나?
정지우: 사실 1994년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고민과 관심이 있었던 시기는 1997년, 1998년이다. 더 기준값인 것 같다. IMF 그 다음에 무언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기분…. 어느 시간이 지나고는 정말 화학적으로 달라진 것 같다. 그 시기를 넘으면서.
10. 영화에는 추억을 자극하는 코드가 곳곳에 심어져 있다. 1975년생에 94학번, 창신동에서 태어나고 스무 살까지 살았던 사람으로서 미수와 현우의 이야기에 감정 이입이 용이했다.
정지우: 창신동에서? (웃음) 사실은 알고 보면 실연 이야기가 있다든지 뭐 그런 느낌도 드는데.
10. (웃음) 그렇지는 않다. 영화의 배경지로 창신동을 선택한 이유는?
정지우: 로케이션을 많이 다녔다. 장르가 멜로드라마여서 삶의 궤적이 너무 어려워 보이는 상태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기준값을 두고. 완전히 쇠락한, 재개발을 코앞에 둔 단지들은 많다. 서울 경기 일원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그런데 창신동은 무언가 새것이라고 아주 부분 부분 건물이 들어오긴 했지만,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반짝거리는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간이 참 특이했다. 되게 오래된 옹벽이 시간에 걸쳐서 쌓인 느낌.
10. 도입부에 ‘유열의 음악앨범’ 첫 방송을 하는 DJ 유열이 “방송, 사랑, 그리고 비행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출발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든다는 겁니다”라고 하는 멘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귀에 쏙 박힌다. 소설로 치면 첫 문장처럼. 시나리오에서 추가된 부분인가? 아니면 방송에서 실제 사용했던 멘트인가?
정지우: (당시 ‘유열의 음악앨범’)작가님이 첫 방송에 대본을 썼을 때 메모 내용이다. 실제 그 내용으로 첫 방송을 했다.
10. 현우는 처음 미수의 빵집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콩이 들어간 음식을 찾는다. 이후 은자는 애정이 듬뿍 담긴 ‘두부’라는 별명으로 현우를 부르고. 은자 역의 김국희 배우에게 자꾸 눈길이 가더라. 배우 자체가 추억 속 뭔가 애틋하고 그리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정지우: 정말 좋은 배우다. 오디션을 두 번 세 번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묻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알았는데 뮤지컬, 연극 무대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배우였다. 내가 몰랐던 거고. 김국희 배우는 매체 즉 영화 연기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스탭들이 협력을 잘하기도 했지만 시대별로 이 사람의 늙어가는 과정이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10. 싱크대에서 물을 사용하면 욕실에서 온수가 아니라 찬물만 나오는 설정도 흥미로웠다. 우연과 필연을 반복하는 미수와 현우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도 같았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서로에게 영향이 가는….
정지우: 이 표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멋지다. (웃음)
10. 현우의 친구들은 상처에 잠겨 있는, 혹은 고여 있는 ‘아픈 청춘’이다. 똑같이 실수했는데 현우만 멀쩡하게 사는 것 같고, 현우만 용서받는 것 같자 거부감을 표한다. 그 친구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정지우: 친구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 중에 누군가가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더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라고. 그게 너무 두려우니까 무리를 더 단단하게 체결하고 싶은 것이다.
10. 멜로드라마의 특성상 배우들의 연기에 크게 의지하는 작품이다. 혹 특별한 디렉션이 있었는지?
정지우: ‘캐스팅이 연출의 절반이다’라는 속설이 있다. 스타를 캐스팅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기질 등이 캐릭터와 어울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관점에 대한 조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고은과 정해인 두 배우가 정말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사실 멜로드라마에서는 보통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아끼고 배려하는 기분까지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진짜 난처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재난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고은과 정해인 두 배우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남매처럼 찍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게 해낸 것 같다.
10. 미수와 현우는 시나리오 초고부터 완고까지 캐릭터의 변화가 컸나? 더불어 김고은과 정해인 배우 캐스팅 후 변한 부분이 있다면?
정지우: 초고에서부터 많이 변한 셈이다. 초고의 매력은 여성의 내면이 아주 미묘하고 모호하게 그려진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고유한 시나리오였다. 그렇게 출발을 했고, 그 다음에 두 배우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좀 더 두 사람과 어울리는 형태의 디테일이 모아졌다.
10. 정해인 배우의 매력을 꼽자면?
정지우: 처음에는 당연히 몰랐던 영역인데 정해인 배우는 정말 진심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진짜 무엇이든. 지치지도 않나 이런 마음이 들 만큼.
10. ‘은교’ 이후 현장에서 다시 만난 김고은 배우는 어떠했나?
정지우: 정말 좋았다. 이심전심. 구구절절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풀어야 되는 것이 없으니까, 진짜 말을 많이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작업했다. 그리고 김고은 배우가 ‘은교’ 이후에 상대했던 여배우가 전도연, 김혜수, 윤여정이다. 이건 내 추정인데 무언가 선망이 있던 배우와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들과 작업을 하면서 되게 좋은 배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계춘할망(2016)에서 윤여정, 김고은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정지우: 진짜 잘 어울리지 않나? 원래 김고은 배우가 할머니하고 되게 유별하다. 할머니하고 서울에서 꽤 오래 같이 살았던 시기가 있어서. 그런 궤적을 쭉 겪으면서 20대를 보낸 김고은 배우가 내 앞에 정말 대견하게 힘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인이 현장의 이모저모 한 것을 책임을 져 주려고 막 애를 썼다. 스탭들도 다독이고, 급하면 자기가 먼저 뛰어가고…. 주연배우가 그런 것을 해주면 현장이 되게 부드러워진다.
10. 김고은 배우와 다시 작업을 한다면, 어떤 장르로 만나고 싶은지?
정지우: 해본 적 있고.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
10. 대사 중에서 미수가 “제발 현우야. 뛰지마. 다쳐”라는 말는 참 아프더라. 이별용이 아니라 떠나갈 마음도 다시 붙드는 대사였다.
정지우: (웃음) 그런가?
10. 출판사 대표 종우(박해준 분)가 베스트셀러를 일궈낸 미수에게 “목숨 걸고 기뻐해 봐. 목숨 걸고!”라는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정지우: 정말 중요한 대사다.
10. 사실 종우는 더 보고 싶은 인물이었다. 잠깐의 등장에도 솔깃해지는 인물이라서. 애초부터 그만큼의 비중이었나?
정지우: 2005년 이후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웃음) 등장의 베이스 자체가 영화 절반 이내에 있어서 무언가 존재감이 커지기에는 한계가 좀 있었다. 되게 공들이고, 잘해 보고 싶은 캐릭터였다. 그래서 박해준 배우한테도 “진짜 자신 있는 캐릭터다. 걱정하지 마라” 하고 캐스팅 했다.
10. 종우는 언행이 멋들어진 캐릭터다. 박해준 배우가 연기해서 더더욱.
정지우: 이 영화의 이해와 관련된 나이 차, 세대 차가 가장 간극이 벌어지는 데는 종우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어린 친구들은 종우를 아침 드라마의 실장님하고 같은 범주로 묶어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영화의 동료들, 영화와 관련된, 무언가 교감이 있었던 사람들은 박해준 배우에게 너무너무 열광했다. 진짜 좋았다고.
10. 사실 박해준 배우는 ‘4등’에서도 매력이 뿜뿜 넘치지 않았나?
정지우: 박해준 배우는 진짜 완전 ‘볼매’다. 실제 박해준 배우의 자연인으로서 매력은 이 영화에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약간 허당 같기도 하고, 정말 웃기는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함께 있어 보면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온전히 영화로 잘 옮겨오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한 것이다.
10. ‘유열의 음악앨범’은 참 담백한 멜로다. 극 중에서 이따금 오글오글한 대사가 나오더라도 문장의 수식어처럼 담담하게 읽혀질 만큼.
정지우: 상대적으로 역치라는 말이 있다. 단것을 먹으면 그 다음에는 더 단것을 먹어야 단맛을 느끼듯, 무언가 자극이 높아지는 영역이 생기면 전체적으로 그 영역이 계속 올라간다. 그것에 대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안 그러면 되레 영화가 가면서 힘이 빠지는 상태가 된다.
10. 이 작품에서 ‘유열의 음악앨범’ 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액자 같은 틀거리다. 당신이 “라디오가 그때도 지금도 존재하듯이 보편적인 ‘사랑의 감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이 제목은 점점 자기 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제목의 힘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제목이 더 좋게 파고든다. 제목의 힘이랄까?
정지우: 대사와 가사, DJ 멘트가 있다.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영화의 내용과 서로 묶여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10. 작품의 특성상 음악은 제3의 주인공과도 같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혹은 추억이 반영된 곡이 있는지?
정지우: 제3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끼리 농담으로는 제1의 주인공이라고 불러왔다. 영화에 얹어지기 전에 영화와 연결이 만들어진 것은 ‘Fix you’의 달리는 순간이다. 공연 실황을 보면 ‘콜드플레이’의 싱어가 간주 부분이 되면 뛴다. 막 달리면서 어떤 음악적인 순간과 함께 점프를 하고, 폭죽이 터지고…. 그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달리기와 이 음악이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라는 게 먼저였고, 그 다음에 달리는 묘사들이 뒤따라온 셈이 됐다.
10. 현우가 달리는 클라이맥스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김고은, 정해인 배우 특유의 싱그러운 느낌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도 들만큼. 왜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보다 더 실감 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화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지우: 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웃음) 내가 배우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겠다. 너무 재미있는…. 하자 말자를 떠나서 아,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싶다.
박미영 기자 stratus@tenasia.co.kr
10. 이야기의 출발은 1994년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하거나 각별한 의미가 있나?
정지우: 사실 1994년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고민과 관심이 있었던 시기는 1997년, 1998년이다. 더 기준값인 것 같다. IMF 그 다음에 무언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기분…. 어느 시간이 지나고는 정말 화학적으로 달라진 것 같다. 그 시기를 넘으면서.
10. 영화에는 추억을 자극하는 코드가 곳곳에 심어져 있다. 1975년생에 94학번, 창신동에서 태어나고 스무 살까지 살았던 사람으로서 미수와 현우의 이야기에 감정 이입이 용이했다.
정지우: 창신동에서? (웃음) 사실은 알고 보면 실연 이야기가 있다든지 뭐 그런 느낌도 드는데.
10. (웃음) 그렇지는 않다. 영화의 배경지로 창신동을 선택한 이유는?
정지우: 로케이션을 많이 다녔다. 장르가 멜로드라마여서 삶의 궤적이 너무 어려워 보이는 상태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기준값을 두고. 완전히 쇠락한, 재개발을 코앞에 둔 단지들은 많다. 서울 경기 일원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그런데 창신동은 무언가 새것이라고 아주 부분 부분 건물이 들어오긴 했지만,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반짝거리는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간이 참 특이했다. 되게 오래된 옹벽이 시간에 걸쳐서 쌓인 느낌.
10. 도입부에 ‘유열의 음악앨범’ 첫 방송을 하는 DJ 유열이 “방송, 사랑, 그리고 비행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출발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든다는 겁니다”라고 하는 멘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귀에 쏙 박힌다. 소설로 치면 첫 문장처럼. 시나리오에서 추가된 부분인가? 아니면 방송에서 실제 사용했던 멘트인가?
정지우: (당시 ‘유열의 음악앨범’)작가님이 첫 방송에 대본을 썼을 때 메모 내용이다. 실제 그 내용으로 첫 방송을 했다.
10. 현우는 처음 미수의 빵집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콩이 들어간 음식을 찾는다. 이후 은자는 애정이 듬뿍 담긴 ‘두부’라는 별명으로 현우를 부르고. 은자 역의 김국희 배우에게 자꾸 눈길이 가더라. 배우 자체가 추억 속 뭔가 애틋하고 그리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정지우: 정말 좋은 배우다. 오디션을 두 번 세 번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묻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알았는데 뮤지컬, 연극 무대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배우였다. 내가 몰랐던 거고. 김국희 배우는 매체 즉 영화 연기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스탭들이 협력을 잘하기도 했지만 시대별로 이 사람의 늙어가는 과정이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10. 싱크대에서 물을 사용하면 욕실에서 온수가 아니라 찬물만 나오는 설정도 흥미로웠다. 우연과 필연을 반복하는 미수와 현우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도 같았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서로에게 영향이 가는….
정지우: 이 표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멋지다. (웃음)
10. 현우의 친구들은 상처에 잠겨 있는, 혹은 고여 있는 ‘아픈 청춘’이다. 똑같이 실수했는데 현우만 멀쩡하게 사는 것 같고, 현우만 용서받는 것 같자 거부감을 표한다. 그 친구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정지우: 친구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 중에 누군가가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더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라고. 그게 너무 두려우니까 무리를 더 단단하게 체결하고 싶은 것이다.
정지우: ‘캐스팅이 연출의 절반이다’라는 속설이 있다. 스타를 캐스팅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기질 등이 캐릭터와 어울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관점에 대한 조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고은과 정해인 두 배우가 정말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사실 멜로드라마에서는 보통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아끼고 배려하는 기분까지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진짜 난처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재난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고은과 정해인 두 배우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남매처럼 찍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게 해낸 것 같다.
10. 미수와 현우는 시나리오 초고부터 완고까지 캐릭터의 변화가 컸나? 더불어 김고은과 정해인 배우 캐스팅 후 변한 부분이 있다면?
정지우: 초고에서부터 많이 변한 셈이다. 초고의 매력은 여성의 내면이 아주 미묘하고 모호하게 그려진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고유한 시나리오였다. 그렇게 출발을 했고, 그 다음에 두 배우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좀 더 두 사람과 어울리는 형태의 디테일이 모아졌다.
10. 정해인 배우의 매력을 꼽자면?
정지우: 처음에는 당연히 몰랐던 영역인데 정해인 배우는 정말 진심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진짜 무엇이든. 지치지도 않나 이런 마음이 들 만큼.
10. ‘은교’ 이후 현장에서 다시 만난 김고은 배우는 어떠했나?
정지우: 정말 좋았다. 이심전심. 구구절절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풀어야 되는 것이 없으니까, 진짜 말을 많이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작업했다. 그리고 김고은 배우가 ‘은교’ 이후에 상대했던 여배우가 전도연, 김혜수, 윤여정이다. 이건 내 추정인데 무언가 선망이 있던 배우와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들과 작업을 하면서 되게 좋은 배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계춘할망(2016)에서 윤여정, 김고은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정지우: 진짜 잘 어울리지 않나? 원래 김고은 배우가 할머니하고 되게 유별하다. 할머니하고 서울에서 꽤 오래 같이 살았던 시기가 있어서. 그런 궤적을 쭉 겪으면서 20대를 보낸 김고은 배우가 내 앞에 정말 대견하게 힘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인이 현장의 이모저모 한 것을 책임을 져 주려고 막 애를 썼다. 스탭들도 다독이고, 급하면 자기가 먼저 뛰어가고…. 주연배우가 그런 것을 해주면 현장이 되게 부드러워진다.
10. 김고은 배우와 다시 작업을 한다면, 어떤 장르로 만나고 싶은지?
정지우: 해본 적 있고.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
정지우: (웃음) 그런가?
10. 출판사 대표 종우(박해준 분)가 베스트셀러를 일궈낸 미수에게 “목숨 걸고 기뻐해 봐. 목숨 걸고!”라는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정지우: 정말 중요한 대사다.
10. 사실 종우는 더 보고 싶은 인물이었다. 잠깐의 등장에도 솔깃해지는 인물이라서. 애초부터 그만큼의 비중이었나?
정지우: 2005년 이후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웃음) 등장의 베이스 자체가 영화 절반 이내에 있어서 무언가 존재감이 커지기에는 한계가 좀 있었다. 되게 공들이고, 잘해 보고 싶은 캐릭터였다. 그래서 박해준 배우한테도 “진짜 자신 있는 캐릭터다. 걱정하지 마라” 하고 캐스팅 했다.
10. 종우는 언행이 멋들어진 캐릭터다. 박해준 배우가 연기해서 더더욱.
정지우: 이 영화의 이해와 관련된 나이 차, 세대 차가 가장 간극이 벌어지는 데는 종우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어린 친구들은 종우를 아침 드라마의 실장님하고 같은 범주로 묶어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영화의 동료들, 영화와 관련된, 무언가 교감이 있었던 사람들은 박해준 배우에게 너무너무 열광했다. 진짜 좋았다고.
10. 사실 박해준 배우는 ‘4등’에서도 매력이 뿜뿜 넘치지 않았나?
정지우: 박해준 배우는 진짜 완전 ‘볼매’다. 실제 박해준 배우의 자연인으로서 매력은 이 영화에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약간 허당 같기도 하고, 정말 웃기는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함께 있어 보면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온전히 영화로 잘 옮겨오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한 것이다.
10. ‘유열의 음악앨범’은 참 담백한 멜로다. 극 중에서 이따금 오글오글한 대사가 나오더라도 문장의 수식어처럼 담담하게 읽혀질 만큼.
정지우: 상대적으로 역치라는 말이 있다. 단것을 먹으면 그 다음에는 더 단것을 먹어야 단맛을 느끼듯, 무언가 자극이 높아지는 영역이 생기면 전체적으로 그 영역이 계속 올라간다. 그것에 대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안 그러면 되레 영화가 가면서 힘이 빠지는 상태가 된다.
10. 이 작품에서 ‘유열의 음악앨범’ 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액자 같은 틀거리다. 당신이 “라디오가 그때도 지금도 존재하듯이 보편적인 ‘사랑의 감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이 제목은 점점 자기 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제목의 힘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제목이 더 좋게 파고든다. 제목의 힘이랄까?
정지우: 대사와 가사, DJ 멘트가 있다.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영화의 내용과 서로 묶여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10. 작품의 특성상 음악은 제3의 주인공과도 같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혹은 추억이 반영된 곡이 있는지?
정지우: 제3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끼리 농담으로는 제1의 주인공이라고 불러왔다. 영화에 얹어지기 전에 영화와 연결이 만들어진 것은 ‘Fix you’의 달리는 순간이다. 공연 실황을 보면 ‘콜드플레이’의 싱어가 간주 부분이 되면 뛴다. 막 달리면서 어떤 음악적인 순간과 함께 점프를 하고, 폭죽이 터지고…. 그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달리기와 이 음악이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라는 게 먼저였고, 그 다음에 달리는 묘사들이 뒤따라온 셈이 됐다.
10. 현우가 달리는 클라이맥스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김고은, 정해인 배우 특유의 싱그러운 느낌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도 들만큼. 왜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보다 더 실감 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화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지우: 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웃음) 내가 배우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겠다. 너무 재미있는…. 하자 말자를 떠나서 아,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싶다.
박미영 기자 stratus@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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