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10. 5년 만에 내는 정규음반이자 데뷔 21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음반입니다. 기분이 어때요?
김윤아: 음반을 낼 때마다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어요. 한창 바쁠 땐 매일 자학해요. 그러다가 정신을 놓고 자동으로 일하게 되는 때가 됩니다. 그 때가 지나면 대개 음반 작업이 끝나 있는데, 그러고 나면 자아도취의 시간이 와요. 바로 지금이죠. ‘음반, 너무 좋다’며 들떠 있어요.(웃음) 반응이 걱정되거나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우선은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요.
김진만: 21주년 얘기는 주변에서 많이들 해주십니다. 비행기를 태워주시려는 것일 테지만 아직은 타지 않으려고요.
10. ‘비행기 타지 않으려 한다’고 했지만 음반 제목은 ‘자우림’입니다. 상당한 자신감이 읽히는데요.(웃음)
김진만: 들켰다, 하하. 음반 제목을 ‘자우림’으로 하자는 제안은 예전부터 나왔어요. 그동안은 멤버들 반응이 미적지근했는데 이번에는 다들 괜찮다더라고요.
김윤아: 우선 소리의 완성도가 만족스러웠고요, 모든 곡이 자우림이기에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동화적이면서 현실적이고, 몽환적인데 관능적이기도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이 음반이) 자우림 자체가 아닌가 생각했죠.
10. 음악 얘기를 해볼까요. 첫 번째 곡 ‘광견시대’는 분위기와 메시지 모두 굉장히 강렬합니다. 이렇게 센 노래를 첫 트랙으로 배치한 이유는 뭔가요?
김윤아: 메시지보다는 다음 노래들과의 흐름을 고려해서 배치했어요. 여러 버전으로 트랙 을구성해서 들어본 결과 지금과 같은 흐름이 가장 좋게 들리더라고요. 저희도 ‘광견시대’가 첫 트랙이 된 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빵!’ 터뜨리니까 뒤에 나오는 음악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고요.
10. 7번 트랙인 ‘싸이코 헤븐(Psyco Heaven)’에는 “신도림 역 안에서”란 가사가 나오더군요. ‘일탈’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였습니다.
이선규: 자우림에 대한 존경이자 오마주입니다. 하하.
10. 수록곡 배치가 인상적입니다. 분위기가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는 굴곡이 느껴집니다. 의도한 것입니까?
이선규: 늘 그랬듯이 의도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반을 다 만들고 나서 순서대로 들어보면 어떤 맥락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이번 음반은 그런 경향이 좀 더 뚜렷한 것 같아요.
김윤아: 다음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음반을 만들어봐야겠어요. 뚜렷한 테마를 가진 음반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0. ‘대중성’은 어떻습니까. 21년간 활동하면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겨왔는데요, 그 노하우가 집약돼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진만: 글쎄요, 소위 ‘히트송’을 만들 때도 이걸 대중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실제로 ‘하하하쏭’도 처음 나왔을 때에는 반응이 안 좋았어요. 노래가 콜라 CF에 삽입되면서 인기가 올라갔죠.
김윤아: 어떤 음악이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하고 있습니다. 운과 세상에 맡긴다고 할까요.(웃음)
김진만: 기준은 딱 하나에요. 우리 셋이 듣기에 좋은 음반을 만들자. 그 기준을 맞추는 것도 사실 벅차고요.
10. 타이틀곡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김윤아: 기준은 딱 한 가지에요. 방송에서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는 노래. 예를 들어 ‘광견시대’는 방송에서 제대로 된 라이브를 하긴 어렵겠죠. 공연 때 객석 분위기를 달구기 위한 사운드니까요. 회사에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곡을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모니터해서 타이틀곡을 골라주세요. 이번에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영원히 영원히’가 타이틀곡이 됐고요.
10. 의외네요. ‘영원히 영원히’는 처음부터 타이틀곡을 의도하고 만든 노래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김윤아: 최근 2~3년 동안 젊거나 건강하던 지인들이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열 분 가까이 그랬죠. 그런 안타까움을 보면서 쓰기 시작한 노래에요. 마지막을 눈앞에 둔 사람이 소중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장면을 상상해서 만들었죠. 자우림이 그동안 계속 얘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인생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였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원히 영원히’도 그런 맥락을 가진 노래 중에 하나였어요.
# 데뷔 21주년… “운이 좋았죠.”
10. 1997년 데뷔해서 올해 21주년을 맞았습니다. 자우림은 긴 시간 동안 골수 팬들과 대중을 두루 만족시켜온 몇 안 되는 밴드인데요, 그래서 ‘우리가 대중 음악가인가 혹은 비주류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윤아: 가수로서의 위치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눈치 채셨겠지만 저희가 지향점을 가진 팀은 아니거든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고민은 안 할 것 같아요.
10. 자우림은 멤버 교체가 없는 팀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지난해 드러머 구태훈 씨가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김윤아: 태훈 형이 사업을 굉장히 오래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걱정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팀에 있는 게 멤버들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해 빠져야겠다고 판단한 거 같고요.
10. 자우림이 긴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선규: 운이 좋았어요. 오랫동안 활동하다보면 피곤해지거나 음악적으로 나태해질 때가 오는데요, 그 때마다 자극제가 생겼죠. MBC ‘나는 가수다’나 JTBC ‘비긴어게인2’ 같은 프로그램들처럼요.
10. 말씀하신 대로 ‘나는 가수다’는 자우림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김윤아: 음악의 지평을 넓혀준 계기였어요. 저희가 거창하거나 서사적인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 건 우리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뭔가 부끄럽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가수다’를 하는 몇 달 동안 곡을 거창하게 펼치는 작업이 계속됐어요. 자우림에게 그런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는 걸 그 때 처음 알게 됐죠. 곡의 구성을 만들 때, 후반부가 더 웅장해져도 ‘괜찮아. 부끄럽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게 됐어요.
10. ‘비긴어게인2’는 어떻게 찍었고 또 어떻게 보셨나요?
이선규: 몰랐던 자우림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죠. 자우림은 자우림의 공연을 볼 수 없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윤아 언니, 너무 예뻐요’ ‘노래, 너무 좋아요’ ‘자우림 사랑해요’라고 할 때마다 왜 그런 건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김윤아, 노래 정말 잘하는구나. 멋지구나’ 하고 처음 느꼈어요.
김윤아: 웃긴 얘긴데요, 방송을 보면서 제가 평소에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구나’ 했죠.(웃음)
김진만: 미리 큐시트를 봤더니 포르투갈에 내리자마자 촬영을 시작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고생’ 스케줄이더라고요. 처음엔 윤아랑 선규가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다가, 둘이 밤에 골목에 거지처럼 주저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죠. 딱 봐도 ‘쟤네 혹시 카메라 꺼져 있는 줄 알고 녹화한 건가’ 싶더라고요. 그 땐 나도 같이 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10. 혹시 음반에 21주년을 자축할 만한 노래도 있나요?
김윤아: 작년 연말에 선공개했던 10번 트랙 ‘엑스오엑스오(XOXO)’에요. 만 20주년을 기념했던 노래죠. 우리가 그동안 음악을 생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음악을 이해하고 들어주시는 팬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엑스오엑스오’에는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담았어요. 현실에서 느끼는 감사함을 담아 쓴 곡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10. 그동안 음악 시장 흐름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규 음반을 고집하는 가수는 많지 않고 대부분 디지털 싱글 형태로 음악을 내놓는 추세죠. 반면 자우림은 선공개곡 ‘엑스오엑스오’를 빼면 5년 동안 음원 발표가 전무했어요.
이선규: 음악을 산업으로 여긴다면 활동 방식을 바꾸는 것도 생각해야겠죠. 하지만 그건 회사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봐요.
김진만: 싱글로 꾸준히 노출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얘기는 꾸준히 나와요. 매번 흐지부지돼서 그렇지. 그런데 만약에 이런 ‘애들'(10집 수록곡)이 음반 한 장에 모여 있지 않고 한 곡씩 나왔으면 구렸을 거 같은데요?(일동 웃음) 한꺼번에 내는 게 힘들지만 저희에겐 오히려 편해요.
# “아직까진, 전작보다 좋은 음반을 겨우겨우 만들어오고 있어요.”
10. 김윤아 씨는 솔로 가수로서도 맹활약 중이죠. 자우림 음반과 개인 음반은 어떻게 다른가요?
김윤아: 첫째, 여자 김윤아의 얘기는 자우림 음반 안에서 하지 않아요. 자우림 음반에서는 우리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화자로 삼죠. 그리고 개인 음반은 밴드로는 할 수 없는 소리를 만들려고 하죠. 목소리를 최대한 잘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에요. 반면 자우림에서는 밴드의 전체적인 악기 연주가 잘 들릴 수 있게 만듭니다.
10. 자우림에게서 자신을 구분하면서 ‘여자 김윤아’라는 표현을 쓰신 게 인상적이네요.
김윤아: 그건 제가 여자라서… (김진만: 남자였으면 ‘남자 김윤아’라고 했을 거예요. 하하하.) 인간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생기는 각도가 있어요. 그리고 그 시각이 제 음반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여자 김윤아’라고 말했습니다.
김진만: 윤아의 개인 음반에선 오롯이 윤아가 화자가 되지만, 자우림 음반의 화자는 달라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죠. 나이는 불명확하지만 머릿속은 청년이에요. 뭔가를 갈구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이와 국적 미상의 어떤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10. 초창기 자우림의 음반은 분노와 절망의 정서가 섬뜩할 정도로 도드라졌습니다. 반면 지난 음반 타이틀곡 ‘스물다섯 스물하나’에는 일견 따뜻함이나 위로가 감지돼요. 그래서 자우림의 화자 또한 어떤 식으로든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김윤아: 처음 만든 자우림의 화자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어요. 때리고 부수려고 했죠. 그런데 지금의 화자는 많은 걸 체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초창기 자우림의 화자는 당시의 20대이기도 했어요. 우리가 데뷔했을 때, 그러니까 20대 중반이었을 때에는 다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세상아, 와라’ 하고 있었어요. 우리, X-세대 출신이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체념했어요.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야지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그런 변화가 음악에도 당연히 녹아나지 않았을까요.
10. 실제로 멤버들은 ‘기성세대’로 일컬어지는 40대를 보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자우림의 화자가 ‘청년의 머리’를 가질 수 있는 배경은 뭔가요?
김윤아: 기성세대라고 하면 기반이 안정되고 미래가 어느 정도 예측 되는 사람들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통계를 보면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세대가 40대 초반이라고 하더군요. 최소한 저희가 느끼기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도 고민하고 아직도 미래가 불안한 상태에요. 사회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살아서 좋은 직장을 얻은 사람들도 40대가 되면 퇴직 후의 삶을 고민하게 해야 하니까요.
10. X세대였던 자우림은 뭘 위해 싸웠습니까?
김진만: 글쎄요, 많죠.
이선규: 저흰 IMF를 겪었고요. 밀레니엄, 세기 말을 살았었죠. 휴대폰이 변하는 것도 봤고요. 독특한 세대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 때 우리가 불렀던 노래들, 예를 들어 ‘일탈’을 냈을 때 저는 그 단어가 생소했거든요. 그런데 노래가 나온 뒤부터 사람들이 ‘일탈’이라고 하면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떠올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게 자우림의 20대였어요. 재밌는 건 지금 세대도 ‘일탈’을 물으면 ‘아파트 옥상’을 떠올린다더군요. 지금의 20대도 우리와 같은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자우림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 김윤아 씨는 스스로를 ‘뉴스 중독자’라고 하셨죠. 요즘에는 뉴스 볼 맛이 나겠습니다.(웃음)
김윤아: 하하하. 대단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어릴 때 삐라를 주워서 파출소에 가져가면 상을 받았거든요. 대학생 때 ‘적군의 괴수 김일성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나고요. 그런데 지금은 엄청난 평화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대통령을 탄핵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해결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는 산적해 있고…. 이건 다른 얘긴데요, 음반을 마무리할 때 쯤 평화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해서 그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노래가 있어요. 이번 음반에 수록하고 싶었는데 완성도를 높이려면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묵혀놨어요. 좋은 뉴스가 많아져서 더욱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음반에 수록할 수 있으면 기쁠 것 같습니다.
10. 그럼 다음 음반은 좀 발랄해지는 건가요?
김윤아: 그건 뉴스에 달렸습니다. (일동 웃음)
10. 지금은 밝은 모습이지만 ‘비긴어게인2’ 첫 회에서 ‘타인의 고통’을 낸 뒤 할 이야기가 없었다는 얘기를 하셨죠. 다른 얘기들이 쓸모없이 느껴졌다면서요. 그런 갈등은 좀 해소가 되셨어요?
김윤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 직업은 굳이 없어도 되는 걸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물론 그게 저한텐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요.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요. ‘타인의 고통’ 음반 이후로 회복이 덜 된 상태이지만 멤버들과 팀 작업을 하면서 그런 마음이 많이 사라졌어요.
10. ‘자우림은 지향점이 없는 밴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우림은 언제 ‘우린 잘하고 있어’라고 느끼나요?
김진만: 우리끼리 ‘자우림은 과연 해체를 할 것인가’라는 얘기를 가끔 해요. 그러다 보면 나오는 결론이 이거예요. 우리가 11집을 내고 들어봤는데 음악이 10집보다 후지다, 그러면 12집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전작보다 더 마음에 들고 좋은 음반을 겨우겨우 만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
김윤아는 밴드 자우림의 정규 10집 발매 인터뷰에서 자신의 직업은 굳이 없어도 되는 걸 만드는 일이라고, 그래서 항상 부끄럽다고 말했다. 반발하고 싶었다.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해서 온전한 삶은 아니며 음악을 만들거나 듣는 것은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윤아의 말은 음악의 가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존엄을 역설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삶과 인간에 대한 고찰이 담긴 또 한 장의 음반이 지난 22일 오후 6시 발매됐다. 자우림의 10집 ‘자우림’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10. 5년 만에 내는 정규음반이자 데뷔 21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음반입니다. 기분이 어때요?
김윤아: 음반을 낼 때마다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어요. 한창 바쁠 땐 매일 자학해요. 그러다가 정신을 놓고 자동으로 일하게 되는 때가 됩니다. 그 때가 지나면 대개 음반 작업이 끝나 있는데, 그러고 나면 자아도취의 시간이 와요. 바로 지금이죠. ‘음반, 너무 좋다’며 들떠 있어요.(웃음) 반응이 걱정되거나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우선은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요.
김진만: 21주년 얘기는 주변에서 많이들 해주십니다. 비행기를 태워주시려는 것일 테지만 아직은 타지 않으려고요.
10. ‘비행기 타지 않으려 한다’고 했지만 음반 제목은 ‘자우림’입니다. 상당한 자신감이 읽히는데요.(웃음)
김진만: 들켰다, 하하. 음반 제목을 ‘자우림’으로 하자는 제안은 예전부터 나왔어요. 그동안은 멤버들 반응이 미적지근했는데 이번에는 다들 괜찮다더라고요.
김윤아: 우선 소리의 완성도가 만족스러웠고요, 모든 곡이 자우림이기에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동화적이면서 현실적이고, 몽환적인데 관능적이기도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이 음반이) 자우림 자체가 아닌가 생각했죠.
김윤아: 메시지보다는 다음 노래들과의 흐름을 고려해서 배치했어요. 여러 버전으로 트랙 을구성해서 들어본 결과 지금과 같은 흐름이 가장 좋게 들리더라고요. 저희도 ‘광견시대’가 첫 트랙이 된 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빵!’ 터뜨리니까 뒤에 나오는 음악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고요.
10. 7번 트랙인 ‘싸이코 헤븐(Psyco Heaven)’에는 “신도림 역 안에서”란 가사가 나오더군요. ‘일탈’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였습니다.
이선규: 자우림에 대한 존경이자 오마주입니다. 하하.
10. 수록곡 배치가 인상적입니다. 분위기가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는 굴곡이 느껴집니다. 의도한 것입니까?
이선규: 늘 그랬듯이 의도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반을 다 만들고 나서 순서대로 들어보면 어떤 맥락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이번 음반은 그런 경향이 좀 더 뚜렷한 것 같아요.
김윤아: 다음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음반을 만들어봐야겠어요. 뚜렷한 테마를 가진 음반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0. ‘대중성’은 어떻습니까. 21년간 활동하면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겨왔는데요, 그 노하우가 집약돼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진만: 글쎄요, 소위 ‘히트송’을 만들 때도 이걸 대중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실제로 ‘하하하쏭’도 처음 나왔을 때에는 반응이 안 좋았어요. 노래가 콜라 CF에 삽입되면서 인기가 올라갔죠.
김윤아: 어떤 음악이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하고 있습니다. 운과 세상에 맡긴다고 할까요.(웃음)
김진만: 기준은 딱 하나에요. 우리 셋이 듣기에 좋은 음반을 만들자. 그 기준을 맞추는 것도 사실 벅차고요.
10. 타이틀곡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김윤아: 기준은 딱 한 가지에요. 방송에서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는 노래. 예를 들어 ‘광견시대’는 방송에서 제대로 된 라이브를 하긴 어렵겠죠. 공연 때 객석 분위기를 달구기 위한 사운드니까요. 회사에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곡을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모니터해서 타이틀곡을 골라주세요. 이번에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영원히 영원히’가 타이틀곡이 됐고요.
10. 의외네요. ‘영원히 영원히’는 처음부터 타이틀곡을 의도하고 만든 노래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김윤아: 최근 2~3년 동안 젊거나 건강하던 지인들이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열 분 가까이 그랬죠. 그런 안타까움을 보면서 쓰기 시작한 노래에요. 마지막을 눈앞에 둔 사람이 소중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장면을 상상해서 만들었죠. 자우림이 그동안 계속 얘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인생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였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원히 영원히’도 그런 맥락을 가진 노래 중에 하나였어요.
# 데뷔 21주년… “운이 좋았죠.”
김윤아: 가수로서의 위치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눈치 채셨겠지만 저희가 지향점을 가진 팀은 아니거든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고민은 안 할 것 같아요.
10. 자우림은 멤버 교체가 없는 팀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지난해 드러머 구태훈 씨가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김윤아: 태훈 형이 사업을 굉장히 오래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걱정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팀에 있는 게 멤버들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해 빠져야겠다고 판단한 거 같고요.
10. 자우림이 긴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선규: 운이 좋았어요. 오랫동안 활동하다보면 피곤해지거나 음악적으로 나태해질 때가 오는데요, 그 때마다 자극제가 생겼죠. MBC ‘나는 가수다’나 JTBC ‘비긴어게인2’ 같은 프로그램들처럼요.
10. 말씀하신 대로 ‘나는 가수다’는 자우림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김윤아: 음악의 지평을 넓혀준 계기였어요. 저희가 거창하거나 서사적인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 건 우리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뭔가 부끄럽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가수다’를 하는 몇 달 동안 곡을 거창하게 펼치는 작업이 계속됐어요. 자우림에게 그런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는 걸 그 때 처음 알게 됐죠. 곡의 구성을 만들 때, 후반부가 더 웅장해져도 ‘괜찮아. 부끄럽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게 됐어요.
이선규: 몰랐던 자우림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죠. 자우림은 자우림의 공연을 볼 수 없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윤아 언니, 너무 예뻐요’ ‘노래, 너무 좋아요’ ‘자우림 사랑해요’라고 할 때마다 왜 그런 건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김윤아, 노래 정말 잘하는구나. 멋지구나’ 하고 처음 느꼈어요.
김윤아: 웃긴 얘긴데요, 방송을 보면서 제가 평소에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구나’ 했죠.(웃음)
김진만: 미리 큐시트를 봤더니 포르투갈에 내리자마자 촬영을 시작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고생’ 스케줄이더라고요. 처음엔 윤아랑 선규가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다가, 둘이 밤에 골목에 거지처럼 주저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죠. 딱 봐도 ‘쟤네 혹시 카메라 꺼져 있는 줄 알고 녹화한 건가’ 싶더라고요. 그 땐 나도 같이 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10. 혹시 음반에 21주년을 자축할 만한 노래도 있나요?
김윤아: 작년 연말에 선공개했던 10번 트랙 ‘엑스오엑스오(XOXO)’에요. 만 20주년을 기념했던 노래죠. 우리가 그동안 음악을 생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음악을 이해하고 들어주시는 팬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엑스오엑스오’에는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담았어요. 현실에서 느끼는 감사함을 담아 쓴 곡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10. 그동안 음악 시장 흐름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규 음반을 고집하는 가수는 많지 않고 대부분 디지털 싱글 형태로 음악을 내놓는 추세죠. 반면 자우림은 선공개곡 ‘엑스오엑스오’를 빼면 5년 동안 음원 발표가 전무했어요.
이선규: 음악을 산업으로 여긴다면 활동 방식을 바꾸는 것도 생각해야겠죠. 하지만 그건 회사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봐요.
김진만: 싱글로 꾸준히 노출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얘기는 꾸준히 나와요. 매번 흐지부지돼서 그렇지. 그런데 만약에 이런 ‘애들'(10집 수록곡)이 음반 한 장에 모여 있지 않고 한 곡씩 나왔으면 구렸을 거 같은데요?(일동 웃음) 한꺼번에 내는 게 힘들지만 저희에겐 오히려 편해요.
# “아직까진, 전작보다 좋은 음반을 겨우겨우 만들어오고 있어요.”
김윤아: 첫째, 여자 김윤아의 얘기는 자우림 음반 안에서 하지 않아요. 자우림 음반에서는 우리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화자로 삼죠. 그리고 개인 음반은 밴드로는 할 수 없는 소리를 만들려고 하죠. 목소리를 최대한 잘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에요. 반면 자우림에서는 밴드의 전체적인 악기 연주가 잘 들릴 수 있게 만듭니다.
10. 자우림에게서 자신을 구분하면서 ‘여자 김윤아’라는 표현을 쓰신 게 인상적이네요.
김윤아: 그건 제가 여자라서… (김진만: 남자였으면 ‘남자 김윤아’라고 했을 거예요. 하하하.) 인간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생기는 각도가 있어요. 그리고 그 시각이 제 음반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여자 김윤아’라고 말했습니다.
김진만: 윤아의 개인 음반에선 오롯이 윤아가 화자가 되지만, 자우림 음반의 화자는 달라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죠. 나이는 불명확하지만 머릿속은 청년이에요. 뭔가를 갈구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이와 국적 미상의 어떤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10. 초창기 자우림의 음반은 분노와 절망의 정서가 섬뜩할 정도로 도드라졌습니다. 반면 지난 음반 타이틀곡 ‘스물다섯 스물하나’에는 일견 따뜻함이나 위로가 감지돼요. 그래서 자우림의 화자 또한 어떤 식으로든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김윤아: 처음 만든 자우림의 화자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어요. 때리고 부수려고 했죠. 그런데 지금의 화자는 많은 걸 체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초창기 자우림의 화자는 당시의 20대이기도 했어요. 우리가 데뷔했을 때, 그러니까 20대 중반이었을 때에는 다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세상아, 와라’ 하고 있었어요. 우리, X-세대 출신이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체념했어요.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야지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그런 변화가 음악에도 당연히 녹아나지 않았을까요.
10. 실제로 멤버들은 ‘기성세대’로 일컬어지는 40대를 보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자우림의 화자가 ‘청년의 머리’를 가질 수 있는 배경은 뭔가요?
김윤아: 기성세대라고 하면 기반이 안정되고 미래가 어느 정도 예측 되는 사람들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통계를 보면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세대가 40대 초반이라고 하더군요. 최소한 저희가 느끼기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도 고민하고 아직도 미래가 불안한 상태에요. 사회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살아서 좋은 직장을 얻은 사람들도 40대가 되면 퇴직 후의 삶을 고민하게 해야 하니까요.
10. X세대였던 자우림은 뭘 위해 싸웠습니까?
김진만: 글쎄요, 많죠.
이선규: 저흰 IMF를 겪었고요. 밀레니엄, 세기 말을 살았었죠. 휴대폰이 변하는 것도 봤고요. 독특한 세대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 때 우리가 불렀던 노래들, 예를 들어 ‘일탈’을 냈을 때 저는 그 단어가 생소했거든요. 그런데 노래가 나온 뒤부터 사람들이 ‘일탈’이라고 하면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떠올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게 자우림의 20대였어요. 재밌는 건 지금 세대도 ‘일탈’을 물으면 ‘아파트 옥상’을 떠올린다더군요. 지금의 20대도 우리와 같은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자우림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윤아: 하하하. 대단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어릴 때 삐라를 주워서 파출소에 가져가면 상을 받았거든요. 대학생 때 ‘적군의 괴수 김일성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나고요. 그런데 지금은 엄청난 평화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대통령을 탄핵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해결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는 산적해 있고…. 이건 다른 얘긴데요, 음반을 마무리할 때 쯤 평화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해서 그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노래가 있어요. 이번 음반에 수록하고 싶었는데 완성도를 높이려면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묵혀놨어요. 좋은 뉴스가 많아져서 더욱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음반에 수록할 수 있으면 기쁠 것 같습니다.
10. 그럼 다음 음반은 좀 발랄해지는 건가요?
김윤아: 그건 뉴스에 달렸습니다. (일동 웃음)
10. 지금은 밝은 모습이지만 ‘비긴어게인2’ 첫 회에서 ‘타인의 고통’을 낸 뒤 할 이야기가 없었다는 얘기를 하셨죠. 다른 얘기들이 쓸모없이 느껴졌다면서요. 그런 갈등은 좀 해소가 되셨어요?
김윤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 직업은 굳이 없어도 되는 걸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물론 그게 저한텐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요.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요. ‘타인의 고통’ 음반 이후로 회복이 덜 된 상태이지만 멤버들과 팀 작업을 하면서 그런 마음이 많이 사라졌어요.
10. ‘자우림은 지향점이 없는 밴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우림은 언제 ‘우린 잘하고 있어’라고 느끼나요?
김진만: 우리끼리 ‘자우림은 과연 해체를 할 것인가’라는 얘기를 가끔 해요. 그러다 보면 나오는 결론이 이거예요. 우리가 11집을 내고 들어봤는데 음악이 10집보다 후지다, 그러면 12집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전작보다 더 마음에 들고 좋은 음반을 겨우겨우 만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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