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이준익감독05
이준익감독05
구마(丘磨). 이준익 감독의 호(號)다. 언덕 구(丘)+갈 마(磨). ‘언덕을 평지로 만든다’에서 엿 볼 수 있듯, 그는 평생 언덕을 가는 마음으로 전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고 구(丘)자를, 꽉 찬 ‘아홉 구(九)’자로 바꿀 수 있으면 인생을 잘 살았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준익의 열 번째 작품 ‘사도’는 구(丘)가 구(九)로 옮겨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하는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사도세자 비운의 운명’을 예열 없이 바로 100도씨 끓는 물에 올려놓는 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뜨거운 열기를 펄펄 내뿜으며 부자지간의 애증을 파고파고 또 파고든다. 역사 자제가 스포일러인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준익 감독은 그럴 수 있다고 증명한다.

Q. 연산군-장녹수(‘왕의 남자’), 김유신-계백(‘황산벌’), 영조-사도세자(‘사도’) 등 과거 인물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시인 윤동주도(‘동주’) 조만간 소개하실 예정이죠?
이준익: 제가 창의력이 떨어지나 봅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는 걸 가져다 쓰는 것 같아요. 또 작가들이 어려운 건 다 써주잖아요? 결정권은 제게 있어도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작가들의 몫이 큽니다. 저는 그들이 써 준 시나리오에 숟가락만 살짝 얹어서 요리 바꾸고 저리 바꿔서 찍는 것뿐입니다.

Q. 겸손의 말씀이시네요. 영화라는 게 결국 감독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이준익: 아닙니다. 영화에서 감독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겁니다. 진짜 연주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 합니다. 저는 그냥 “조금만 더 내려, 조금 더 올려, 지금 나오세요~” 이런 것만 할 뿐입니다.

Q. 그렇다면 감독님에겐 ‘역사적 인물’을 그리는 것과 ‘허구의 인물’을 그리는 것에 큰 차이가 없는 건가요?
이준익: 저는 현재 내 눈앞에 있는 배우가 ‘곧, 그 사람’ 이라고 믿습니다. 내겐 송강호가 그냥 영조입니다. 유아인이 사도이고요. 유아인에게 “사도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식으로 연기 해 줘.”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훼방을 놓는 겁니다. “원하는 대로 해라!” 했더니, ‘겁나’ 잘하더군요.(웃음) 다, 오케이였습니다. 배우들이 잘 살려준 장면들을 이어다 붙이 거죠.
이준익감독01
이준익감독01
Q. ‘왕의 남자’에서 함께 한 정진영 배우는 감독님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코치하는 감독이라고 하던데요.
이준익: 그 친구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것을 디테일하게 의논하는 배우예요. 감독과 소통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만족과 안심을 얻는 친구죠. 그랬을 땐 여러 이야기를 나눕니다. 결국 저는 그의 합의의 대상이자 안심낙관의 대상이었던 거죠.

Q. 배우에 따라 연출 스타일이 다르신 거네요.
이준익: 네. 각각의 배우들에게 저는 다른 사람일지 모릅니다. 무조건 그들에게 맞추니까요.

Q. 본인이 원하는 디렉팅을 정확하게 요구하는 감독도 많은데요.
이준익: 저는 싫습니다. 혼자 독박을 쓰는 건데…(일동웃음) 그리고 저는 원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Q. 그럼에도, 원하는 게 있다면요?
이준익: 열심히 하길 원합니다. 그 사람이 최선을 다 해서 열심히 하길 원해요.

Q. 배우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힘든 부분입니다.
이준익: 믿음일 수도 있고, 책임전가일 수도 있습니다.

Q. 책임전가요?
이준익: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믿고 나눠준다는 건 뒤집어서 생각하면 책임전가가 될 수 있죠. 물론 진정한 책임전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욕망이 끝까지 발현될 수 있도록, 충돌하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하는 거라고 믿을 뿐입니다.
사도
사도
Q. ‘사도’ 관련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영조에게는 운명이었고, 사도에게는 숙명인 비극적인 사건이었다”고.
이준익: 역술가가 한 말입니다.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고,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라고요. 숙명의 ‘숙(宿’)자는 ‘잠들 숙’이입니다. 잠들어 있을 때 다가오는 운명이기에 거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세상에 아버지 없는 아들은 없어요.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숙명 같은 존재인거죠. 내가 원해서 나온 게 아니니까. 그냥 부여 받은 거니까. 나온 후에는 스스로 개척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앞에서 날아온 화살이라는 겁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방패로 막아도 되고, 피해도 됩니다. 하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건 날아오는지 아닌지 몰라요. 그냥 맞아야 하는 겁니다.

Q. 사도에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준익: 맞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길을 떠난 후 여러 갈림길을 만납니다. 누군가는 왼쪽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길 위의 인생’이 자신의 운명인 겁니다. 선택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거죠. 오늘 당신이 나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선택을 안 했다면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겠죠. 하지만 여기에 왔기에, 거기에 당신은 없습니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보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게 있어요.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 오는데, 과거로부터 온 겁니다. 당신에게 다른 곳은 없어요. 인생 전체가 여기에 와 있는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내 인생 전체가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그리고 바로 ‘이 곳’을 거쳐 미래로 가겠죠. 다른 곳을 거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전체가 여기에 와있다고 할 수 있을 테고요. ‘매 순간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를 만나느냐가 내 인생의 전체다’가 그 시인이 하고자 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운명인 거죠.

Q. 그래서군요. 스쳐도 인연인 건.
이준익: 그럼요. 만나는 사람은 모두 소중해요.

Q. 그럼 거기에서 파생되는 ‘악연’은 뭘까요.
이준익: 그건 자기 자신이 너그러움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Q. 본인의 잘못이다?
이준익: 그럼요. 그 악인도 누군가에겐 선인일 겁니다. 어떤 악인이 모두에게 악인 같나요? 나와 악연이라면, 그 사람 인생의 악연도 바로 나인 거죠.
사도
사도
Q. 음…조금 멀리 나간 질문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범죄자-살인범들은요?
이준익: 원인이 있겠죠. 자, 사도가 광풍으로 미쳐서 날뛰다가 주변 사람 100여 명을 살해하고, 그로 인해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은 결과입니다. 사도가 그렇게 된 건, 원인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Q.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죠. 영조일 수도 있지만 사도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준익: 우선순위를 따지면요?

Q.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영조겠죠.
이준익: 영조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뒤주 씬에서 영조가 사도에게 “어린 시절 너의 총명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12세가 넘어 개 그림이나 그리고 칼 장난을 하는 걸 보면서 내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아느냐?”라고 합니다. 사도에 대한 영조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예법과 국시의 억압 속에서 사도는 엇나가기 시작한 거죠. 만약 영조가, 개 그림을 그리고 칼 장난을 하는 어린 아들 옆에서 닭도 그려주고 함께 놀아줬다면 어땠을까요. 달랐을 겁니다. 결과는 항상 원인이 있고, 원인은 영조가 시작인 겁니다. 물론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말씀하신대로 원인이 하나일 수는 없죠. 다만 우선순위를 이야기 하자는 겁니다.

Q. 영조-사도의 관계 못지않게, 사도-정조(이효제/소지섭)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사도가 정조에게 느낀 감정의 정체는 뭘까요.
이준익: 질투도 있었을 테고, 아버지 영조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정조에게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영조가 허락하지 않아서 아들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이건 실화입니다. 이보다 더 큰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11살짜리 어린 며느리에게 그럽니다. “부부란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랑하고, 사랑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정작 자신은 혜경궁(문근영)과 그러지 못합니까.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Q.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을 통해 서자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구르믈’의 서자 견자(백성현)와 적자임에도 아버지에게 외면 받은 사도 중 누가 더 비극일까요.
이준익: 흥미로운 건 영조가 서자라는 겁니다. 견자와 같아요. 태생적으로 영조와 사도는 정반대인 거죠. 장자승계는 조선의 법통입니다. 그런데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입니다. 무수리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인 각심이의 아들이죠. 평생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의 서자 콤플렉스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이준익감독02
이준익감독02
Q. 영조를 안쓰러워하는 게 느껴집니다.
이준익: 결과적으로는 사도가 안타까운 인물로 자리매김 했지만, 그 과정에서 더 큰 고문을 받은 건 영조입니다. 자식을 죽이고 몇 년을 더 산 겁니까. 69세에 죽이고 83세에 죽었으니, 14년을 자식 죽인 애비로 산겁니다. 과연 행복했을까요? 하…(작은 탄성) 고문은 영조가 더 받은 거죠.

Q.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가 부모 먼저 죽는 거라고 하는데, 그 불효를 아비가 직접 행한 셈이죠.
이준익: 그러니까요. 그 고통을 어찌 말로 합니까.

Q. 영조와 사도를 그리면서 영조에게 감정이 조금 더 이입 되신 것 같습니다.
이준익: 왔다 갔다 했어요. 이 장면에서는 영조 편이었다가, 저 장면에서는 사도 편이었다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악인도 자기 부모님에겐 효자일 수 있습니다. 선해 보이는 인간도 자기 부모에게는 불효할 수 있고요. 아버지와 있을 때의 당신과 연인과 있을 때의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요? 모두, 역지사지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서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게 없어요. 법정스님이 그랬죠.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 라고.

Q. 많은 관객들이 ‘사도’를 보며 자신의 부모를, 자식을 떠올립니다. 과거 후회되는 지점들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이준익: 과거의 불편한 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게 가장 불행한 겁니다. 그런데, 저도 그래요. 저도 불행해요. 불행을 견딜 수 없어 영화를 찍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Q. 영화를 통해 현실을 위로 받는 다는 말씀인가요?
이준익: 정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겠죠.
이준익감독03
이준익감독03
Q. 그래서 감독님 영화가 따뜻한가봅니다.
이준익: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영화를 안 찍어요. 잔인한 영화를 찍죠. 저는 따뜻한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게 있죠.

Q. 그렇게 말씀하셔도, 감독님의 인간적 품성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굉장히 후합니다.
이준익: 어떻게 보면 저는 위선자입니다. 죽는 날까지 위선으로 살려고 작심한 인간 같습니다. “너 X같아 X새끼!”를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사는 거죠. 그런데 위선(僞善)도 죽을 때까지 하면 선(善)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위선(僞善)도 죽을 때까지 하면 선(善)이다.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호(號)가 ‘구마(丘磨)’인 걸로 압니다.
이준익: 어? 어떻게 아셨나요? 제 뒷조사를 했군요. 국정원 안기부에서 왔나 했습니다. 껄껄껄껄껄. 대학 때 동양화를 전공했습니다. 그때는 호라는 게 의미 있는 표식이었어요. 아무도 안 지어 주길래, 제가 하나 지어보자 했죠. 마침 책에서 아홉 ‘구(九)’자를 발견했는데, 꽉 찬 수가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다가 어떤 책을 읽는데, 중국은 대평원이 많고, 일본은 뾰족뾰족한 협곡이 많고, 조선은 언덕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중국-일본과 다른 게 언덕이구나’ 싶어서 아홉 구자를 언덕 ‘丘(구)’자로 바꿨죠. 그렇다면 ‘언덕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저 놈을 갈아버려?’ 갈 ‘마(磨)’자를 붙인 이유입니다. 그때부터 평생 언덕을 갈고 있습니다. 언덕이 평지가 될 때까지.

Q.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지은 호군요.
이준익: 맞습니다. 아홉 ‘구’자에서 언덕 ‘구’자로 바꾸는데 한참 걸렸고, 갈 ‘마’자를 찾는데 또 한참 걸렸습니다. 이 이야길 이렇게 자세히 한 건 처음인데…아, 그러고 보니 그때 그런 생각을 했네요. ‘언젠가 나이가 들어서 구(丘)를 구(九)로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산 거다’라는 생각. 그러니까 아홉 ‘구’자는 나중에 쓰려고 아껴둔 글자인 거죠. 잊고 있었는데, 말하다보니 생각이 나네요.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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