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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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사람들은 저마다 안치환을 다르게 기억한다. 어떤 이들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쓴 민중가수로, 또 어떤 이는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포크 가수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안치환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수단은 그의 이야기와 목소리가 담긴 음악 뿐. 지난 15일 5년 만에 11집 앨범을 발매한 안치환을 만났다.

“‘50’이라는 앨범이에요. 쉰 살 언저리에 경험한 저의 삶을 닮았습니다. 고난, 좌절, 그 속에서 다지는 재활의 의지와 희망, 또 그 와중에 바라보는 세상까지. 쉰 이라는 나이에 뮤지션으로서 가지는 자아성찰, 세상 바라보기, 일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난해 안치환은 1집부터 10집까지를 총 망라한 ‘컴플릿 마이셀프(Complete Myself)’ 발매했다. 안치환은 이 앨범에 그간 발매했던 97곡을 재녹음해 수록했다. 무려 10여년의 시간이 걸린 지난한 작업. 하지만 안치환은 “내 음악과 나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작업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 내가 하고 싶은 연주에 대해 자기완성을 시키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때문에 이번 앨범이 주는 의미도 남다르다. 하나의 챕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새로운 탄생. 안치환은 “‘재탄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밝혔다.

“11이라는 숫자도 그렇고 50이라는 숫자도 그렇습니다. 투병 이후의 앨범이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앨범 명을 ‘리벌스(Rebirth)’라고 할까 생각했는데 또 너무 티내는 건 싫더라고요. ‘50’이 더 낫죠? 사실 뮤지션이 자기 나이에 맞는 노래를 부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대 초반에 히트한 노래로 50대에 부르고 있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 나이에 맞는 노래에 맞는 노래가 있어야 노래를 부를 때 자기 만족감이 더 할 것 같아요.”
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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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안치환에게 있어서도 이번 앨범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지난해 4월 직장암을 선고받은 그는 이후 약 1년여 간 항암수술을 견뎌야 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그 시간에 안치환은 노래를 쓰고 불렀다. 그는 “몸이 좀 괜찮을 때 밴드 멤버들을 만나서 연습하고 녹음을 하며 앨범 작업을 진행했다”며 스스로를 “천생 ‘딴따라’”라고 칭했다.

“무슨 일을 하든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노래를 만들어요? 죽으면 끝인데’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사실 그래서 저 자신이 기특하기도 합니다. 그 감정들이 노래가 된다는 게, 스스로 천생 ‘딴따라’ 같은 느낌이에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 그곳에서 안치환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지금 날 지배할 순 없어. 내 목숨 주인은 암이 아니라 널 이겨낼 나라는 걸 내가 몸으로 보여주겠어(‘나는 암환자’ 중)”라며 삶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노래했고 이는 곧 “언젠간 오겠지 봄눈이 내리겠지. 달려가 가슴 가득히 꿈을 담아라(‘희망을 만드는 사람’ 중)”와 같은 생명의 노래로 이어졌다.

“절절함,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느끼는 정서는 전보다 훨씬 절실하지 않았을까요. 일종의 옐로카드를 받은 셈이에요. 암이라는 건 생활 습관이나 스트레스가 원인이니까요. 레드카드가 아님을 다행이라 여기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르게 살아가야죠.”

안치환은 개인적인 경험 외에도 지난해 전국민을 애통하게 했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소회도 담아냈다. ‘천국이 있다면’이 바로 그 곡이다. 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면서 “당시 암 선고를 받았던 시기와도 맞물렸다. 절절한 심정으로 곡을 썼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셰임 온 유(Shame on you)’에도 사회를 향한 안치환의 통렬한 메시지가 담겼다. 그는 “농담조로 말하자면 인터내셔널한 저항 가요 같은 곡이다. 조롱하듯 비판하는 노래인 거다. 옛날처럼 우울하고 진지하고 격분에 찬 노래만이 운동권 가요는 아니니까. 다른 노래들도 필요하다. 재밌게 넘어가는 느낌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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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은 그간 사회의 부조리함, 특히 노동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연세대학교 노래패 울림터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후 새벽, 노찾사 등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노래를 하고 싶었고 노래 팀을 찾다보니 울림터가 있었어요. 상업적인 가요가 아닌, 삶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노래들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죠. 무척 인상 깊었어요. 그 땐 노래도 민주화에 일조를 해야 하는, 노래가 정서적인 무기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울림터에 들어간 뒤로 제 생각도 자연스럽게 점점 바뀌게 됐죠.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솔아솔아 푸른솔아’라는 노래도 만들게 됐고, 지금까지 쭉 오게 된 거예요.”

그러나 안치환은 팀을 탈퇴한 뒤, 1989년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안치환이 변절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 안치환은 “변절은 반대가치를 지향할 때 쓰는 말 아니냐. 그러나 나는 프로를 지향했고 팀은 프로가 아니었을 뿐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때는 팀에서 나오면 무조건 변절이라고 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음악의 가치는 음악이에요. 모든 판단기준과 가치를 음악에 두어야 하죠. 음악으로 운동을 할 것이냐, 운동으로 음악을 할 것이냐를 두고 봤을 때 저는 전자 쪽이었어요. 그리고 음악으로 운동을 하려면, 그 음악은 뛰어나야 하고요.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정서적으로 아름답고 깊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운동이 되는 거니까요.”

솔로 전향 뒤 안치환은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의 포크 싱어 자리에 올랐다. 1999년에는 ‘안치환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결성, 록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안치환은 밴드를 꾸린 이유에 대해 “내 음악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밴드 멤버들은 제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자 서로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에요. 밴드의 호흡 자체가 뮤지션에게는 힘이자 고마움이죠.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하고 공연도 했지만, 한계가 있어요. 밴드 음악을 해야 자기 음악을 할 수 있어요.”
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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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안치환의 새 앨범이 발매된 후, 그의 공식 사이트에는 한 팬의 애틋한 글이 게재됐다. 이 팬은 “왠지 모를 눈물이 쏟아지지만, 희망을 노래하는 당신의 목소리에 가슴 한 켠 뻥 뚫리는 경험도 하고 있는 중입니다”며 절절한 마음을 쏟아냈다.

“저한테 노래는 희망이자 바람이자 꿈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게 결국엔 제 희망사항이자 노래로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노래를 듣고, 또 노래하는 제 모습을 보고 위안을 받거나 공감을 해준다면 가장 고마운 일이겠지요. 저 또한 노래를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노래에서 오는 저의 좋은 기운을 사람들도 함께 많이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더구나 제 세대는, 상식적인 리듬을 타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사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저축했으면 적어도 쉰 살 이후에는 좀 편하게 살아도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거죠. 신자본주의 세상이 인간의 삶을 몰아넣고 있더군요. 그런 세대에게 제 노래가 위로가(歌), 희망가, 송가가 되길 바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테이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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