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에서 이어옴) 1988년 영등포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장혁은 사춘기의 열병을 앓으며 공부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각 서클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집했다. ‘여고와 연합해서 쓴 시를 모아 교류하고 가을에는 연극을 한다.’는 말에 솔깃해 문예반에 들어갔다. 언젠가는 연극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기 때문. 생각과는 달리 문예반 동아리 활동은 고단했지만 소득도 있었다. “당시 선배들이 강제적으로 저녁 9시까지 시를 쓰게 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락 2개 싸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시를 쓰면서 단어를 압축하고 리듬을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시 소설이나 시집을 참 많이도 읽었습니다.”(이장혁)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교내 시화전에 출품한 자작시 <기도>는 주변 학교에 까지 알려질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전지전능하고 군림하는 신이 아닌 약한 자들과 함께하는 예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독특한 내용의 시였기 때문. 문예반에서 시를 쓰는 훈련은 그의 가사쓰기에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다. 그때부터 이장혁은 생각나는 무엇은 즉각적으로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사소한 것 까지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버릇은 지금도 그의 장착활동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이장혁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이장혁 1989년 영등포고 문예반 시절
이장혁은 학교에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특히 들국화 전인권과 김종서 모창에 능했던 그는 록커들이나 할 수 있는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쉽고도 거침없이 뽑아냈었다. 당시 영등포고에는 여러 개의 밴드부가 있었다. 고2때 짝꿍이 활동했던 밴드부에 빈자리가 생겨 보컬로 들어갔다. “콰이어트 라이트의 ‘커먼필즈 노이즈’, 헬로인의 ‘아이원트 아웃’ 신데렐라의 ‘노바디 풀’ 3곡을 주로 불렀습니다. 사실 문예부활동을 하면서 밴드부 활동을 병행하면 안 되는데 축제 때 무대에서 노래를 하다 문예부 선배들에게 들켜 큰 일 났다 생각했는데 노래를 조금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하라고 하더군요.”(이장혁)
고3때 기타를 치는 후배가 강남 서초동 서울고 앞에 있는 ‘는깨소극장’을 빌려 공연을 한 번 하자는 제안을 했다. “긴 여자 가발을 빌려 쓰고 노래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공연에 왔던 아이들이 저를 진짜 메탈하는 록커로 생각했으니까요(웃음).”(이장혁) 이후 고려대 앞 송설라이브 카페에서도 공연을 했다. 당시 이장혁은 고음은 물론이고 모든 음역을 소화했을 정도로 내지 못하는 소리가 없을 정도다. 음색도 지금도 달리 거칠고 터프했었다. 하지만 급성 A형 간염에 걸려 한동안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은 후, 미성으로 조용하게 노래하는 보컬스타일로 변했다.
이장혁 1990년 영등포고 재학시절 스쿨밴드 공연
고3 졸업반 때, 중학교 친구 황구하의 연락을 받고 봉천동 당곡고 근처에 사는 드럼 치는 친구 집 차고에 연습실을 만들어 연합밴드 <날개>를 결성했다. 그때 훗날 아무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던 1년 후배 성남고 이상훈을 만났다. “첫 공연은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소극장에서 했는데 폼 나게 치렁치렁한 가발을 쓰고 노래를 했습니다. 공연을 몇 번 하면서 밴드 활동하는 맛을 느꼈지만 정식으로 음악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2년 정도 활동하면서 자작곡 만들자는 말이 나왔는데 그냥 잉배아 몸스턴처럼 누가누가 기타를 빨리 치는가를 경연하는 것 같은 카피음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이장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등포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장혁은 온갖 추악한 인간군상을 경험하는 청소 일이 힘들어 그만두었다. “그만둔 뒤에도 가끔 영등포로 놀러갔는데 친하게 지냈던 어린 앵벌이 동생 기복이가 롯데월드에 놀러가고 싶다해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때 천사 누나랑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여관에서 하루 밤을 자는 사고를 쳤습니다. 남자에게도 첫 경험은 중요하죠. 당시 저는 짝사랑했던 누나가 있었건만 노숙자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이끌려 첫 단추를 잘 못 꿴 것 같은 죄책감 때문에 지금까지도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이장혁)
이후 천사누나의 전화를 거부한 그는 영등포로부터 도망을 쳤다. 전화위복이랄까.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가사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았던 노래를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1986년 가을처럼 이장혁은 성대시장의 교회 옥탑 방으로 올라갔다. 수첩에 적인 염세적인 메모를 바탕으로 가사를 써내려가 제목은 ‘추락’이라 정하고 멜로디를 입혔다. 첫 완벽한 창작곡 탄생의 순간이다.
노래가 완성되면서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갔다. 스물두 살의 이장혁은 기타를 둘러메고 신촌의 라이브 카페 촌으로 향했지만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배회하다 그냥 돌아왔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으러 갔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 그냥 방구석에 틀어박혀 노래만 만들면서 목표 없이 방황하는 20대 청춘기를 맞이했다. 용돈이 필요했지만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파트타임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25살 쯤 청량리에 있던 정신병원에서 자원봉사로 노래방 음악을 틀어주는 일을 시작했다. 대부분 행려병자들이 묵었던 그곳에서 다시 만난 이장혁은 몸을 숨겼고 천사누나의 애절한 ‘애모’를 들으면서 오열했다. 회색빛 20대와의 완벽한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다.
이후 신림역에서 지하철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철로로 뛰어들어 자살한 여성을 치우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26살 이장혁은 상도동 집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수한 영화를 섭렵했다. 5~6곡의 노래를 만들어 고교시절 밴드를 함께했던 1년 후배 이상훈에게 들려줬다. 서경대에 진학해서도 밴드활동을 하고 있던 그가 만족감을 표하며 밴드결성을 제의했다. 상도초등학교 동창도 국민대 밴드에서 드럼을 치고 있어 함께 국민대와 서경대 워커스 밴드 합주실을 오가며 연습을 시작했다.
이장혁이 자신의 음악을 들고 등장한 1996년은 인디음악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해다. 당시 밤에는 연습실에서 음악을 했던 이장혁은 낮에는 건물해체 막노동 일을 하며 월 180만원을 버는 주경야음을 했다. 어느 날, 건물 잔해 속에서 반짝이는 전자기타 한 대를 발견했다. 미국에서 건너온 제법 비싼 ‘이글’이란 전자기타였다. 어느 날, 밴드 멤버들과 홍대 앞에서 꽤 연주를 잘하는 나이 어린 밴드의 공연을 보았다. 공연을 보던 누군가가 ‘저건 아무나 하는 거야’라며 웃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연주하는 ‘이글’ 기타도 아무렇게나 버려져 주워 왔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밴드’란 밴드이름이 탄생했다. ‘암흑밴드’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 밴드 이름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part4로 계속)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이장혁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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