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에서 이어짐) 크랜필드의 베이시스트 정광수는 1985년 1월 24일 부산시 북구 덕천동에서 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공항공단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전국에서 집안어른들이 모이는 연례행사를 하는 학자집안의 장남이다. 어릴 시절 친화력이 좋았던 정광수는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은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형은 공부와 노래, 춤, 운동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저는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동네를 싸돌아다니고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인 그저 평범한 아이였습니다.”(정광수)
그의 기억에서 가장 좋았던 어릴 적 추억은 여름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며 어머니가 부르는 ‘가곡’과 김원중의 ‘바위섬’ 같은 노래를 들었던 순간이다. 미성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노래실기시험에서 전교1등을 차지했고 초등학교5학년 때까지 친척결혼식 때 결혼행진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재능을 보였다. 취학 전에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그는 학원에서 그린 그림이 부산시 유아 그림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그림그리기 재미에 빠져들었다.
부산 양천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울산으로 이사를 가 4년 정도 살았다. 이사를 간 후 적응을 못해 학교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활발했던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했고 남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 부산 동해중 2학년 때 찾아온 심한 변성기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간 노래방에서 고음부문에서 망신을 당해 일찌감치 가수인생의 종말을 고했다. “어린 시절 체격이 왜소해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춘기가 되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었죠. 평상시엔 미적지근한 성격이지만 화가 나면 제어를 못하고 난동까지 부려 학교생활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도덕선생님에게 쌍욕을 해 문제아로 찍혀 학교에서 집중관리를 받았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웃음)”(정광수)
형이 다녔던 부산 내성고에 진학하면서 평정심을 찾기 시작했다. 고1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마음의 안식을 제공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라디오 방송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팝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산타나의 음악을 들으면서 대중가요가 시시해지더군요. 이전에는 낙서수준으로 장난스럽게 그림을 그렸지만 마음을 잡으면서 미대진학을 결심하고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정광수) 2003년 부산 경성대 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오리엔테이션 첫 날. 숙소 가장 어두운 구석에 앉아있던 이성혁과 영화와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신입생과 복학생 환영엠티 장기자랑에서 제가 즉석에서 ‘공중분해’로 팀 이름을 지어 성혁이가 기타를 치고 제가 노래를 했습니다. 비록 한 번의 공연으로 공중분해 되었지만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정광수) 2학년이 되면서 김장환이 드럼, 이성혁이 보컬과 기타, 정광수가 이름도 없는 기타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싸구려 베이스기타를 구입해 커버 밴드 ‘YELLOW FEVER’를 결성했다. “성혁이가 드럼과 베이스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하더군요. 싸구려 전자드럼은 치기 싫어 용돈을 털어 베이스기타를 구입했죠. 2주 후에 Coldplay를 커버하는 첫 클럽공연을 했고 여름방학 때는 양산에 있는 영산대에서도 연습해 공연까지 했습니다.”(정광수)
밴드활동은 학업과 군 입대로 오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정광수의 집은 군입대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전역한 날 아무 것도 모르고 집에 갔는데 보증을 잘 못 서 집안이 빚더미에 올라 풍비박산이 나버려 단칸방으로 이사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정광수) 2학년을 마친 이성혁도 군 입대를 했다. 기타를 칠 수 없게 되자 선임이 추천해 주는 책들을 보다 단편소설과 시. 가사꺼리를 메모지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메모만 하고 있는 제가 이상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1년 동안 관심병사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웃음)”(이성혁) 이성혁은 전역 후 5평 남짓한 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복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래가 막막했던 그는 동이 틀 때까지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배회하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답답한 마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이라는 일탈을 시도했다.
“기차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도보로 가기는 위험한 구간은 버스나 기차를 타면서 10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죠. 마음을 잡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서는 막노동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편의점 아르바이트, 미술학원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학교 인근에 연습실 겸 숙소를 구했습니다. 전역한 정광수가 베이스를 맡고 리드기타에 김태우, 밴드에 관심이 컸던 지수현은 템버린을 치게 해 4인조 커버밴드 ‘루징피쳐스’를 결성했습니다. 팀 이름은 당시 제가 만든 자작곡 제목입니다.”(이성혁) “앞으로 밴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휴가를 나온 저에게 전역을 앞둔 성혁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베이스를 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정광수)
다시 뭉친 멤버들은 학교 근처 술집 옥상에 숙식이 가능한 작업실을 장만했다. 밴드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빨간색 구제 티에 적혀 있던 ‘사우스 소프트 볼’로 밴드이름을 변경했다. 일주일에 3-4곡씩 커버를 하며 매일같이 연습해 외국인들이 주 고객인 펍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정광수는 복학 전에 돈을 벌기 위해 부산의 한 금속공장에서 일했다. 3달쯤 되었을 때, 작업을 하다 오른쪽 새끼손가락 반 마디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비로소 온가족이 힘들게 버티는 상황과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깨달았다. 신경이 예민해진 정광수는 함께 음악을 하는 친구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서운하게 느껴져 이성혁과도 사이가 틀어졌다.
이성혁은 대학을 그만두고 작곡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정광수는 만화가를 꿈꿨던 정광수는 복학을 하면서 밴드는 또다시 공중분해 되었다. “다시는 음악을 안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처음 샀던 베이스기타를 발로 밟아 부러뜨리고 쓰레기장에 던져버렸습니다. 학교를 마칠 때쯤 저희 집안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지만 성혁이와는 서먹해졌습니다. 그 후 성혁이는 외국인 친구 ‘댄’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갔고 저도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후, 화상통화를 통해 예전의 우정을 겨우 되찾았습니다.”(정광수) (PAR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크랜필드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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