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불콰해 집에 들어오면 꺼내듣는 음악들이 있다. 한 선배는 술만 취하면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을 듣는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술이 취해 마음이 허전해지면 홍상수 영화를 꺼내 보곤 한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에피톤 프로젝트를 찾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최근 행적을 짐작하는 것처럼, 많은 여성들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듣고 그의 개인사를 예측하기도 한다고. 어떻게 교감을 하면 그런 것이 가능할까? 남자인 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Q. 2년 만의 새 앨범이다. 근황은 어땠나?
최근 발매된 3집 ‘각자의 밤’을 통해 에피톤 프로젝트는 “이른바 ‘에피톤표’ 음악이라 불리는 음악적 아이덴티티를 한 번 부숴내고 싶었다”고 한다. 음악을 들어보면 아이덴티티가 부숴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홍상수가 아이덴티티를 부순다고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 순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선우정아와 함께 한 ‘각자의 밤’의 리드미컬함, 몽환적인 느낌의 ‘플레어’가 기존의 에피톤 프로젝트와 사뭇 다른 곡들이긴 하지만 손주희가 부른 ‘미움’, 그리고 ‘낮잠’, ‘유서’ 등에 에피톤 프로젝트 특유의 상념들이 잘 담겨 있다. 각자의 밤을 다른 방식의 채워줄 상념들 말이다. 에피톤 프로젝트(차세정)를 만났다.
차세정: 2집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를 2012년 6월에 냈다. 발매후 딱 한 달이 지나 이승기 군에게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곡이 아니라 앨범 단위의 일이었기에 쉴 새 없이 곧바로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그 시점부터 2AM, 슬옹, 백아연 등 갑자기 외부 일들이 몰리기 시작하더라. 다른 뮤지션의 일은 그 쪽의 요구 사항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를 배웠다. 내 앨범을 내면 우리 회사 대표님(파스텔뮤직 이응민 대표)이랑만 싸우면 되는데.(웃음)
Q. 매 앨범이 2년의 기간을 두고 나왔다. 나름의 규칙인가?
차세정: 그렇지는 않다. 난 다작을 하는 스타일이다. 외부 작업을 하다가 슬슬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게 작년 초였다. 작년 5월에 유럽 여행을 갔다가 새 앨범에서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Q. 지난 앨범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은 루시아 앨범 작업 중 동유럽으로 훌쩍 떠났다가 영감을 받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도 여행이 영감이 된 건가.
차세정: 그런 거였다.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었다가 우연치 않게 이탈리아 ‘친퀘테레’의 사진을 보고 즉흥적으로 발권을 했다. 여행을 정말 좋아해서 역마살이 있냐는 말도 듣곤 한다. 코너에 몰리면 ‘안 되겠다 도망가자’ 하고 떠나는데 그런 게 ‘낙’이다. 적어도 여행 중에는 여기서의 일은 잊게 되지 않나. 그곳의 생활에 충실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 좋다. 하루 종일 걷기만 해도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이번 여행은 보름 동안 밀라노, 로마, 파리 등을 돌아다녔는데 정말 좋았다. 돈, 시간만 더 있으면 유랑만 하고 살아도 좋겠더라.
Q. ‘각자의 밤’이란 제목은 어떻게 떠올렸나?
차세정: 여행 마지막쯤에 파리에서 밤에 바통슈(센 강의 유람선)를 타고 센 강을 돌면서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작업에 돌입한 후에는 계속 ‘밤’만 떠올렸다. 난 앨범 작업할 때 주제가 흔들리면 안 된다. 주제가 흔들리면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흐르니까. 주제를 놓치지 않으려 계속 밤, 밤, 밤을 외쳤다.
Q. 여행을 다녀온 후 가장 처음 만든 곡은?
차세정: 선우정아가 부른 ‘환상곡’이었다. 원래 제목은 ‘난파’였다. 이번 앨범에서 리듬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대표적인 곡이 바로 ‘환상곡’일 거다. 회사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줬는데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이게 뭐야?” 이런 반응들도 있었다. 이 곡을 완성하기까지 과정이 길었다.
Q. 어떤 과정?
차세정: 여러 보컬들과 작업을 해봤는데 잘 안 붙더라. 리듬을 타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동요처럼 부르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정아에게 가이드를 의뢰를 했다. 정아가 부른 버전이 궁금하더라. 부탁하고 일주일 쯤 뒤에 가이드 보컬이 녹음된 버전이 돌아왔는데 들어보니 ‘얘가 선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결국 정아가 노래를 하게 됐다. 정아가 아니면 이 곡은 발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장 처음에 만든 곡인데, 가장 마지막으로 작업이 끝났다.
Q. ‘환상곡’의 넘실대는 리듬이나 촉촉한 사운드가 이전의 에피톤 프로젝트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른바 ‘에피톤표’ 음악이라 불리는 음악적 아이덴티티를 한 번 부숴내고 싶었다고 하던데.
차세정: 언젠가 곡 의뢰가 왔는데 ‘이화동’과 같은 곡을 만들어달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내가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보여줄 것이 이만큼 쌓여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중 다른 것들, 재밌는 것들을 해보려 했다. 전주만 들어도 에피톤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겠다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것을 깨고 싶었다. 그래서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셔플, 컨트리 리듬 등을 써보기도 했다.
Q. 어떤 변화들이 있었나?
차세정: 아마도 제 팬들은 2집 때 정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정서가 있는 앨범 말이다. 한 편의 긴 글, 또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앨범. 이번에는 다양한 정서를 담아보고자 했다. 각각의 곡들이 개연성은 부족하더라도 싱글로서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Q. 아진이 노래한 ‘플레어’와 같은 몽환적인 색체의 곡도 기존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차세정: 맞다. 이 곡은 실제 악기를 통해 몽환적인 색체를 표현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런 색체의 곡을 미디로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기타 아르페지오로 표현하려니 쉽지 않았다. 기타를 쳐준 홍준호 형이 애를 많이 먹었다.
Q. 전작은 전곡을 본인이 불렀다. 이번에는 다시 객원가수들이 참여했다.
차세정: 내 목소리가 지겨웠던 거다.(웃음) 내가 가창할 수 있는 한계를 잘 알고 있다. 2집을 가만히 듣는데 조금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관된 정서가 깔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노래를 썩 잘하지 않는 내가 전 곡을 하는 것은 좀 버겁더라. 음악에 어울리는 보컬들을 찾고 싶었다.
Q. 손주희가 노래한 ‘미움’ ‘회전목마’와 같은 곡들은 기존 에피톤 프로젝트의 정서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차세정: 손주희는 오디션을 통해 만나게 됐다. 이번 앨범 작업을 위해 정말 많은 오디션을 치렀다. 손주희는 루시아의 ‘선인장’을 불렀는데 느낌이 바로 오더라. ‘미움’은 가사를 쓰다가 울었던 곡이다. 회사에서는 이 곡을 제일 좋아하더라. 내가 부른 ‘미움’과 주희가 부른 ‘미움’이 타이틀곡으로 경합을 붙었는데 결국 주희의 버전을 타이틀로 정했다. 내가 진 거다.(웃음) 누가 들어도 전달력이 더 좋았으니까.
Q. 에피톤 프로젝트가 노래한 ‘미움’은 앨범으로만 들을 수 있다.
차세정: 완성된 곡보다 데모에 오히려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었을 때 처음 감정이 더 잘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미움’은 처음 불렀던 버전은 도저히 싣기 힘들 것 같아서(웃음) 다시 부른 버전을 넣게 됐다. 주희 버전과 비교해서 들어도 재밌을 것 같고.
Q. ‘친퀘테레’는 실제로 이탈리아 친퀘테레를 여행하고 만든 곡이다.
차세정: 앨범 부클릿에 실린 이미지도 이곳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반 이상이다. 절벽 아래 마을이 있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해변에 앉아서 비라 모레티(맥주)와 생선튀김을 먹으면 야,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싶더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친퀘테레에 대한 안내서와 같은 곡을 만들고 싶었다.
Q. ‘유서’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차세정: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 ‘아모르’와 같이 노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다가, 내 노년은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쓰게 된 곡이다. 왜,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날이 있지 않나. “음악이 뭐지? 사는 게 뭐지?”하는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하는 거 말이다. 단조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휘황찬란한 레퀴엠처럼 하고 싶지도 않아서 소박하게 만들게 된 곡이다.
Q. 에피톤 프로젝트는 윤상, 공일오비의 정석원, 토이의 유희열과 같은 선배들을 잇는 아티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세정: 정말 영광이다. 그 분들은 모두 나에게는 교과서와 같은 분들이다. 90년대에 참 좋은 앨범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 선배들이 남긴 음악들 덕분에 자기 음악에 대해 고집 부리는 마음가짐을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싱글을 내지 않고 정규앨범을 고집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덕분이다.
Q. 앞으로도 싱글 낼 생각은 전혀 없나?
차세정: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시장이 많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난 앨범에 실리는 모든 곡을 타이틀곡 만들 듯이 작업을 하지만 대중이 그 곡들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니까.
Q. 처음에 파스텔뮤직과는 작곡가로 계약하자는 줄 알았다고 하던데.
차세정: 2008년에 자비로 디지털 싱글을 만들었을 때 파스텔뮤직에서 만나자고 하더라. 나처럼 작곡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난 작곡가로서 날 필요로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계약을 하는데 작곡가가 아닌 아티스트 계약서인 거다. 그래서 의아해했더니 회사에서는 “어서 도장 찍고 소주 마시러 가자”고 하더라.(웃음) 그렇게 시작된 거다. 정규 1집을 제작할 때는 전부 객원 보컬을 쓰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를 녹음할 때 대표님이 내가 한 가이드 보컬 훨씬 느낌이 좋다고 하셔서, 내가 직접 부르게 됐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보컬 부스에 들어가서 녹음을 했다.
Q. 본인은 싱어송라이터가 될 생각은 없었던 것인가?
차세정: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 내가 노래를 못하는 것을 잘 아니까. 난 노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의 길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가이드 보컬을 녹음할 생각으로 작업한 거다. 노래에 대한 강박이 있고 항상 부담이 된다. 내 가창의 빈도를 점점 줄여나가고 싶다. 이번 앨범 작업을 할 때에는 남자 객원 가수를 구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회사에서 결론은 “네가 부르는 것이 가장 낫다”는 거였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노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래에 대한 강박을 계속 갖지 않을까?
Q. 최근 가요계를 보면 에피톤 프로젝트 풍의 곡들도 꽤 볼 수 있다. 이승기에게 준 곡 ‘되돌리다’ 차트에서 꽤 오랫동안 1위를 했다. 작곡가로서도 활약할 여지가 클 것 같은데.
차세정: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 2AM에게 줬던 곡은 내 음악을 만들 듯이 작업했다. 과거에 보컬 그룹의 하모니를 짤 때에는 이런 방식으로 하면 멋지겠다고 생각해놓은 곡들이 있었다. 그 곡이 2AM에게는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재밌게 작업했다. 이승기 앨범은 피 말리는 작업이었다. 이승기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상당했다. 일요일에도 불쑥 작업실로 찾아와서 작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음악은 내가 만들었지만, 실질적인 주도는 이승기가 했다.
Q. 앞으로 함께 작업하고픈 뮤지션이 있다면?
차세정: 좋은 기회가 생기면 누구든지 상관없을 것 같다. 평소에 해보지 않은 재밌는 작업을 많이 해보고 싶다. 요새는 힙합에 꽂혔다. 힙합은 트랙을 만드는데 있어서 특이한 아이디어들이 많다. 나 음악과는 발상 자체가 다르더라. 난 항상 코드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힙합은 리듬이 선행된다. 요새는 그런 방식으로도 곡을 만들어보곤 한다. 곧 파스텔뮤직에서 ‘사랑의 단상’이라는 기획앨범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의외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파스텔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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