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는 현명하고 명확했다. 현명과 명확. 닮은 두 단어가 늘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정희는 명확하고 현명한 이였다. 본인이 콘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몸에 배어 있으니, 그는 확실히 그랬다.
우연처럼 이르게 된 배우라는 인생에서 느낀 만족감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자연인, 인간 문정희로 살아가는 가치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미래의 불명확한 꿈을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 않는 지혜, 그러나 현재의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미래마저 거머쥐게 된 그에게 균형잡힌 인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MBC 주말 드라마 ‘마마’를 성공시킨 그는 두 편의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와 ‘카트’ 개봉을 앞두고 있다. 부지런했던 한 해의 마무리를 앞둔 표정은 부쩍 더 풍요로워보였다. 그 풍요로운 표정 가운데,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작품에 대한 자부심 속에 들려준 그녀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숨 가쁘게 2014년을 살았던 모양이다. ‘마마’를 마치자마자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영화가 두 편이라니.
문정희 : 시간순으로 말하면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를 가장 먼저 찍고 그 이후 ‘카트’를 찍었다. 그리고 ‘마마’에 들어갔으니 거의 못 쉬고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두 영화의 개봉 시점이 비슷하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더 잘 된 것이라 믿는다.
Q. ‘마마’는 여자들끼리의 케미스트리, 워맨스(Womance)를 다뤘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문정희 : 여자들끼리의 우정, 의리는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다뤘으나, 국내에서 기억될만한 성공 사례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마마’의 성공은 의미 있었다. 지은과 승희는 엄마로 등장하지만 여자였고,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여자라는 친구가 등장해 대중에 어필했다. 흔히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진 남자들끼리의 의리가 있듯, 여자들끼리의 우정도 있고 이에 많이 공감해주신 듯 하다.
Q. 충무로나 브라운관이나 남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여배우 설자리가 부족하는 고질적 문제 가운데 특히 ‘마마’의 성공은 색다른 감회로 다가올 법하다.
문정희 : 남자 여자를 떠나 의리와 우정을 다룬 드라마도 특히 국내에는 없다. 그런 가운데 여자들끼리의 우정과 의리를 다룬 것은 즐겁고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소재의 범위가 확장된 작품임이 분명하고, 앞으로도 여러가지 소재들을 드라마가 적극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 예술이 사회의 선입견을 깨는 작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모든 테크놀로지보다 문화가 앞서 가지 않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르네상스 시대, 중세 때도 문화가 끌고 가는 힘이 가장 빨랐다. 책을 볼 때마다, 그림을 볼 때마다 그런 문화의 힘이 느껴져 새삼 문화의 진화란 무섭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나는 인간이 진화된다기 보다 문화가 진화된다고 생각하고. 여하튼, 그런 면에서 ‘마마’는 새로운 영역을 펼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Q. 사실 승희 캐릭터의 시한부 설정은 어쩌면 빤한 것이기도 했는데, 워맨스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한 데 성공한 듯한 인상이었다.
문정희 : 시한부라고 하면 통속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소재이지만, 드라마는 모든 갈등 뒤에 쌓인 여자들끼리의 우정 속에 살리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를 지켜줄 수 있는 믿음의 상대가 친구라는 점에서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게 된 것 같다. 시놉시스를 보았을 때,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잘 전달된다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내게 누군가 다시 한 번 ‘한승희를 할래, 서지은을 할래’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없이 지은을 선택할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역이기도 했다.
Q. 지은이 버라이어티 하다는 말에 공감하는 것이 처음 이 이야기는 승희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승희와 지은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 때문이다.
문정희 : 지은은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고 애교도 많고 사랑스러운 여자였으나 문제점도 많이 안고 있는 여자였다. 어떤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마마’는 지은의 자아찾기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승희가 등장했다. 남편의 전 연인이자,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우정을 쌓았고 마음을 나누었는데 갈등이 폭발하고 나서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여자였다. 지은이 처한 상황은 끔찍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감정이나 상황을 연기하기에 스펙트럼이 상당히 크더라. 잘 할 수 있을까 겁도 났다.
Q.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우정이란 것은 저평가 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도 ‘마마’의 성과는 의미있었다.
문정희 : 나 역시 여자이지만, 여자가 가지고 있는 여자에 대한 선입견도 상당하다. 여성끼리의 교육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극중 서지은 역시 자아보다는 아이와 남편, 돈에 대리만족하며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살아갔다. 그러다 한승희를 통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누구이며,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교육시켜주는 영화나 드라마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지 않나. ‘마마’ 역시 서지은을 통 그런 이야기를 조금은 들려줬던 것 같다. 또 앞으로도 여자가 여자를 사랑해주고 선입견을 깨주는 작품들이 나오길 바란다. 여성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다 존재하니 서로 어우러져 돌아보고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Q. 이야기를 듣다보니, 승희를 바라보는 지인의 감정이 꽤나 풍부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문정희 : 승희의 변화 간극에 대해 초반에 고민을 많이 했다. 연기를 함에 있어 승희가 몰라야 했던 내용들이 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다보니 방송을 보지 않았다. 그래야 승희를 순수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서지은을 살아가야 우정에 대한 배신, 사람에 대한 좌절, 절망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전달되길 바랐고 그래서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었다. 지은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초반에는 여성스러운 의상을 입었다면, 후반에는 한승희와 닮은 외모와 헤어스타일로 변했다. 그러면서도 서지은을 잃지 않은 의상이었는데, 그런 코드를 심으려고 아이디어를 내고 스타일리스트와 협의하는 과정을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Q. 송윤아라는 배우와의 케미스트리 역시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았다.
문정희 : 아무래도 송윤아 씨와의 호흡이 크게 작용했다. 송윤아라는 배우를 못 만났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다. 송윤아 씨 역시 ‘정희야, 난 네가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거야’라고 따듯하게 이야기 해주시덛라. 그런데 리허설을 잘 못할 정도로 송윤아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승희에 대한 감정과 같아 짠한 마음이었다. 송윤아가 한승희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어떤 힘든 점을 느낄지 너무 잘 알기에 그랫다. 참, 새삼 케미스트리는 무서운 것 같다. 그것이 끌고 나가는 힘을 이번에 경험했기에 좋았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 ‘마마’에서 건진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송윤아라는 배우라고 말할 것이다. 문정희라는 사람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존재를 만난 것이 행복하다.
Q.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권유로 배우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생을 바꿔준 그 친구가 떠올랐을 것 같다.
문정희 : 그렇다. 그 친구 생각이 나곤 했다. 여고를 다녔고, 그 친구는 그림을 그렸다.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고 홍대에 미술학원을 가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내게 ‘넌 네 인생의 기회를 줘봐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더라. 그 말이 계기가 되어 배우는 운명처럼 내게 찾아왔다. 지금은 이 직업에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Q. 돌이켜보면 본인의 강렬한 의지보다 친구의 말 한 마디로 인생이 바뀐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래서 배우가 더 운명같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문정희 : 아, 정말이지 운명같다. 그 시절 나는 배우라는 지점이 있다면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고 차마 생각도 못했다. 연기를 처음 배울 때도 인문학적 정보나 인간의 역사, 심리적인 지점에서 공부할 것이 있구나 생각했지 내가 무대에 서고 인기를 받고 연기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연습하는 작업에 익숙해지고 졸업 이후에는 돈을 벌어야 하니 이런저런 오디션을 보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 시작은 연극, 이후에는 뮤지컬도 했고 영화 오디션을 시작으로 TV까지 나오게 됐다. 혈혈단신 몸으로 부딪히며 여기까지 왔는데, 운이 참 좋았다.
Q. 배우로 살아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그 과정 전 좌절을 느껴본 적은 없을까.
문정희 : 당연히 있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좌절을 느꼈었다. 캐스팅에서 좌절되고 원하던 작품에 합류하지 못할 때의 답답함. 기회가 오지 않음에서 오는 좌절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가 부족한 것일까’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때의 막막함이 가장 컸다. 어렸을 때는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면 해결하고 개선할 수 있었을텐데, 사회에 나오니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더라. 지금에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소위 말하는 짬밥의 문제였다. 하지만 좌절했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잘 될 것이라는 기대나 포부 보다는 ‘무엇이 문제일까’에 골몰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아마 난 죽을 때 까지 ‘뭐가 문제일까’에 더 관심을 두지 않을까.
Q. 야망이 없는 타입이라는 말인가.
문정희 : 야망을 안 가져본 것은 아니다. 야망 자체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기회가 찾아오지 않으니 욕심을 품으면 안되겠구나 했다. 기회가 아예 오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하다보니 나로선 작은 기회도 소중하게 여겨지더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하고 나중에 더 설레는 것을 해보자 하며 닥치는 것들에 소중히 임했다. 시간이 지나보니 그 때 그 때 했던 것들이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다. 오히려 요즘은 내가 때가 탄 것인지, 저울질도 하게 되는데 그때는 정말 순수하게 임했다. 그리고 지금도 매번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그 순간을 놓치지 말자, 지금보다 더 중요한 순간은 없다는 마음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내 목표이자 지키고 싶은 초심이다.
Q.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문정희 : 내 삶에는 모든 것이 우선순위에 있다. 배우로서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가족도 중요하고 내 자신도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매 순간 순간이 소중하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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