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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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끝판왕이 따로 없다. 오로지 출세에 대한 욕망 하나로 갖은 악행을 불사하는 장태정은 KBS2 ‘천상여자’ 속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자, 시청률 고공행진의 동력이었다. 배우 박정철이 장태정 역을 맡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앞서 SBS ‘정글의 법칙(이하 정법)’ 시리즈로 의외의 매력을 뽐냈던 그였기에, 악역의 느낌은 배가 됐다.

지난 4월 결혼식을 올린 뒤 신혼여행까지 미뤄가며 작품에 집중했던 그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천상여자’를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고 말한다.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열정을 고백하는 박정철. 그와의 대화는 변곡점을 맞이한 배우의 치열한 자기반성을 지켜보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Q. 장장 6개월간에 걸친 여정을 마쳤다. 시원섭섭할 것 같다.
박정철: 이제 조금 편해졌다. 후련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뭔가 또 다른 숙제를 받은 것 같고.

Q. 결국, ‘천상여자’는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정철: 사실 어차피 사람 사는 이야기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극성이 강한 이야기였던 만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풀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Q. 예를 들자면.
박정철: 자살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거겠지. 작가에게 제안해보기도 했으나 이미 풀어놓은 이야기가 있던 터라 반영은 안 됐다, 하하. 철창 안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태정의 모습이 뭔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100회 이상을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더 아쉬움이 컸다.

Q. 촘촘하게 짜인 전반부와 비교하면 후반부는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이 있다.
박정철: 다들 공통적인 의견이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앞당겨서 차분히 풀어냈다면 좋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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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무래도 일일드라마의 한계를 벗어나기에는 어려움이 컸던 것 같다. 시청률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극적인 전개도 필요했겠고.
박정철: 분명 장르적인 한계는 있었다. 사람들의 구미를 잡아당기는 게 필요한 드라마였으니까. 모든 배우가 똑같이 느낀 부분이지만, 이야기 자체의 극성이 강하다 보니 배우가 나름의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막상 연기해보니 상상 이상이더라, 하하. 한편으로는 그런 분위기였기에 악역을 맡아 행동이나 감정을 원 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Q. 장태정이라는 인물만 놓고 보자면 연기하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특히 후반부에는 강약 조절 없이 계속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상황이 반복됐다.
박정철: 솔직히 버거웠다. 장태정이라는 인물 자체가 초반부터 감정의 축적 없이 계속 터트리는 스타일이었다. 비슷한 감정에서 한계를 깨야하는 데 그게 말처럼 잘 되지는 않더라. 감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미쳐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지만, 난관에 부딪히면서 좌절도 맛봤다. 어쨌든 배우로서 충실하게 캐릭터에 몰입하려 했다는 데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Q. 개인적으로는 앞서 ‘정법’을 통해 대중적인 이미지를 쌓았던 터라 악역 변신이 더 극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박정철: 나름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셈인데, 정말 부담이 컸다. 실제의 나와 너무나도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또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하더라. 그 정도면 절반은 성공한 게 아닌가.

Q. 제작발표회와 기자간담회 때 “단면적이지 않은 악역을 그리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했었다. 작품이 끝난 터라 하는 이야기지만, 당신이 평가하기에는 어떤 것 같나. 성과가 있었나.
박정철: 하하, 아니요. 캐릭터보다는 극적 전개가 우선이었기에 표현의 영역에는 제한이 컸다. 나중에는 극의 흐름에 끌려가다 보니 있는 그대로 충실히 표현하는 게 최선처럼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때쯤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내가 다 공감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것. 다 내 생각대로는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배우로서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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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천상여자’는 당신이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을 만큼 극성이 강했다. 또 그런 극성은 우리가 소위 ‘막장 드라마’라 부르는 드라마의 특성이기도 하고.
박정철: ‘막장 드라마’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자연스러운 느낌은 아니라는 거겠지, 하하. 근데 꼭 어떤 사건이 현실에서 ‘가능하다’, ‘안 하다’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각자가 놓인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뭐든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토대로 꾸며진다는 거다. 감정은 상대적인 거니까. 또 막장 드라마라고 해서 그 안에 보편타당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막장 드라마와 같은 극성이 강한 이야기는 다른 작품과 다른 것 같다. 자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를 통해 시청자에게 쾌감을 느끼게 하는 데는 효과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마치 가려운 부분은 대신 긁어주는 느낌이랄까.

Q. 하긴 꼭 막장 드라마를 ‘좋다’ 혹은 ‘나쁘다’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정철: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많이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대리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까. 어떤 작품이든 이것을 위해 진정성을 갖고 임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다. 그 노고까지 막장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Q. 어느덧 30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당신만의 연기관이 섰을 법도 한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여전히 고민이 많은 것 같다, 하하.
박정철: 연기라는 게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다. 모르고 덤빌 때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요즘에는 그런 마음도 안 생긴다, 하하. 더 많이 알고, 경험해봤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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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당신이 하고 싶은 연기는 무엇인가.
박정철: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나만 만족하는 하는 연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감정과 상황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라면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겠다. 어느덧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도 했고. 그 배우로서의 책임감의 무게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겠다.
박정철: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감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말만큼 공허한 것도 없으니까. 이번 작품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시작했을 때는 연기자는 연기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인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배우는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충실히 연기로 말해야만 한다. 물론 수없이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 마다 되뇌었다,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다’고. 남자로서든 배우로서든, 이제는 나를 좀 더 비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만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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