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은 배우를 평생 따라다닌다. ‘밀양’의 신애가 전도연에게 그렇듯, ‘공공의 적’ 강철중이 설경구에게 그렇듯,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가 김선아에게 그렇듯. 배우입장에서는 그 이미지가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배우가 어떤 작품의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된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그건 그만큼 배우가 캐릭터에 밀착됐다는 의미이고, 그것을 관객이 인정했다는 의미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천우희는 영특한 배우다. 그 많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써니’에서 본드녀로 존재를 알리더니, ‘한공주’에서는 아예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을 새겨놓고야 만다. 집단 성폭행이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도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견뎌내는 ‘한공주’ 속 공주의 말투, 표정, 흐느낌, 잔상… 어느 것 하나 천우희의 것이 아닌 게 없다. 재발견이라는 상투적인 단어로 그녀를 설명하는 건 지루한 일이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한공주’를 만나보시라, 꼭!

Q. 시사회 이후 ‘한공주’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천우희:
잔상이 많이 남는 영화다.

Q. 알겠지만 떠오를 때의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웃음) 보는 관객이 이럴진대, 직접 그 상황을 연기한 배우는 오죽할까 싶었다. 집단 성폭행 당하는 씬을 가장 먼저 찍었다고.
천우희:
스케줄 표를 보고 첫 촬영이 성폭행 씬이라는 걸 알았다. 스태프에게도 그렇고 나에게도 그렇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영화에 임해야 하는가를 감독님이 피력하셨던 것 같다. 그 의도가 너무나 잘 이해됐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촬영했다. 배우들 간의 교류가 거의 없을 때라, 공주에게 몰입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Q. 영화를 보는 내내 공주가 참 잘 견디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공주가 어떻게 보여 졌으면 했나?
천우희:
나는 공주가 굉장히 본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생존은 본능이잖나.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하나로 버텨낸다. 그런 점에서 잘 견디는 친구인 동시에 강한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Q. 실제 천우희는 어떤가. 역경 앞에서 강한가?
천우희:
공주랑 비슷한 점이 있다. 쓰러질 듯 쓰러질듯 하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남들은 내가 많이 약하고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 심적으로 힘든 일을 있어도 잘 견뎌내는 스타일이다.


Q 당신에겐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여려 보이는 이미지 하나, ‘본드녀’ 이미지 하나.(웃음)
천우희:
(웃음) 맞다. ‘써니’ 이전에는 어딜 가도 약해 보인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런데 ‘써니’에서 ‘본드녀’ 닉네임을 얻은 이후엔, 세 보인다는 이야기만 듣는다.

Q. ‘본드녀’로 기억되는 건 여배우로서 어떤가.
천우희:
좋다. 이전에는 “나는 결코 약하지 않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어필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이젠 아니다. 다들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다.(웃음) ‘본드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됐고, 그로인해 나를 알릴 수 있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Q. 어떤 작품은 배우를 평생 따라다니기도 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문소리 씨에게 ‘오아시스’ 한공주가 그랬듯, 당신에게는 ‘한공주’의 공주가 그럴 거다. 이 작품을 선택하면서 배우로서 기대한 바가 있었을 것 같다.
천우희:
특별히 바라는 건 없었다. 그냥 이 작품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찍으면서는 연기에 대한 흥미도 커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작품을 찍을 때까지가 내 몫일 뿐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작품이 어떻게 남을지는 내 손에서 떠난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바라는 건 있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많지만 비슷한 감정으로 끝나버리곤 하는데, ‘한공주’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다른 방향에서 공감을 주는 영화였으면 했다.

Q. 개인적으로 영화가 질척거리는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천우희:
시나리오 자체도 굉장히 깔끔했다.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잘 나왔다.

Q. 영화만큼이나 연기에 대한 평가도 좋다. 많이들 물어 봤을 것 같은데, 프랑스 여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마라케시 영화제에서 당신의 연기를 호평했다.
천우희: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다. 마리옹 꼬띠아르 소식을 새벽 6시에 전화로 받았다. 통화를 하고 난 후, 다시 잠을 못 잤다. 너무 좋아서. 머리에 뭔가 ‘띵’ 맞은 느낌이었다.

Q. 국내배우 중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연기를 찬사한다면, 누구였으면 좋겠나.
천우희:
김해숙 선배님! 김해숙 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한다. 볼 때마다 ‘너무 멋있다’는 생각을 한다.

Q. 그 분도 약간 ‘본드우먼’ 같은 느낌이(일동웃음) 카리스마가 대단하시니까.
천우희: 김해숙 선배님이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 분에게 “저 친구, 연기 잘 하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Q. ‘한공주’는 영화 관계자들, 이를테면 감독들도 굉장히 좋아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신을 눈여겨 볼 연출자들이 많을 것 같다.
천우희:
정말 그럴까. ‘써니’ 이후에는 강한 이미지 때문에 꺼려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한공주’ 이수진 감독님도 처음에는 그 때문에 주저하셨다. 결국 내가 설득했지만.

Q. ‘써니’때 당신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정말 대단했다. 그래서 ‘써니’를 통해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하강한 면이 없지 않다. 잔인한 질문일 수 있는데 주위의 관심이 식은 후, 어떤 마음이었나.
천우희:
그때 굉장히 들떠있었다. 일이 잘되리라는 기대도 분명히 있었다. 많은 대중이 알아봐 줬고, 회사도 생겼고,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뀌었다. 그래서 기회가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써니’를 찍기 전에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늦은 게 아니냐’고 했지만 나 스스로는 꽤 괜찮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주위에 연기 기회를 못 잡아서 고생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거든. 그들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써니’ 이후에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때가 마침 스물 중반을 넘어설 때여서 불안한 것도 있었고, 기대만큼 되지 않아서 힘든 것도 있었다. 배우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배우로서도 그렇고 인간 천우희로서도 그렇고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한공주’를 만날 수 있었고, ‘내가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한공주’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Q. 한 순간 주목받다가 또 그렇게 한 순간 사라지는 배우들이 꽤 많다. 일이 풀리지 않는 시기에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천우희:
일단 연기를 하고자 하는 마음. 그 진정성은 변함이 없어야 할 것 같다. 그걸로 인해 굉장히 힘들긴 하다. 배우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사람을 굉장히 괴롭게 만들거든. 하지만 그 끈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지 기회가 왔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Q. 그 순간 진정성을 놓고, 가벼운 유혹에 빠지는 친구들도 많은 걸로 안다. 배우보다 엔터테이너 쪽으로 가는 친구들도 많고.
천우희:
맞다. 그런 경우도 없지 않다.

Q. 연기에 대한 진정성과 함께 또 지녀야 할 게 있다면?
천우희:
주변의 말을 어느 정도 귀담아 듣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부모님 때문에, 나이 때문에, 돈 때문에…여러 현실적인 벽들로 인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본인을 믿고 나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신경 쓰다 보면 힘들어진다. 결국 본인을 믿는 게 중요하다.
Q. 그래서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을 하나 보다. -100에서 +100까지가 있다고 치면, 힘든 시기에 어디에 있었던 것 같나?
천우희:
-85까지 내려가지 않았나 싶다.(웃음)
Q. 지금은 어디까지 올라와 있나.
천우희:
지금은… 지금은 아주 좋다. 불안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다. 너무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거든.(웃음) 지금은 +50정도?(웃음)


Q. 말한 대로 다음 스텝이 정말 중요할 게다. 지금 스물여덟인가? 개인적인 생각인데,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는 스물 셋부터 스물여덟 정도가 아닌가 싶다. 지나와 보니, 그렇더라고. 그래서 그 시기에 정말 잘 놀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천우희:
와. 공감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한다.

Q. 그래서 잘 놀고 있나?
천우희:
글쎄. 예전에는 많이 소심했다. 주변사람 생각하느라 이리저리 주저했던 것 같고.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다. 그런데 20대가 2년 밖에 안 남으니까, 뭐라도 저질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훗날 돌아봤을 때 후회는 없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방탕하게 놀겠다는 건 아니고.

Q. 왜, 한번쯤 방탕하게 놀아도 봐야지.(웃음)
천우희:
하하. 나랑은 조금 안 맞더라고. 지금보다 어릴 때, 놀아보려고도 해 봤는데 그다지 흥미를 못 느꼈다. 술 마시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재미가 없었다.

Q. 당신이 했던 가장 큰 탈선이 뭔가? 탈선이라는 단어는 조금 그렇다면. ‘내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라는 것들 있잖나.
천우희:
어떻게 보면 나에게 가장 큰 탈선은 연기다. 내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반응이 “네가?”였다. 배우는 예뻐야 하고, 키가 커야 하고, 재능이 많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니까. 그래서 다들 “네가 막연하게 하고 싶은 꿈인가 보다” 하고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 연기를 하고 있잖나. 남들의 “넌 평범한 캐릭터밖에 못할 텐데”라고 했는데 반대로 강한 역할들을 해 오고 있고. 그래서 연기가 나에게는 탈선이라면 탈선이고 도전이라면 도전이다.

Q. 당신의 끼는 어디에서 온 건가?
천우희: 아빠! 아빠가 도예를 하신다. 노래도 굉장히 잘 부르시고. 엄마나 나보다 감성이 훨씬 풍부하시다.

Q. 많은 인터뷰에서 스스로의 얼굴이 평범하다고 얘기했던데, 정말 평범하다고 생각하나?
천우희:
예전에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다”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굉장히 흔한 얼굴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아닌데? 독특하게 생겼는데?”라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조금씩 다른가 보다. 음.. 나 스스로는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성격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그런데 또, 평범하다고 생각하니까 연기가 더 재미있게 다가오는 면도 없지 않다.

Q. 오디션을 보거나 감독님들과 미팅을 할 때 배우로서 어떤 면을 어필하나.
천우희:
어필한다기보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임한다.

Q. 이것 봐, 이거. 평범하다면서~(웃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자리에서 떨기 마련이다.
천우희:
하하하. 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주의다. 노력이야 물론 한다. 최선을 다해 임하기는 하는데, 안 되면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한다. 잘되면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오디션을 볼 때 떨지 않는 편이다.

Q. 봉준호 감독님, 원빈, 신동엽 이런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던가?
천우희:
상대방의 지위라든지 능력이라든지 나이라든지 이런 걸 다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건데 뭐 어때?’ 라는 생각을 늘 한다. 봉준호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갔으면 떨려서 오디션에서 떨어졌을 거다. 원빈 오빠를 만났을 때도 ‘와, 원빈이야~ 원빈~’ 이런 마음이 없었다. 그냥 인간적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인간적으로 알고 나서 그 분들이 더 좋아졌다.

Q. 대범한 면이 있나보다. 배우로서 본인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나.
천우희:
굉장히.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Q. 지금의 템포에 만족하고?
천우희:
만족하다. 초반에 성공했다면 연기의 깊이가 지금보다 훨씬 얄팍했을 거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의 템포, 좋은 것 같다.

Q. ‘한공주’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더니, 차기작 ‘카트’에서는 아예 대형마트로 갔다. ‘카트’ 촬영은 어땠나?
천우희:
일단 20대 연기를 처음으로 하게 돼서 좋았다.(웃음) ‘마더’에서 재수생이긴 했지만 본격적인 20대 연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 10대 연기는 그래도 또래나 어린 친구들과 호흡을 맞췄는데, ‘카트’는 선배들과 했다. 20대를 맡아도 선배들과 하니까 또 그냥 어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Q. 내가 배우라면 여자 선배들만 있는 현장보다 남자 선배들과 함께 하는 현장이 훨씬 더 편할 것 같다. ‘카트’는 여배우들(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등)이 대거 뭉친 작품이었는데 신경 쓰이는 건 없었나.
천우희:
그래서 나도 긴장을 많이 했었다. 감독님도 여자시다 보니 현장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다. 다들 너무 털털하시고, 너무 좋았다. 편하게 잘 찍었다.

Q. 최근 ‘가시’의 조보아, ‘인간중독’의 임지연, ‘마담뺑덕’의 이솜과 함께 주목받고 있다. 이렇게 신인급 여배우들이 한꺼번에 주목받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하는 질문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가장 낫다!’ 본인을 PR해 본다면?
천우희:
그 중에 나도 있나? 일단 함께 거론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리고 PR은… 뭐가 있을까. 존재감? 다른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예쁘잖아. 그에 비해 나는 평범한데, 그래서 오히려 더 존재감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 싶다.(웃음)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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